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혀지는 라스푸틴의 미스터리>
라스푸틴이 생존해 있을 때에도 라스푸틴이 비선으로 러시아 국정에 커다란 농단을 부렸다는 비판은 상당히 과장되었다고 지적된 것은 사실이다. 당대 러시아제국이 여타 유럽 제국에 비해서는 다소 수준이 떨어지지만 문맹이라까지 매도되는 라스푸틴에게 국가가 좌지우지되었다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와 독일계 황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매도당했다는 주장이 보다 큰 설득력을 얻는다.
이 문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다룬 사람이 미스터리 학자로 유명한 콜린 윌슨 박사다. 그는 라스푸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현대사의 어떤 인물도 그리고리 라스푸틴만큼 선정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자료로 가득 차 있지 않다. 그에 대한 책이 백 권도 더 있지만, 어떤 한 책도 그라는 인간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다. 대부분이 날조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다.’
더글라스 스미스 박사는 보다 직접적으로 라스푸틴의 죽음에 대해 대중이 친숙하게 여기는 많은 부분들이 라스푸틴의 암살 주도자들이 남긴 진술들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물론 내용 자체가 믿을만하지 못하다고 적었다.
우선 유수포프가 1927년과 1953년에 회고록을 내는데 첫 번째 회고록에서는 라스푸틴이 총 두 방을 맞고 쓰러졌다가 입에 거품을 물며 일어서서 자신을 공격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두번째 회고록에서는 총 한방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났다고 내용을 바꾼다. 유수포프는 라스푸틴이 일어난 것을 ‘악마의 환생’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이 정도 되면 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머리가 아파지는데 라스푸틴을 부검한 코소로토브 박사의 검시 기록에 의하면 라스푸틴의 시체 상태가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다. 우선 그는 라스푸틴의 몸에서 익사나 독살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적었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코소로토브는 라스푸틴의 상처를 볼 때 총을 맞고 10분에서 20분 내에 사망했을 것으로 말했다. 적어도 뇌에 총알을 맞고 즉사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아님은 물론이다.
<세계를 놀라게 한 라스푸틴 파일>
2000년 라스푸틴에 대한 그야말로 놀라운 책이 발간된다.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에 의할 경우 세계 제1차, 2차 세계대전의 단초를 마련했고 특히 지구를 반분하는 공산주의가 태어나게 만드는데 큰 공헌하는 악당 중 악당이다.
그런데 2000년 러시아의 유명 극작가이자 역사학자로 『스탈린 전기』, 『마지막 차르』를 저술한 에드워드 라드진스키(Edward Radzinski)가 『라스푸틴 파일』을 출간했는데 책의 내용은 그야말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악마’의 수도승 라스푸틴은 한마디로 정치 음모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러시아 황실 가문 내부의 권력 다툼과 러시아 황제에 반대하는 혁명 세력들이 유언비어를 유포해 라스푸틴을 괴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이와 같은 폭탄 선언은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구소련이 붕괴된 1995년, 세계적 첼로연주자이자 지휘자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w Rostropowitsch, 1927〜2007)가 소더비 경매사와 협상을 벌여 구소련에서 극비로 다룬 보고서를 엄청난 가격에 구입했다. 이 보고서는 그동안 소련의 KGB가 보관해 왔으나 소련연방 해체 후 사라졌던 약 420쪽의 문서였다.
이 문서를 고가로 구입한 로스트로포비치는 다소 이례적인 인물이다.
그는 구소련의 공산체계를 매우 싫어한 사람으로 러시아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저항을 줄기차게 추진하여 소비에트 체제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48년 그의 스승이자 음악적 동료로 유명한 쇼스타코비치는 교수직을 박탈당했으며, 로스트로포비치 또한 학교에서 쫓겨났다.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여받은 소련의 반체제 문학가 솔제니친이 갈 곳이 없는 처지에 몰리자 자기 집으로 초대해 거처를 제공하고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1971년 소련당국으로부터 출국금지 조치를 당했을 정도의 강골이다.
외국 공연이 제한되었고, 소련 주요 도시에서도 그의 연주 기회가 줄어들었는데 1974년 미국에서의 연주를 기회로 미국으로 망명했고 1978년에는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1977년부터 1994년까지 로스트로포비치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미 국립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를 맡았다. 특히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됨으로써 동베를린 주민들도 서베를린을 방문해 동서 베를린 주민들이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계적 변혁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그는 베를린 장벽 철폐 이틀 후인 11월11일 베를린 분단의 상징 중 하나인 국경 통과 검문소 ‘체크 포인트 찰리’ 연주회를 열어 세계적으로 큰 이목을 끌었다.
