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 라스푸틴 복권(3)
<스톨리핀의 등장과 퇴장>
라스푸틴이 혈우병을 갖고 태어난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알렉세이의 내출혈을 어떻게 치유했는가는 수수께끼 중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라스푸틴의 전설 전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사건 중 하나인데 일부 학자들은 라스푸틴이 최면술을 걸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최면술이 혈우병과 같은 유전병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놀라운 것은 황태자의 혈우병이 완전히 치료된 행적을 보인다는 점이다. 정말 황태자의 혈우병이 치료되었는지 논란의 대상이지만 학자들은 라스푸틴이 장기간 순례기간 중 혈액응고 효과가 있는 약초를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라스푸틴이 티베트 치료사인 바드마이에프(Badmaiev)라는 사람과 어울렸다는데 연계를 찾는 사람도 있다. 바드마이에프는 자신이 티베트에서 여러 종류의 약초와 마법의 처방을 갖고 왔으며 이를 러시아에서 직접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취급한 것은 ‘티베트 비약’, ‘니엔첸의 밤’, ‘검은 연꽃의 정수’ 등으로 불렀는데 이는 마약, 마취제 및 최음제로 알려진다. 이것이 혈우병과 어떤 연계가 있었는지 불분명하지만 라스푸틴과 바드마이에프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천연 약초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한마디로 어떤 연유로든 라스푸틴이 혈우병을 치료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이는 추후에 알렉세이 황태자가 이파티에프 궁전에서 벌어진 니콜라이 2세 황제일가 학살에서 살아남았고 필라토프라는 이름으로 84살까지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세계를 속인 거짓말> ‘아나스타샤’의 장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었으므로 참조바란다.
여하튼 니콜라이 2세, 황후인 알렉산드라로 볼 때 황태자가 유전병인 혈우병에서 완쾌해 건강을 회복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이들로 보아 라스푸틴이 왕통을 이어갈 제국을 살려내었다고 할 만큼 엄청난 경사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라스푸틴은 황실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었다. 알렉산드라가 라스푸틴을 하늘이 내린 구원자로 말할 정도인데 이는 자연스럽게 라스푸틴이 황실의 조언자로 자리를 굳혀가면서 점차 정치적 조언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당대의 정황이다. 총리로 임명된 스톨리핀은 상당히 러시아 인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이는 스톨리핀이 러시아의 참혹한 현실에서 구해줄 구세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톨리핀으로서는 황실을 드나드는 라스푸틴이 고깝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은 스톨리핀이 라스푸틴의 비행을 적어 니콜라스 황제에게 제출했으나 황제는 자신의 후계자인 알렉세이의 생명을 구하고 자신의 제위를 잇기 위해서는 라스푸틴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러시아 권력 투쟁은 스톨리핀과 라스푸틴의 대결로 모아지는데 머리가 좋은 라스푸틴은 스톨리핀과의 대결을 현명하게 회피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예루살렘 성지 순례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911년 9월 자신에 대한 암살계획이 포착되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스톨리핀이 황제가 참석한 키에프 오페라하우스에서 좌익 세력의 바그로프(Bagroff)라는 혁명가의 총에 맞고 사망했다는 점이다.
스톨리핀은 당대 러시아의 엘리트 중 한 명으로 독일 주재 러시아 특사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 188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했다. 당시 코브노는 농촌공동체의 해체가 진행되고 자영농의 비율이 높았던 지역인데 그의 농장 운영체제와 행정 체제 개편이 인정받았다. 이후 1906년 4월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 8월 그에 대한 테러로 딸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을 때 니콜라이 2세의 요청으로 라스푸틴이 부상당한 스톨리핀의 딸을 방문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당시 팽배하던 반혁명 정책을 탄압해 수천이 넘는 사회주의자들을 교수대로 보냈다. 이러한 스톨리핀의 행보는 혁명가들이 교수대를 '스톨리핀의 넥타이'라고 부를 정도로 냉혹했다. 그의 반혁명 기치는 계속되어 러시아의 귀족에게 더욱 많은 투표권을 주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불만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토지개력을 통해 소규모 지주와 부농 · 자영농 계층을 만들어 이들이 황실을 지지하게 하고 농민들의 불안을 막으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스톨리핀에 대해 큰 점수를 주는 것은 그의 재임기간 중 추진된 개혁의 성과는 러시아 경제가 서구와 같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인들 입장에서는 만약에 스톨리핀이 중간에 암살당하지 않고 그의 개혁이 지속되었더라면 러시아가 남다른 산업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추후 라스푸틴을 살해한 핵심인 펠릭스 유수포프 왕자는 다소 놀라운 정보를 전했다. 스톨리핀을 살해 한 바그로프는 비밀경호국에서 일하며 라스푸틴의 친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러시아와 왕권의 적들에게 승리임에도 수사가 졸속으로 종료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유수포프 왕자는 황제와 황후가 사건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황후는 라스푸틴을 살해할 때 공범자 중 한 명인 드미트리 대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했다.
