어!그래?(한국불가사의)/한민족과 중국인 차별성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7) : 복골 및 갑골문자

Que sais 2020. 11. 5.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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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복골(卜骨 , 갑골)

동이족이 중국 문명사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다대한데 그 중에서도 한자를 발명했다는 점이다. 동이족이 한자를 발명했다고 하니까 한국인이 한자를 발명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적어도 한자의 발명자화하족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문제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동물의 견갑골(肩胛骨, 어깨뼈)에 구멍을 뚫고 불에 구워 점을 치는 골복(骨卜, 갑골점)동이족의 전유물이다. 복골은 기원전 5,200년 전의 부하문화에서 처음 발견된 후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중원으로 내려간 ()에서 골복이 유행한다.

 

부하문화 갑골

그러나 은나라주나라에 패배하면서 골복의 전통은 사라지지만 동이족의 전통이 강한 부여나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서 많이 발견된다. 동이족의 동북지역과 한반도동일문화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복골 전통이 주로 북방 아시아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김정학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복골북중국과 만주 지방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이들 지방은 신석기시대 이래로 수렵방목을 주 생업으로 한 북방 아시아 족이 살고 있었다. 동물의 뼈, 특히 견갑골에 금을 내어 점복(占卜)하는 습속은 이들 수렵유목을 주로 한 북방 아시아 족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국의 골복 전통󰡔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조에도 나온다.

 

전쟁을 하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하고 발굽이 붙으면 하다고 생각한다.’

 

변한과 가야에서는 삼한시대까지도 골복이 발견되며 󰡔삼국지󰡕 <위지동이전> () 에서도 골복 전통을 갖고 있다.

 

왜의 습속에 일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일이 있으면 번번이 뼈를 구워서 길흉을 점친다. 불에 갈라진 금을 보고 징조를 점친다.’

 

골복에는 불에 굽는 것과 불에 굽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들 모두 골복으로 본다. 한국에서 골복의 실물두만강 유역 함북 무산 호곡동, 경남 창원 웅천패총(雄川貝塚)에서 사슴뿔을 이용한 복골, 부산 조도패총(朝島貝塚),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 김해 부원동(府院洞)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또한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郡谷里貝塚)에서도 구워서 점을 친 사슴과 돼지의 견갑골이 발견되었다. 김정학마한-백제 지역인 남해 군곡리 패의 복골변한-가야 문화의 일부가 해로를 통해 전해진 것으로 추정했다.

동이족이 건설한 ()나라 초기, 문자가 없이 소, , 돼지, 사슴 등의 어깨뼈인 견갑골에 구멍을 뚫어 불에 구워 신의 뜻을 묻는 단순한 골복 전통이 이어지지만 후대갑골 점을 치는 갑골문이 등장한다. 그런데 복골홍산문화 초기부하문화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홍산문화의 부하문화를 거쳐 복골의 전통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부하문화, 하가점 하층문화 및 상층 유적에서 복골 발견

하가점 상충문화를 이은 상()나라를 통해 복골이 다양한 형태의 갑골점으로 바뀜.

주나라 등장으로 중원에서 갑골점 소멸

홍산-고조선을 이은 만주지역과 한반도, 일본에서 계속 전승

 

동이족계에서는 복골이 계속 이어지지만 중원에서 상()나라에서 성행하던 갑골점이 소멸된다. 이는 주나라󰡔주역󰡕을 근간으로 하는 서법(筮法)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동이족의 지역에서는 복골의 전통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는데 󰡔삼국지󰡕 <위지동이전>이 작성되는 3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홍산 문화에서 복골이 태어난 이래 동이의 문화권에서만 복골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갑골(甲骨)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귀갑(龜甲·거북의 배 부분)이나 동물의 견갑골(어깨뼈)점을 치는 행위(占卜)를 말한다. 즉 거북이나 소의 어깻죽지 뼈 등 짐승뼈를 깨끗하고 매끈하게 다듬어 한 면에다 칼로 얇은 홈을 파 낸 후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에 못 이겨 좌우로 터지면서 잔금이 생긴다. 그 터지는 문양(兆紋)을 보고 길흉을 판단한다. 한자의 ()’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상형문자. 또한 발음이 ’(한국발음), 혹은 (중국 발음)’인 것도 터질 때 나는 소리로 추정하기도 한다.

상대 갑골에 기록된 점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 4가지로 나뉜다.

