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상태로의 유지가 최선>
보수공사 때마다 첨단 기술을 사용했음에도 습기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석굴암의 훼손 상태가 날로 심화되고 있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학자들은 석굴암의 훼손은 보수할 당시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석굴암은 당초에 건설되었던 석굴암과 구조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즉 석굴암의 본래 모습대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게 된 필연의 결과라는 뜻이다.
석굴암은 원래 일반 건물과 같이 주벽은 직경 10센티미터 정도의 자갈들로 채워졌는데 그 두께는 1.2미터 또는 1.5미터 정도였다. 즉 이 자갈층이 바로 석굴암의 습도를 조절하는 자동제습장치였다는 것이다. 차고 더운 외부의 공기는 자갈층을 통과하면서 수증기가 응축돼 자갈에 남고 공기는 차가워진다. 이렇게 차가워진 공기는 밀도가 높아 자연히 아래쪽으로 흘러 석굴암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때문에 송풍기가 없어도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내부를 꾸준히 채우게 돼 석굴암 안은 항상 뽀송뽀송한 상태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큰 지적은 석굴암의 바닥 밑을 흐르던 지하수를 없앤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라는 설명이다. 그 지하수는 바닥의 온도를 벽면의 온도보다 낮게 유지해 불상 표면의 결로 현상을 막아주던 자동 습도조절 장치였다. 그밖에도 아치형 천장 위에 위치한 광창 등을 비롯해 석굴암에는 수많은 통풍장치가 있었다.
지붕에는 판석을 덮어 빗물을 처리하였고 출입구는 개방된 구조였다. 남천우 박사에 의하면 출입구 상부에는 아치형의 광창이 있었고, 주벽인 10개의 소감실 배후에도 창구가 있어 광선과 공기가 그곳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수리과정에서 이러한 원형이 모두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이태영 교수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석굴암은 본래 지하에서 용출되는 물이 굴의 바닥에 있는 암석 기초층을 관통하여 흐르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의 보수공사 때 이 지하수를 다른 곳으로 방출되도록 구조를 변경한 것도 석굴암 훼손에 한몫 했다고 지적했다. 원래의 배수방법은 굴 안의 온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해서 벽면에 결로 현상이 생기는 것을 막았는데 이를 변경하였기 때문에 습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일제가 1910년대 처음으로 석굴을 보수하기 이전에 했던 기초 조사의 평면도를 보면, 원형 주실의 뒤쪽과 2시 방향의 바로 옆면에 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샘물의 양은 10초에 1리터나 되는 많은 양으로 일 년 내내 쏟아져 나왔다. 결로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여름, 차가운 샘물이 석굴 밑의 석재 아래로 흐르면 바닥면의 온도가 낮아진다. 벽면이나 석불의 외면에 비해 바닥 면의 온도가 낮으면 이슬은 바닥 면에서만 생긴다. 이러한 원리를 석굴암을 만든 신라의 석공들이 터득했기 때문에 샘물 바로 옆에 석굴을 짓고 그 밑바닥으로 샘물을 흘려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석굴암에서 습기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석굴 내부가 숨을 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숨을 쉰다. 건축물의 경우도 그것이 지하이든 지상건축이든 숨을 쉬어야 한다. 특히 석굴암과 같은 석조물에 있어서는 내부의 온도와 외부의 온도 사이에 차이가 조금만 나도 곧 석상 표면에 결로현상을 야기한다. 때문에 내외의 온도차를 최대한으로 줄임으로서 온도차로 생기는 석상 표면의 결로현상을 막아야 하는데 석굴암은 자연 통풍 및 온․습도 조절장치를 통해 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석굴암을 1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살아 숨 쉬게 만든 또 다른 비밀은 원활한 통풍이다. 석굴암에는 수많은 통풍장치가 있다. 우선 석굴암 주실에 위치한 10개의 감실과 감실을 받치고 있는 돌 사이에는 작은 틈이 존재해 공기를 순환시킨다. 또 출입구의 아치형 천장 위에 위치한 광창은 채광은 물론 원활한 통풍을 이루게 만들어졌다.
이밖에도 본실 지붕 외벽엔 직경이 10㎝가 넘는 돌들이 1m가량 쌓여있는데 이 자갈층을 통해서도 공기는 안팎을 넘나든다는 설명이다. 자갈층은 제습 기능도 겸비했다. 외부의 습하고 더운 공기는 자갈층을 지나며 수증기를 자갈층에 남기고 차가워져 내부로 유입된다. 때문에 석굴암은 차고 건조한 공기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자갈층은 낮에는 물을 머금고 있다가 밤이 되면 온도차에 의해 바깥으로 수분을 방출하고 다음날을 준비했다. 그런데 현재의 감실은 일제 강점기 때의 보수 공사로 감식 석재들이 모두 교체되면서 통풍을 할 수 있게 만들었던 환기창들을 모두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신라인들이 석굴암을 건축한 이래 10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완벽히 보존되다가 현대과학을 동원하여 보수 및 복원 조치했는데 결로현상이 생긴 원인은 한마디로 밀폐구조를 강요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지적은 상식이나 마찬가지다.
원형대로라면 완전히 개방된 구조이기 때문에 대기의 온도가 상승하면 내부의 표면 온도도 통풍에 의하여 함께 상승하므로 결로가 생기지 않는데, 광창과 창구를 모두 막고 전면을 목조 암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석굴암 전면에 건물이 있느냐 없느냐로 귀착된다.
