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 노벨상이 만든 세상/인터넷 광섬유 : 가오 박사

노벨상 수상 인터넷 광섬유 : 가오 박사(2)

Que sais 2020. 10. 2. 17:32

youtu.be/P4t_rkAzDBE

<대서양을 잇는 해저 케이블>

현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현재 전 세계 국제전화인터넷해외 연결망 트래픽90% 이상을 해저 광케이블이 책임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주에 수많은 인공위성이 떠 있으므로 대부분 이를 통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인공위성 트래픽1%도 채 되지 않은 것은 속도가 느려 핑(지연시간)이 중요한 게임 같은 건 꿈도 못 꾸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지국이 없는 곳을 통과하는 선박이나 항공기, 극지방 등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들 자체의 효용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해저케이블인공위성을 능가할 것임은 물론이다.

여하튼 2018 기준 전 세계의 해저 케이블 트래픽 총 용량은 1,500Tbps, 2015 기준 아시아태평양의 용량430Tbps이다.

전 세계 해저 케이블 지도

놀라운 것은 이 국제망을 통해 초당 테라바이트 이상데이터가 오가는데 사용된 광섬유의 가닥 수는 겨우 1020가닥 내외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케이블 굵기의 대부분이 케이블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한 피복으로 사용됐고 실제 데이터 전송에 사용하는 케이블은 모두 합해 연필심 굵기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현재 인간들이 활용하는 해저 케이블은 인류가 지구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유명한 슈퍼맨 중 한 명인 슈퍼맨의 작품이다.

인류의 역사에는 때때로 믿을 수 없는 슈퍼맨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이다. 다 빈치는 어려서부터 여러 방면에서 천재성을 보였다.

다 빈치의 부친은 같은 마을에 사는 농부로부터 나무 방패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림에 재주가 있는 아들에게 그려보도록 했다. 다 빈치는 곧바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도마뱀, 구더기, , 개구리, , 박쥐 등을 모아 놓고 이들을 자세히 관찰한 다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메두사(수많은 뱀의 머리가 있으며 보기만 하면 죽는다는 전설이 있음)의 목을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메두사 모작

다 빈치의 그림을 본 부친은 아들의 재능에 감탄한 후 농부에게는 다른 방패를 내주고 다 빈치가 그림을 그려넣은 방패피렌체 상인에게 100두카트에 팔았다. 상인은 이 방패밀라노 공작에게 300두카트를 받고 팔았다. 후에 다 빈치상상의 동물을 진짜처럼 그리는 방법이라는 안내서를 쓰기도 했다.

윌리엄 톰슨 (William Thompson,1824~1907)

본명이 윌리엄 톰슨(William Thompson)켈빈 경다 빈치에 못지 않은 만능 천재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절대온도(-273) 체계를 밝혀낸 물리학자교사, 공학자, 발명가이기도 했으며 영국 최고의 명예작위(Sir)를 비롯해 수많은 영예를 안았다. 죽어서는 영국의 유명한 위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뉴턴과 다윈 옆에 안장되었다.

그는 80여년의 생애 동안 661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69개의 특허를 취득했는데 놀라운 것은 대부분 실용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런 켈빈 경을 보다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만능 천재로 평생 글래스고 대학에서 봉직한 교수인데도 불구하고 사업가로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톰슨과 같은 경력의 소유자는 이재(理財)에 어둡게 마련인데, 그는 자신의 특허실용화해 당대 영국 최고의 부자 대열에 합류했다. 그가 평생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당대 최고의 재벌 중 한 명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손을 대는 분야마다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북아일랜드벨파스트(Belfast)에서 태어난 톰슨은 뛰어난 수학자이자 여러 권의 교과서를 저술한 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톰슨아버지의 지적 재능을 이어받아 곧바로 수학의 천재가 되었는데 그 능력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10 되던 해 유명한 글래스고(Glasgow) 대학으로부터 입학을 허락받았다.

6년 후 그는 최연소 나이에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했다. 글래스고 대학 졸업 후 케임브리지 대학을 거쳐 프랑스 대학원에서 연구했고 184622 젊은 나이에 자연철학교수(수학교수)로 임명된 이래 평생을 글래스고 대학에서 재직했다.

당시의 대학에는 오늘날 같은 실험실을 두지 않았는데, 톰슨은 대학 내에 실험실을 만들어 직접 실험하는 혁신을 일으켰다. 그는 과학적 이론측정 가능하고 실제로 구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가? 그것의 모형을 만들 수 있는가? 이것들을 할 수 없다면 당신의 이론은 지식보다는 상상에 기초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톰슨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준 것은 그의 수많은 발명품 외에도 결정적으로 미국과 영국대륙 간 해저 케이블공사 때문이었다. 섬나라인 영국유럽 대륙과의 전신(電信)에 있어서 바다라는 핸디캡이 가로막고 있었다. 전신기에서 발생하는 전류전도체에 흡수되는데 완벽한 절연 물질이 없었기 때문에 바다를 사이에 둔 나라들 간의 정보 전달에는 한계가 있었다.

1843년 영국의 M. 패러데이말레이시아의 나무유액에서 발견되는 구타페르카(gutta-percha:GP) 속에서도 우수한 절연성과 가공성으로 갖고 있으므로 이를 절연체로 사용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영국의 J.브레트 형제 패러데이의 연구를 기반으로 1850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 도버-칼레 해협구타페르카로 코팅된 구리선 케이블을 부설하여 해저 전신케이블의 시대를 열었다. 곧바로 영국과 아일랜드, 덴마크와 스웨덴을 비롯해 코르시카 섬까지 유럽 전역과 전신망으로 연결되었다.

