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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 라스푸틴 복권(15)

https://youtu.be/Mk0gGXINE14 라스푸틴 사후 그에 관한 작품은 하나의 작은 산업이라고 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거대한 제국을 붕괴시킨 신비에 싸인 마법사, 신비술사라는 자체가 대중의 큰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영화계 역시 이 좋은 소재를 놓칠 리 없다. 그의 죽음 후 불과 1년만인 1917년에 벌써 그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졌다.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The Fall of the Romanovs)」이라는 미국산 무성영화다. 이 영화에는 특히 라스푸틴 생전에 그의 일종의 라이벌로 알려지는 그리스정교의 사제 일리오도르(본명 세르게이 트루파노프)가 실명으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으나 필름이 사라져 볼 수 없다. 1927년 소련 영화가 제작한 최초의 역사 다큐멘터리가 「로마노프 제국의 몰락..

킹스맨, 라스푸틴 복권(14)

https://youtu.be/Mk0gGXINE14 의 자료를 검토한 라진스키 박사의 결론은 간단하다. ‘사악한, 변태 수도승’으로 매도되었던 라스푸틴은 정치 음모의 희생자로 제정 러시아 황실 가문 내부의 권력 다툼과 러시아 황제 반대 혁명 세력 등이 각종 유언비어를 유포해 라스푸틴을 괴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박광직 박사의 글에서 많은 부분을 참조한다. 라스푸틴에 대한 가장 큰 공격은 그가 반역자로 황후와 결탁하여 러시아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악한 라스푸틴의 사주에 의해 독일계의 황후가 독일에게 유리한 세계정세를 만들어가려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중추인 영국과 독일의 전투에서 러시아가 어떤 조처를 취하느냐이다. 문제는..

킹스맨, 라스푸틴 복권(13)

https://youtu.be/Mk0gGXINE14 라스푸틴이 생존해 있을 때에도 라스푸틴이 비선으로 러시아 국정에 커다란 농단을 부렸다는 비판은 상당히 과장되었다고 지적된 것은 사실이다. 당대 러시아제국이 여타 유럽 제국에 비해서는 다소 수준이 떨어지지만 문맹이라까지 매도되는 라스푸틴에게 국가가 좌지우지되었다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와 독일계 황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매도당했다는 주장이 보다 큰 설득력을 얻는다. 이 문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다룬 사람이 미스터리 학자로 유명한 콜린 윌슨 박사다. 그는 라스푸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현대사의 어떤 인물도 그리고리 라스푸틴만큼 선정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자료로 가득 차 있지 않다. 그에 대한 책이 백 권도 더 있..

킹스맨, 라스푸틴 복권(12)

https://youtu.be/Mk0gGXINE14 코소로토브 박사가 라스푸틴이 3개의 서로 다른 총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주장했는데 그 중 하나는 영국 정보 요원 레이너(Oswald Rayner)에게 지급된 총인 455 웨블리 리볼버였다. 스미스 박사는 이를 근거로 레이너가 라스푸틴의 암살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라스푸틴 살해에 유스포프 왕자를 비롯하여 5명이 전적으로 관여했다고 이야기되는데 레이너의 등장은 상당히 헷갈리는 이야기이지 않을 수 없다. 레이너는 당시 주러시아 영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젊은 장교로 유수포프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할 때부터 잘 알던 사이로 유수포프가 회고록을 집필할 때 영어 통역담당이었다. 유수포프와 라스푸틴 살해 후에도 계속 만났는데 유수포프는 라스푸틴이 살해된 다음 날 우..

킹스맨, 라스푸틴 복권(11)

https://youtu.be/Mk0gGXINE14 언론은 곧바로 라스푸틴이 실종되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황후는 니콜라이 2세에게 라스푸틴의 실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여기에 함께 앉아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친구가 사라졌습니다. 유수포프는 집에 오지 않고 그에게 묻지 않은 척합니다.’ 다음날에도 라스푸틴에 대한 우려를 황후는 계속 황제에게 보인다. ‘아직 흔적이 없습니다. (중략) 경찰이 수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비참한 두 소년(펠릭스 유수포프와 드미트리 로마노프)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은 것 같아 두렵습니다.’ 라스푸틴의 시신은 12월 19일 얼음 위를 걷고 있던 네바강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다. 다리에서 약 65m 떨어진 ..