 

, 관리, 귀족, 평민, 노예, 군사, 전쟁, 형벌, 국토, 공납 등 정치적인 내용

농업, 수공업, 목축업, 상업, 무역, 교통 등 경제적인 내용

천문, 역법, 기상, 질별, 교육, 귀신숭배, 길융화복, 제사 등 문화와 사상적인 내용

기타

 

점복은 왕이 주관했으며 길흉을 점친 것을 판정하는 사람을 정인(貞人)이라 했는데 나라 말기에는 왕이 직접 정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점을 친 뒤에는 질문 내용과 점괘, 그리고 실제 상황과 맞아 떨어졌는지를 기록한다. 점을 친 뒤에는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놓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책()이다. 또한 점복 활동과 관계된 기록을 복사(卜辭) 또는 갑골문이라 하는데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갑골문 자체가 역사라는 것을 의미한다.

()에서는 하늘신과 조상신, 산천·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점을 쳤다. 국가대사에서 통치자의 일상 사생활까지, 예컨대 제사·정벌·천기·화복·전렵(田獵질병·생육까지 점을 쳤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는 유럽에서 인간에 관련된 모든 것을 신탁에 의지했던 것과 유사하다. 점복은 동이족의 문화로 계속 유지되어 왔는데 놀라운 것은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에도 나타난다.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그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시조설화에도 점복 신앙이 나타난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龜何 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이형구 교수는 이 글에서 ()는 구워먹겠다는 뜻이 아니라 점복에서 불로 지지는 행위를 뜻하는 ()가 와전됐거나 가차(假借)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불변을 뜻하는 ()갑골에 새긴 문자 혹은 불로 지져 터진 곳을 뜻한다는 설명이다.

 

한국 출토 갑골

갑골문자의 중요성은 기본적으로 이미 정형화하의 경향을 모이고 있다는 점이다. 갑골문은 이미 문자의 초보 단계를 벗어난 비교적 성숙된 문자라는 뜻이다. 상대의 갑골문이 결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원시문자가 아니므로 상대 말기 이전에 문자가 출현했음이 분명하다는 설명이다.

1962시라무룬(西拉木倫) 유역인 내몽골자치구 파림좌기(巴林左旗) 부하구문(富河溝門) 유적에서 발견된 갑골은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동이족의 대표 유물로 인식되는 ()자형 빗살무늬 토기도 출토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 유물의 연대로 무려 기원전 3500에서 기원전 3000년경이었다. 이 연대는 중국과 대만 학자들이 갑골문화의 원조로 보고 있던 하북(河北하남(河南산동(山東)반도의 용산문화(龍山文化, 기원전 2500기원전 2000)보다 무려 1000년이나 빠른 것이다.

특히 고조선 문화로 인식하는 발해연안의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에서도 갑골이 자주 발견된다. 적봉 지주산(蜘蛛山약왕묘(藥王廟) 유적, 영성(寧城) 남산근(南山根) 유적, 북표풍하(北票豊下) 유적 등에서도 다량의 갑골이 나왔다. 이들은 갑골문자로 유명한 상나라 초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것이며 갑골의 재료도 거북이가 아니라 사슴과 돼지 같은 짐승의 뼈를 사용했다.

이들 갑골의 중요성은 글자가 있는 갑골, 유자갑골(有字甲骨)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 글자 없는 갑골, 무자갑골(無字甲骨)이었다.

그동안 학자들은 갑골문자가 태어난 후 중원으로만 파급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갑골이 발견되어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갑골이 일본에서 발견된다면 동이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의문점은 곧바로 풀렸다. 1960년과 1964년에 발굴된 경상남도 창원 웅천패총에서 사슴뿔을 이용한 복골 6이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부산 조도패총, 경남 김해 부원동 유적에서도 복골이 발견되었다.