1990년 소련 시민권을 회복했지만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때는 옐친 대통령을 옹호했고, 가장 단속이 심했던 시기였음에도 붉은 광장에서 국립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데 1980년 4월 23〜24일 국립 교향악단과 함께 내한해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였다. 이후 같은 해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다시 내한해서 연주회를 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럽게 취소했는데 이유는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발표되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건강은 2006년 악화되어 2007년 팔순 기념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렘린 궁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4월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로스트로비치에 관한 또 다른 일화는 그가 평생 동안 아끼고 그의 분신과도 다름없었던 첼로 악기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악기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1711년 제작한 듀포르(duport)인데 듀포르는 1800년대 첼리스트로 나폴레옹 앞에서 직접 연주한 전설의 첼로다. 1711년 당대 부호의 위촉으로 제작되었는데 그는 스트라디바리에게 평소 첼로값의 두배를 줄테니 걸작을 만들어달라 요청했다는 전설이 있다. 스트라디바리가 최고의 재료들을 사용해서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는데 로스트로포비치 사후 일본 음악재단(Nippon music foundation)에서 2,000만 달러에 매입했다고 알려진다.
<특별조사위원회의 라스푸틴 조사>
로스트로포비치가 입수한 자료는 그야말로 놀라운 내용을 갖고 있었다.
1917년 2월 혁명 후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자 임시정부는 황실과 고위 정치가들의 위법 사항을 조사하는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었다. 모두 13개의 조사부로 나뉘어져 각종 자료를 수집했는데 그중 13조사부는 당시 악명이 높았던 라스푸틴의 비리를 규명할 목적으로 설치된 라스푸틴 전담부서였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입수한 서류는 바로 이 당시 확보된 라스푸틴에 대한 조사 자료 진본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자료를 그의 친구로 역사가, 유명한 극작가, 러시아 텔레비전 문화 프로그램의 스타 호스트인 에드워드 라드진스키(Edward Radzinski)에게 전달하면서 모든 내용을 정밀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라드진스키가 2000년에 출간한 『라스푸틴 파일』은 바로 이들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 라스푸틴에 대한 모든 소문은 니콜라이 2세와 황후 반대세력과 그 후의 임시정부 및 소비에트 정부의 선전에 의해 조작된 라스푸틴 상이었다. 라스푸틴의 실체는 2000년에 이 라스푸틴 파일이 발간되면서 점차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비에트 당국이 철저하게 조사한 『라스푸틴 파일』의 내용은 그야말로 놀랍다.
『라스푸틴 파일』에는 당시 <특별조사위원회>가 철저하게 진행했던 비밀경찰 보고서, 기밀 사법 조사, 사적인 서신, 봉인된 자백 및 증언, 황제와 황실의 진면목 그리고 라스푸틴에 반대하여 살해 음모를 꾸민 장본인들에 대한 조사 기록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소위 특별 파일에 의하면 라스푸틴은 성적 도취에 빠져 있지도 않았고, 니콜라이 2세 황후의 숨겨둔 애인이라는 소문도 모두 거짓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치적으로 니콜라이 2세에게 러시아가 결코 제1차 세계대전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고 충언했다는 점이다. 라스푸틴에 의해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이 결정되어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사망했고 이것이 제정러시아를 멸망시킨 단초가 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적어도 라스푸틴이 주장한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사악한, 변태적인 수도승이자 가짜 예언자 라스푸틴은 정치 음모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라스푸틴이 유수포프 공작에 의해 암살돼 네바 강에 던져졌던 날짜는 1916년 12월 17일로 로마노프 왕조를 붕괴시킨 2월 라스푸틴이 암살된 후 불과 69일 후인 1917년 2월 23일이다.
참고적으로 자료에 따라 같은 사건의 날짜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라스푸틴이 유수포프 왕자에 의해 살해되어 네바 강에 던져졌던 날짜는 대체로 12월 17일로 나오는데 일부 자료에서는 년 말인 12월 30일로 나오기도 한다. 이는 당시의 러시아력인 율리우스 력을 근거로 할 때는 12월 17일이지만 그레고리안 력으로는 12월 30일이기 때문이다.
‘2월 혁명’ 후 소비에트와 두마(국회)를 권력 기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는 로마노프 왕조 타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곧바로 라스푸틴에 관한 모든 문제를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라스푸틴의 베일에 싸인 비밀의 진상은 알려진 내용과 너무나 달랐다. 한마디로 소비에트 당국으로 볼 때 라스푸틴의 타도가 공산혁명의 큰 줄기 중 하나이지만 철저하게 조사한 자료를 볼 때 이를 곧이곧대로 발표할 수는 없었다. 라스푸틴에 대한 이야기 상당 부분이 황당하게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후 일어난 10월 혁명 후의 볼셰비키 정권은 레닌이 이끌었던 공산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면으로든 라스푸틴을 이용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마디로 라스푸틴에 대한 진상을 발표하는 대신 라스푸틴에 대한 루머가 유포되는 것을 방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3조사부>가 조사한 내용은 1964년까지 공개되지 않고 요약보고서로 간략하게 발표되었는데 놀랍게도 이들 비밀 자료 자체가 사라져 진상을 알 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다. 바로 그 <13조사부>의 파일 원본을 1995년 런던 소더비사로부터 로스트로포비치가 구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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