킹스맨, 라스푸틴 복권(10)

https://youtu.be/Mk0gGXINE14 ④ 드미트리 코소로토프(Dmitrii Kosorotov) 교수 라스푸틴의 살해에 있어 가장 혼동되는 것은 네바 강에서 회수한 라스푸틴의 시신을 부검한 드미트리 코소로토프 박사의 보고서인데 작성 날짜는 1916년 12월 20일이다. 그런데 그의 부검 보고서는 라스푸틴 살해에 관련된 장본인들의 이야기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몸은 중간 크기의 50세 정도의 남성으로, 흰색 셔츠를 덮는 파란색 수 놓은 병원 가운을 입고 있었다. 키가 큰 동물 가죽 장화를 신고 있는 그의 다리는 밧줄로 묶여 있고 같은 밧줄이 그의 손목을 묶었다. 그의 흐트러진 머리는 밝은 갈색이며 긴 콧수염과 수염도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의 입은 반쯤 벌려져 있고 그의 이빨..

킹스맨, 라스푸틴 복권(9)

https://youtu.be/Mk0gGXINE14 ② 블라디미르 푸리슈케비치 라스푸틴의 또 다른 주역은 블라디미르 푸리슈케비치다. 그는 1918년 『라스푸틴의 살해(The Murder of Rusputin )』로 당대의 정황을 매우 자세하게 적었다. ‘우리가 모이카 궁전의 상층에 있는 테이블에서 보낸 한 시간은 나에게 영원처럼 느껴졌습니다. (중략) 우리는 차를 마치면 예기치 않은 손님이 와서 겁에 질린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테이블을 떠난 것처럼 보이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컵에 약간의 차를 부었고, 남은 케이크 조각과 피로즈키 그리고 구겨진 테이블 냅킨 몇 개 사이에 부스러기를 흩뿌려 테이블을 흐트렸습니다. 유수포프 왕자가 라조베르 박사에게 청산가리 몇 조각을 주자 그는 왕자가 준 장갑을 끼고 ..

킹스맨, 라스푸틴 복권(8)

https://youtu.be/Mk0gGXINE14 유수포프가 라스푸틴에 권총을 발사하여 쓰러진 이후 다시 지하실로 내려갔는데 이후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놀랍다. 마치 공포영화에나 나올 수 있는 바로 그런 장면이다. ‘라스푸틴은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그의 손은 꽉 쥐었고 그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의 실크 블라우스에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나는 시체를 팔로 붙잡고 세게 흔들었다. 내가 막 나가려고 했을 때 갑자기 그의 왼쪽 눈꺼풀이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몸을 굽혀 그를 자세히 보았다. 자기 왼쪽 눈이 뜨는 것을 보았고. 몇 초 후 오른쪽 눈꺼풀이 떨리기 시작했다가 열렸다. 그때 나는 두 눈, 즉 독사의 녹색 눈이 사악한 증오의 표정..

킹스맨, 라스푸틴 복권(7)

https://youtu.be/Mk0gGXINE14 ① 펠릭스 유수포프(Felix Yusupov) 왕자의 증언 펠릭스 유수포프는 푸리슈케비치의 제안대로 라스푸틴을 자신의 집인 모이카 궁전으로 유인하여 궁전 지하실에서 살해키로 했다. 지하실의 절반은 식당으로 사용되며 나머지는 계단이 위 층에 있는 유수프의 방으로 이어지며 중간에 안뜰로 열리는 문이 있는 구조다. 유수포프가 라스푸틴을 안내한 장소가 지하실이라는 것에 놀랄지 모르므로 긴급하게 실내장식을 바꾸었다. 즉 방에 가구를 배치하고 사람이 사는 일상 생활의 공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는 바닥에 페르시아 카페트를 깔고 세 개의 커다란 붉은색 중국 도자기 꽃병, 오크 나무 조각 의자, 고대 자수로 덮인 작은 테이블, 상아 그릇 및 기타 많은 골동품들은..

킹스맨, 라스푸틴 복권(6)

https://youtu.be/Mk0gGXINE14 펠릭스가 라스푸틴을 죽여야한다고 결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라스푸틴의 전기 『라스푸틴』을 쓴 다글라스 스미스(Douglas Smith)는 그의 어머니의 편지 때문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15년 10월 펠릭스의 어머니 지나이다 공주는 황실 가족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것을 참아내고 침묵하는 모든 사람을 경멸한다.’ 사실 수년 동안 라스푸틴을 겨냥한 여러 차례 살해 시도와 음모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스푸틴에 대한 제거는 러시아인들의 화두로 농민, 언론, 고위 관리, 왕족, 심지어 교회까지 공개적으로 그의 살인을 요구할 정도였다. 최전선의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황제가 권력이 절정에 ..