현재 석굴암 전면에 목조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건설된 이유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1960년대의 석굴암 보수공사 때 현재 목조 전실이 세워진 곳 주변에서 건물의 초석과 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다양한 기와조각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목조 전실이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석굴암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중국 돈황의 여러 석굴에도 목조 전실이 있었으며 영조 9년(1733)에 정선이 그린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에 나오는 경주군 양북면 안동의 「골굴석굴도」에도 석실 입구에 전실이 보인다.
석굴암 앞에 전실이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우선 18세기 중엽의 경주부 지도에 목조 건물로 씌워지지 않은 석굴과 그 옆에 목조 암자가 별도로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지도에는 석굴의 위쪽에 ‘골굴’이라는 목조 암자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중양 박사도 1961년 보수 공사를 담당한 사람들이 정선의 그림을 보고 석굴이 목조 암자로 되어 있다고 이해하고 현재와 같이 전실을 목조 건물로 덮어 버렸지만 이는 정확한 자료를 확인하지 않은데서 온 착오라고 지적했다.
현재 석굴암의 구조에 관한 학계의 입장은 크게 둘로 양분되어 있다. 목조 전실 등 현재의 상태가 옳다는 측과 그것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측으로 현재 석굴암에 적용되는 보존의 방법은 큰 틀에서 후자의 주장에 속한다.
이러한 대립의 연원은 1960년대 석굴암 보수공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각에서는 이를 한때 공동감독관으로 일했던 황수영과 김원용 간의 충돌의 여파라고 인식한다. 당시 김원용은 팔부신중의 배열 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로 사의를 표명했고 결국 보수공사는 황수영 박사 주도로 진행되었다. 이곳에서는 양 측의 주장이 워낙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으므로 이들 중 누가 옳은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측 즉 황수영 진영의 의견을 똑같은 비중으로 적는다.
현 석굴암의 원형 복구를 요구하는 측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좁혀진다. 전실을 지붕이 없는 ‘개방 구조’로 바꾸고 전실의 양쪽 벽면을 차지하는 팔부신중도 현재의 전개형(展開形)에서 일제강점기 때의 ‘절곡형(折曲形)’으로 되돌려 놓고 주실 앞면에 ‘광창(光窓)’을 뚫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공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김원룡 측에게 공격을 받을 만큼 황수영 측에서 그 중요한 석굴암을 한마디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느냐이다. 먼저 전실에 목조건물을 설치한 이유는 『석굴암수리공사보고서』에서 다소 유추할 수 있다.
‘첫째의 주목거리는 석굴 내 불상의 오탁(汚濁)으로 검은 바탕을 이루는 격심한 돌 표면의 착색과 그 위에 파란색 이끼의 발생을 들어야 한다. 이같은 오탁의 가장 큰 원인은 사계절을 통한 구름과 안개의 침입, 특히 여름철에 있어서의 과도한 습기 및 물방울이 줄줄 흐르는 상태에다 동남풍을 주로 받게 되는 석굴에 있어서 수도(隧道, 터널)와 같은 입구 형태에서 불어들어 오는 흙모래의 침입이 굴내 전체에 떨어져 쌓여 수분과 혼합됨으로써 그 흙먼지의 더러운 액체가 흘러내려 착색케 함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략) 이 같은 누수 현상은 특히 여름철의 긴 장마 때와 그 전후의 강우량 과다에서 매우 심했을 것이다. (중략) 굴내 본존불 앞에 서서 강풍에 따르는 흙모래 침입에는 눈을 뜰 수 없었을 정도로 격심할 경우가 허다하게 있었으며 굴내 토면(土面)의 침수는 물이 고여 진흙이 되었고 심지어는 굴 안으로부터 배수를 요하게 되었다. (중략) 더구나 전실이 노출되어 있으므로 기상 변화에 따라 변질된 공기가 굴내에 직접 유입하여 아무런 장애 없이 이슬점, 결빙의 현상을 나타낸다. 굴 밖 표면의 콘크리트 단절층과 봉토에서 작용하여 나오는 지열, 지하수, 누수의 영향은 앞에 말한 악조건에 한층 더 좋지 않은 영향을 주어 한마디로 말하자면 석굴암은 버림받은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굴암이 동해(東海)를 직면하지 않았거나 평지에 있기만 해도 모면할 수 있는 기상의 열악한 조건도 합하여 석굴암 또 그의 조각상들은 동해(凍害), 풍우, 화학적인 피해로 상당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들 자료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석굴암은 상당히 열악한 조건하에 놓여 있었으며 당시의 일지(日誌)에도 동절기에 굴 외부 전실 전체를 세 겹의 짚으로 덮기도 하고 때로 주실 안에 난로까지 피워 동파를 방지하려고 끼고 평균습도도 97%라는 특수성을 갖고 있었다. 즉 바다에 면한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오는 기상조건이 석굴암의 황폐화를 촉진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굴암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로 목조구조물을 설치했다는 설명이다. 한마디로 졸속으로 목조건물을 세운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친 결과라는 것이다.
'유네스코(한국유산) > 경주역사지구 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2) 석굴암(12) (0) | 2021.12.15 |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1) 석굴암(11) (0) | 2021.12.14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9) 석굴암(9) (0) | 2021.12.13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8) 석굴암(8) (0) | 2021.12.11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7) 석굴암(7) (0) | 2021.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