현재 국내에서 복골이 발견된 지역은 이상에서 열거한 곳 이외에도 두만강 유역 함북 무산 호곡동, 김해 봉황동 유적과 사천 늑도,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와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에서도 발견되었다. 동이족인 한민족이 동이족이 만든 갑골을 사용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정학마한-백제 지역인 남해 군곡리패총의 복골은 변한-가야 문화의 일부가 해로를 통하여 전해진 것이며 이와 비슷한 시기인 일본 서부의 미생시대(彌生時代) 후기 유적에서 발견되는 복골 등도 변한-가야의 복골 전통이 해로를 통해 전파된 것이라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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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한자는 동이족의 유산

중국에서 최초로 문자를 만든 사람은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으로 알려진 창힐(())로 전해진다. 그는 새나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창안하여 그 때까지 새끼의 매듭으로 기호를 만들어 문자 대신 쓰던 것을 문자로 고쳤는데 이를 창힐문자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이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는 중국 서안의 비림 박물관창힐의 비석을 특별히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여하튼 학자들은 새끼의 매듭을 이용하여 문자로 사용했다는 전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고 설명하는데 이런 한자야말로 동이족이 발명했다고 설명한다. 199314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면 더욱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약 4300년 전 신석기시대 후기문화를 보여주는 용산 문화 유적지추평현 정공(鄒平縣 丁公)에서 문자가 새겨진 도자기 조각이 출토돼 중국의 문자 사용연대가 현재까지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아온 연대(기원전 1400년경)보다 최소한 9백년 가까이 더 올라가는 기원전 2300년경으로 판명됐다고 홍콩의 중국계 신문들이 구랍 30일 보도했다.

(중략) 현재까지 국제적으로 공인된 중국의 문자 사용연대는 금세기초에 발견되 갑골문자를 근거로 기원전 1400년경의 상대 말기로 추정해왔다.

(중략) 용산문화1928년 산동성 용산진에서 처음 발견된 황하강 중하류에 분포된 문화로 대략 기원전 28002300년경에 황하유역에 있었던 신석기 후기문화인데, 이들 문화유적지에 많은 흑색도자기가 출토되어 흑도문화라고도 부른다.

산동대학 고고학팀이 출토해낸 도자기에 오행으로 새겨진 11개의 부호를 전문가들이 감정해 본 결과 이것들이 용산문화 후기에 속하는 기원전 2300년경의 하 왕조 이전에 사용됐던 문자인 것으로 판명됐으며 전문가들은 도구를 이용하여 숙련된 기술로 새긴 이들 문자는 그 배열에 순서가 있고 어떤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예가이며 문자연구가인 김응현씨는 기원전 2300이라면 고조선 시대로 특히 지금의 산동성 지역은 고조선에 포함된 지역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면서 한자를 막연히 중국의 문자로 정의할 것이 아니라 동방문자로 재조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서 김응현의 주장이 억지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용산문화시기와 하상 시대의 황하 하류 산동지역은 동이 계통의 분포지로 교육부 검정 고등학교 역사부도동이족의 분포와 고조선 강역을 나타내는 지도가 있는데 이곳에는 산동반도가 동이족의 영향권으로 들어가 있다. ()나라가 동이족중화족의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건설한 나라라는 것을 이해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한자가 동이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동이족의 터전에서 갑골이 사용된 후 이어서 갑골문자()에 의해 활용되다가 이것이 발전하여 한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중국의 황제 때 사관 창힐(蒼頡)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 흔적을 보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문제는 한자과학적으로 분석하면 간단하게 설명된다. 우선 한자의 전신이 은에서 태어난 갑골문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므로 한자의 전신 갑골문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보다 설명한다.

학자들은 현재까지 은나라 수도였던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10만 여 점이 넘는데 이 중 해득된 갑골문은 대체로 약 6,000개로 파악한다. 다시 말하면 은나라 사람들이 6,000여개의 디자인 작품 즉 문자들을 만든 셈이다.

 

은허 출토 갑골문자

세 가지 기본 법칙으로 한자글꼴을 만들었다. 첫째는 가장 기초적인 상형의 방법으로 묘사 대상을 직접 그려냈다. 주로 사람이나 동식물이 직접 묘사의 대상이었다.

둘째는 두 개 이상의 그림을 합치는 것이다. 즉 단순 그림만으로는 그 의미를 다 표현할 수 없으므로 이미 완성된 두 개 이상의 그림을 합쳐 추상적인 의미나 분위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 기법은 사실 한자가 표음화의 고비를 돌파할 수 있게 한 중요한 언어학적 열쇠. 바로 이 기법의 발명을 통해 한자는 사각형 안에 여러 개의 의미 자형들을 채워 넣으면서 일련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덕분에 한자는 수많은 문자들을 거의 무제한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으므로 현재와 같이 엄청난 한자 즉 대량생산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림 합치기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의미와 의미를 합치는 방법인 회의(會意)이며 다른 하나는 의미와 소리를 합치는 방법으로 형성(形聲)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