프레데릭 뉴턴 기즈번(Frederic N. Gisborne,1824~1892)

이런 성공에 기반하여 1854 영국의 기술자 기즈번(Frederic N. Gisborne)영국 식민지였던 북미 뉴펀들랜드 섬에서 미국 뉴욕까지 케이블을 설치하여 전신망을 연결하면 큰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때까지는 대륙과의 연락을 하려면 바다를 천천히 항해하여 건너오는 배에 전적으로 의존했었다. 그러나 기즈번에게는 자금이 없었고 원대한 계획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극적으로 만난 사람이 미국의 젊은 사업가 필드(Cyrus W. Field)였다. 성공한 젊은 재산가로 잠시 휴식에 들어가 있던 필드기즈번의 사업 설명을 듣고 규모를 더 키워 대서양을 횡단하는 해저 케이블을 구상했다.

필드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어서 우선 무선전신의 창시자 새뮤엘 모스와 유명한 해양 전문가 모리 박사에게 편지를 썼다. 미국과 영국 간의 대서양 해저 케이블 공사의 기술적 가능성을 묻는 내용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필드의 질문에 열렬한 반응을 보내왔다. 모스는 그에게 대서양을 잇는 케이블 설치가 성공할 경우 그것은 세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모리 박사는 특히 최근에 북대서양을 탐사한 결과 다행스럽게도 뉴펀들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마치 해저전신 케이블의 부설을 위해 마련된 것처럼보이는 해저고원이 있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놀랍게도 필드대륙 간 해저케이블을 건설한다는 아이디어 하나로 영국에서 거금의 건설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가 단지 리버풀, 맨체스터, 런던 등에 사는 부유한 상인들에게 전신망 건설 및 관리회사(Telegraph Construction and Maintenance Company)를 세울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호소했을 뿐인데 곧바로 자본금 53,000 파운드가 모아졌다. 유명 작가인 새커리(Thackeray)와 레이디 바이런(Lady Byron)도 서명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자금은 확보했지만 막상 케이블을 설치하려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첫째해저케이블 작업을 주관할 선박이고 둘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용에 지장이 없는 해저케이블의 공급이다. 다행히도 영국 정부가 당시 가장 큰 전함의 하나인 아가멤논 호를 빌려주었고 미국 정부5,000톤급 나이아가라 호를 내주었다.

이제 남은 문제케이블이었다. 두 대륙을 잇는 어마어마한 줄을 만들기 위해서는 강철 쇠줄처럼 케이블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고, 설치하기가 쉽도록 유연성이 있어야 했다. 또한 모든 압력을 견디면서도 비단실처럼 매끈하게 쭉쭉 뻗어야 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미세한 전파라도 3,000 킬로미터 이상 전달되도록 정밀해야 했다. 케이블의 어느 한 군데라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작은 틈만 생겨도 전파 전달에 차질이 생긴다.

이 작업은 367천 마일짜리 전선을 단 한 줄의 케이블로 연결해야 하는 엄청난 규모의 일로, 그 길이는 지구와 달을 연결할 만한 길이였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인류가 바벨탑을 건설한 이후 이보다 더 장대한 일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18578, 335마일쯤 전선이 설치되었을 때 갑자기 케이블끊어졌다.

18586에 시작된 두 번째 케이블 설치실패로 돌아갔다. 사고의 책임필드에게 있었다. 경비 절감을 위해 그가 선택한 가늘고 약한 절연 케이블강력한 전류에 쉽게 녹는 것은 물론 절연재가 산화되어 부식되는 단점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윌리엄 톰슨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해저케이블 공사1861 발발한 남북전쟁으로 1865까지 중단되어 새로운 케이블을 개발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케이블의 심(Core)4겹의 페르시아 고무로 둘러싼 구리선(銅線) 7가닥을 합쳐 타르를 칠한 대마(大麻)로 싸고 다시 10개의 강선나선 모양으로 감았다. 이 강선 하나하나에도 산화방지제를 바른 대마가 감겨 있었다.

새로운 케이블이 개발되었다 해도 바다 속에서는 언제든 끊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톰슨은 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했다.

그는 조그만 자석과 거울철사 코일 속에 장치하여 가느다란 명주실로 만든 검류계(檢流計)를 개발했다. 케이블을 풀어내는 장치에 연결된 검류계는 매우 민감해서 조류의 가장 미묘한 변화에도 자석을 진동시키고, 그러면 자석에 달려 있는 거울이 눈금판빛을 반사한다. 거의 감지할 수 없을 만큼의 미미한 진동에도 눈금판 위로뚜렷하게 반사되어 케이블 손상을 즉시 알려주어 해당 부분의 케이블을 끌어올려 수리할 수 있었다.

두꺼운 절연체를 전선에 사용하는 것과 검류계를 설치하는 것 모두 톰슨의 특허였다. 톰슨대서양 횡단 해저케이블 설치 작업의 과학 분야를 총지휘하는 책임자로서 1866년 역사적인 대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케이블의 직경2.54센티미터, 총 길이는 3,680킬로미터에 달했다.

톰슨해저케이블 설치를 위해 해저 전신 수화기 등도 개발했는데, 거울 검류계와 볼록거울 뒤에 작은 자석이 부착되어 있고 가느다란 줄이 코일의 안쪽에 걸려 있는 방식이었다. 거울에 비추어진 눈금판에 있는 작은 점으로 된 빛을 반사하며 전류자석을 빗길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이렇게 해서 모스 기호전신 내용이 기록된다. 이것이 후에 사이폰(siphon) 기록기로 대체되는데 이 기록기는 전선직접 메시지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