킹스맨, 라스푸틴 복권(5)

https://youtu.be/Mk0gGXINE14 〈라스푸틴의 죽음〉 러시아가 계속 독일에 패배하자 로마노프 왕조로서는 더 이상 독일과 싸워 승산이 없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결국 모든 책임은 라스푸틴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는데 황제와 황후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라스푸틴을 계속 옹호했다. 두마의 지도자가 마지못해 황제에게 라스푸틴을 제거하라고 간청하면서 라스푸틴에 대한 나쁜 소문도 알렸다. 당시 돌아다니던 팜프렛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그레고리 신부는 새롭게 탄생한 악마의 성인이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매도한 자이고 러시아를 폐허로 만든 자이며, 부인과 하녀의 순결을 빼앗은 자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사람은 황제와 황후가 아니라 라스푸틴 본인이었다. 라스푸틴은 시..

킹스맨, 라스푸틴 복권(4)

https://youtu.be/Mk0gGXINE14 1914년 러시아 제국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전쟁에 개입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했다. 당시 러시아 내부 사정은 매우 복잡한데 그동안 라스푸틴의 반대파들은 라스푸틴에 의해 러시아가 니콜라이 2세의 구렁텅이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실제로 밝혀진 내용은 이와 정반대이다. 라스푸틴은 종교적, 도덕적 그리고 현실적인 면에서 러시아의 참전에 반대했다. 박광작 박사는 니꼴라이가 라스푸틴에게 자문을 구하자 라스푸틴은 단호히 전쟁에 휘말리지 않아야 한다고 충언했다고 적었다. 라스푸틴의 전쟁 반대 논리는 농민의 아들로서 아주 간단명료했다. ‘독일 사람들은 힘이 있고, 체력도 단단합니다. 발칸의 슬라브 형제들은 돼지같이 천한 인간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러시아 사람..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70) 불국사(8)

https://youtu.be/tS4j_44SFMw 석가정토, 아미타정토를 이어 연화장세계로 들어간다. 『삼국요사』 편에 사복이 원효스님(617~686)과 함께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에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내용이 있다. 이 때 사복은 다음과 같이 연화장 세계로 들어가는 게송을 읊는다. ‘석가모니 붓다께서 사라(娑羅)나무 숲에서 열반하셨네. 지금 그와 같은 사람이 또한 있어 연화장 세계로 돌아가려 하네’ 게송을 마치고 풀줄기를 뽑아 올리니 땅 밑에서는 칠보 난간으로 장엄된 누각을 중심으로 밝고 청정한 세계가 펼쳐진다. 사복은 어머니를 업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원효스님이 지혜의 숲이라고 했던 바로 그 연화장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 일화는 상당한 역사가 있다. 불국사의 창업자 김대성은 불..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9) 불국사(7)

https://youtu.be/tS4j_44SFMw 칠보교와 연화교를 지나 다다르게 되는 아미타정토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8세기에 한창 융성한 아미타 신앙은 모든 중생이 나무아미타불을 단 한 번만 염불해도 속세의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행복의 땅 즉 극락세계가 바로 아미타정토다. 『무량수경』에 의하면 아미타정토는 서방정토에서 가장 훌륭하고 장엄한 세계로 무수한 불국토의 중심에 있다고 한다. 이 구역은 석가정토보다 면적도 좁고 건물도 낮으며 장식도 간단하다. 아미타 신앙대로라면 불국사에서 아미타정토 구역을 제일 장엄하고 높게 조성하는 것이 이치이지만 규모나 구조면에서 아미타정토는 석가정토의 부속물로 설계되었다. 권지연은 이와 같이 설계된 이유로 아미타 신앙이 신라시대 대중 사이에..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8) 불국사(6)