'우리 친구로 인해 신을 화나게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신의 보호를 의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천국으로 직행하는 '스타렛'의 기도만이 보호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라스푸틴을 공격하는 사람은 신을 화나게 한다는 뜻과 다름없다.
여하튼 소톨리핀은 현재도 미완의 개혁가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도 이름이 높은 쟁쟁한 정치가들과 문필가들, 군주들을 제치고 러시아의 인물 2위에 선정될 정도로 명성을 갖고 있다. 그의 죽음에 러시아인들이 가지는 아쉬움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현재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롤 모델로 알려진다.
자신을 공격하던 스톨리핀이 죽자 라스푸틴은 곧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고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러시아 사교계의 화두는 단연 라스푸틴이었다. 영국 대사의 딸 메리얼 부캐넌은 일기에 ‘왕좌 뒤의 검은 권력’, ‘실권자 라스푸틴’, ‘황후에 대한 부끄러운 이야기들’이라고 기록했다.
라스푸틴이 얼마나 황후와 밀착했는지는 젖꼭지 위로 머리를 쳐들고 검고 풍성한 머리와 수염 속에서 음탕한 눈빛으로 러시아 위에 있는 탑을 쏘아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그림들도 곳곳에 유포될 정도였다. 도박꾼들은 스페이드 킹에 황제 얼굴 대신에 그의 얼굴을 그려 넣은 카드를 사용했고 라스푸틴의 사진은 사교계 여인들의 수집품이 되었다.
<러시아의 악몽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6월 27일 오후 2시, 그의 고향 마을에서 라스푸틴은 검은 숄을 쓴 구세바(Chionya Guseva) 여자에게 칼로 가슴을 찔렸다. 그는 통증을 참으며 주먹으로 여자를 내리친 후 상처를 누르며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구세바는 신문에서 라스푸틴에 대한 기사를 읽고 그가 ‘거짓 예언자이자 심지어 적그리스도’라고 믿고 혼자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병원에서 라스푸틴은 황제에게 전보를 쳤다.
‘무서운 태풍이 러시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독일을 이길지는 모르지만, 그 다음에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재앙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러시아는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날은 유럽의 비극 즉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날이다. 같은 날 오전 11시, 세르비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를 방문하던 중 민족주의자인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1894〜1918)로부터 저격받고 사망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페르디난트 대공을 살해할 때 보스니아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이지만 세르비아 국적이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민이었다. 초등학교 학창시절 그는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는데 13살 때 사라예보에서 남슬라브 민족주의 운동인 ‘젊은 보스니아’의 운동에 참여하고 시위에 참여했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계와 헝가리계 민족이 1등 국민, 그 외는 2등 국민이나 다름없는 불평등한 구조로 다양한 민족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이에 합스부르크 황태자와 씨시 공주의 세기적인 러브스토리로 태어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비교적 개혁적, 진보적 성향으로 국가 분열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론’으로 제국 내 여러 민족에게 광범위한 주권을 부여하는 등 개혁을 통해 민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불평등한 국가 구조를 혁신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남슬라브계 민족을 규합하여 자국에 포함해 독립하려 했던 세르비아 왕국 입장에선 치명적이므로 세르비아의 강경 민족주의자들은 페르디난트 대공을 제거하려 하였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가입한 ‘젊은 보스니아’ 등이 그러한 극단적 민족주의 단체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의 기념일에 군사 훈련에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기로 하자 이들은 황태자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며 우여곡절을 겪어 프린치프가 대공을 살해한다.
그의 행동으로 곧바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까지 무려 네 개의 제국이 멸망되는 결과를 낳았다.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곧바로 체포되었지만 당시 만 20세에서 27일이 모자란 미성년자였으므로 사형이 아니라 징역 20년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체포 과정에서 심한 구타를 당해 입은 부상을 비롯하여 결핵 등 합병증으로 오른팔을 절단하였고 결국 1918년 교도소 안에서 병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민족자결주의와 대세르비아주의에 따라 가브릴로의 뜻대로 남슬라브 민족들을 통합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태어났고 유고슬라비아 혹은 세르비아의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이질 민족의 이합집산 등으로 유고슬라비아가 수많은 나라로 분리되었지만 현재도 화약고 발칸이라는 문제점이 잠재하고 있다. 프린치프에 대한 평가도 세계 역사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비극을 초래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많은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으며 세르비아 정교회는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선포했다.
여하튼 사라에보에서 프린치프에 의해 페르디난트 대공이 살해되자 곧바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