https://youtu.be/tS4j_44SFMw 〈목판 인쇄물의 대명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인쇄기술은 세계적으로 목판, 목활자 인쇄를 걸쳐 금속활자 인쇄로 발전하였다. 이는 금속활자가 목판과 목활자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이루어졌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목판인쇄에서도 세계 최고의 자료를 갖고 있다. 목판인쇄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책판을 만드는 데 적합한 재질의 나무를 선택하여 베어내서 바닷물에 넣어 진을 빼고 판각하기 쉽게 결을 삭히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지역에 따라 바닷물 대신 민물을 이용하기도 한다. 바닷물에서 건져낸 목재는 적당한 크기와 두께로 자른 후 응달에서 건조시켜 나무가 뒤틀리는 것 등을 막는다. 목판을 만들기에 충분해 진 나무는 대패질로 반질하게 만..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7) 불국사(5)

https://youtu.be/tS4j_44SFMw 석가탑은 엉뚱한 일로 한국의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탑으로도 유명하다. 석가탑은 창건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왔으나 1966년 9월 도굴범에 의해 석탑훼손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정부는 도굴꾼이 훼손한 탑을 복원하기 위해 탑신부를 해체했는데 해체수리과정에서 2층 지붕돌 중앙에 있는 방형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비롯한 사리용기(‘불국사 삼층석탑 내 발견유물’이란 명칭으로 국보 제126호로 지정)와 각종 장엄구 등을 발견했다. 이 당시 발견된 유물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 금동제, 은제 사리외합 1점 ② 은제 사리내합 1점 ③ 금동 방형사리합 1점 ④ 동경, 청동비천상 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축 ⑥ 묵서지편(墨..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6) 불국사(4)

https://youtu.be/tS4j_44SFMw 다보탑은 접합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조립식으로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이 돋보인다. 특히 총 3층으로 구성된 석가탑의 1, 2, 3층의 몸돌의 높이는 각각 4:2:2 비율로 돼있다. 엄영일 포항공대 교수는 ‘4:2:2 비율은 사람이 아래에서 볼 때 상승하는 느낌과 안정감을 주는 과학적인 지혜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특히 1920년 다보탑을 실측한 요네다 교수는 이 탑이 정확하게 기하학적으로 8 : 4 : 2 : 1의 비례인 등비급수의 비로 세밀하게 구성되었다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다보탑이야말로..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5) 불국사(3)

https://youtu.be/tS4j_44SFMw ② 자하문과 회랑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 나타나는데 자하문이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몸에서 나온다는 자금색 광채를 말한다. 이 문을 통해서 부처가 있는 대진리의 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축대를 따라 5칸씩 행각이 있고 그 끝에 1칸씩 앞으로 돌출하고 지붕이 솟아오르게 건축되었는데 동편의 것이 경루(經樓)인 좌경루이고 서쪽이 종루(鐘樓)인 범영루이다. 종루의 원명은 수미종각(須彌鐘閣)으로 수미산에 있는 종각이란 뜻이다. 수미산은 석가여래의 이상향인 사바세계의 표상이다. 신라인들은 부처의 나라인 불국(佛國)을 만들기 위해 토함산 기슭에 수미산을 쌓았는데 그것이 불국사의 자연석 축대로 상징되고 그 위의 건축물들은 부처가 상주하..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4) 불국사(2)

https://youtu.be/tS4j_44SFMw 불국사 경내에 들어서면 우선 대석단(大石壇)과 마주치는데 불국사의 건물은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 위의 목조건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가정토 구역은 아미타정토 구역보다 석조 구조가 한 단 높게 조성되어 아미타정토는 1층, 석가정토는 2층으로 보인다. 대석단은 크게 양분되어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석단 위는 부처의 전유 공간으로 불국토이고 석단 아래는 범부의 세계다. 동쪽의 석가모니 세계는 석단에 마련된 청운교와 백운교를 통하지 않고는 오를 수 없으며 서쪽의 극락전 역시 석단에 마련된 연화교와 칠보교를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비로전이나 관음전 일곽 역시 대웅전 및 극락전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다. 이 석조 구조는 길고..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3) 불국사(1)

https://youtu.be/tS4j_44SFMw 석굴암을 뒤로하고 불국사로 향한다. 1995년에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불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다. 불국사(佛國寺)는 이름이 말해 주듯 흔한 이름의 절이 아니다. 최치원은 불국사가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였다고 기록했는데 한때 화엄법류사(華嚴法流類寺)라고도 불렸다. 불국사는 이름 그대로 화엄사상에 입각한 불국세계를 표현한 사찰이다. 불국사는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나 이보다 오래 전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첫째는 눌지마립간(417~457) 시절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둘째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다음해인 법흥왕 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