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정말로 컸나요? (I)

Que sais 2020. 8. 29.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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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을 대표하는 미인은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당나라 시절의 양귀비를 꼽는데 서양에서는 단연 클레오파트라 여왕(기원전 69~기원전 30)으로 알려진 클레오파트라 7를 첫손가락에 꼽는다.

동양과 서양 사람의 얼굴이 다소 다르다고 하지만 그동안 전해져 오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면 정말 미인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신병원에 있는 상당수 서양인 여성의 경우 자신이 과거에 클레오파트라였다고 말하고 남성은 나폴레옹이었다고 말한다고 한다. 정신병자까지 클레오파트라를 거론하는 것은 클레오파트라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갖고 있다는 뜻과 다름없다.

실제로 우리들은 현재 수없이 많은 곳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볼 수 있다. 보드게임, 슬롯머신, 밸리댄서, 향수는 물론 담배, 심지어는 지중해 오염 프로젝트에도 그녀의 이름이 붙어 있고 태양 중심의 궤도를 도는 소행성 ‘216클레오파트라도 있다. 더불어 1540년부터 1900년대 초까지 그녀를 주제로 한 발레 5, 오페라 45, 연극이 77이나 만들어졌다고 알려진다.

이를 보면 클레오파트라야말로 세계 최초의 유명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녀처럼 다재다능한 캐릭터가 없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클레오파트라를 거론할 때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막강한 이집트의 파라오로 당시 세게 제국을 좌지우지하던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마음껏 휘둘렀는데 더욱 일반사람들의 배를 아프게 만드는 것은 당대 세계에서 최고의 부자였다는 점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주눅들게하는 것은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지 200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수많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영화들에 등장한 배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다빈치가 그린 클레오파트라를 보아도 미인 중 미인인데 사실 과거에 최고의 미인을 그릴 때 클레오파트라는 기본이었다.

영화가 탄생한 후 클레오파트라는 사상 최고의 아이콘 즉 미인으로 나오는데 좀 오래된 영화이지만 클로데트 콜베르, 비비안리, 소피아 로렌, 엘리자베스테일러는 물론 안젤리나 졸리, 모니카베루치 등 최고의 미인들이 클레오파트라로 등장한다. 한마디로 클레오파트라로 출연할 정도가 되어야 세계적 미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인데 유색인종이 없다고 지적하겠지만, 지나 토르는 흑인이다.

클레오파트라를 보다 기세등등하게 만드는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인치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세계사가 바뀔 수 있다고 하는데 현대 과학은 이에 반론을 제기한다.

엄밀하게 말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보통 사람보다 한 치 즉 2.5센티미터 정도 더 크다면 미인이라기보다는 매우 못생긴 또는 괴물이라고 보는 것이 정상이다. 얼굴 한 가운데 주먹만한 코가 불뚝 튀어나왔다는 뜻 아닌가?

이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진짜로 컸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콧대 즉 자신감이 남다르게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동안 콧대가 높은 여자가 한 두 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세계사를 통해 주목받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클레오파트라를 따라다니는 미스터리만 아니라 현대의 덕목인 과학적 분석도 함께 설명하여 가능한 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설명한다.

이집트는 기원 전 332알렉산더 대왕이 갑자기 죽은 다음 알렉산더가 정복한 거대한 영토를 네 명의 장군이 분할 통치하는데 이 중 알짜배기인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물려받는다. 그가 이집트를 이어받은 것은 알렉산더의 시신을 확보하고 알렉산더가 세운 신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매장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4명의 장군 중 적자로 인정받았다는 뜻으로 그의 무덤을 그림처럼 소마라고 하는데 현재 고고학자들이 가장 발굴하고 싶어하는 무덤이다. 소위 보물이 많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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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기원전 30)가 다스렸는데 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인 정복자들이다. 그러므로 프톨레마이오스 후손들은 이집트의 파라오임에도 그리스말밖에 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이집트인들에게 호감가는 상황은 아니다. 한마디로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들은 이집트의 지배자로 군림하는데만 신경을 썼지 이집트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누구보다도 큰 유명세를 갖고 있는 것은 이집트 파라오로 남자가 아닌 여자 파라오라는 점이다. 이집트에는 약 3천 년 동안 200여명 이상의 파라오가 있었는데 그중 딱 세 명이 여성으로 파라오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보다 약 300여 년 전의 하셉수트 여왕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이름의 네페르티티 여왕이다.

이집트의 3000여 년 역사 중 오로지 3명만 여성 파라오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클레오파트라의 콧대가 세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클레오파트라이름의 뜻그리스 왕의 왕비를 의미하므로 클레오파트라는 보통 명사라고도 볼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왕비는 물론 어머니도 클레오파트라였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라7를 의미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역대 파라오들과는 달리 이집트어는 물론 그리스어를 비롯한 7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고 한다. 현재도 외국어 세네개를 술술 말할 정도라면 천재라고도 말하는데 이집트의 파라오가 7개 언어를 말할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파라오라면 자신이 직접 외국어를 배울 필요없이 통역하는 사람을 시키면 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특별히 외국어를 익히는데 자신이 있었다는 뜻으로 이집트인들이 클레오파트라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는 지난 2,000년 간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작품에서 대단히 선정적이고 요염하지만 남자를 파멸로 몰아가는 요부(妖婦)처럼 묘사되어 왔다. 이런 비난은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인이 아닌 이집트인임에도 로마제국의 최고 실권자인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유혹하여 로마를 곤혹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클레오파트라가 부인이 있는 시저의 아이를 낳은 것은 물론 당대의 패자인 안토니우스를 거의 강제로 이혼시켜 자신과 재혼케 한 후 몰락의 나락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부풀려 질대로 부풀려져 현재까지 세계적인 악녀라는 타이틀을 당당하게 받고 있는 요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확실하게 지적할 것은 클레오파트라가 시저와 안토니우스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시저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에게 접근했다는 점이다.

우선 클레오파트라는 권력의 정상 즉 파라오의 딸로 출발했으므로 파라오가 되기 위해 정적을 살해하는 등 권모술수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성한 프톨레마이오스 왕권을 굳건히 계승해 온 왕족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녀가 파라오가 된 것도 말끔하다. 그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가 기원전 51년 죽으면서 열여덟 살 된 클레오파트라와 열 살 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가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하라고 유언했다. 당대 이집트 등 많은 나라에서 공동 왕 즉 두 명이 통치했는데 이는 한 사람이 갑자기 죽어도 왕위 즉 통치에 공백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가 바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집트 역사에서 딱 2명의 여성만 파라오가 되었는데 그걸 모르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이집트를 통치하라고 맡겼겠는가이다. 아버지는 클레오파트라의 재주가 탁월하여 이집트를 맡겨도 문제없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는 주장이다.

클레오파트라를 설명하면서 빼놓지 않아야 할 것은 그녀가 통치하는 이집트가 당대 세계 최고의 부자 국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로마의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유혹한 것이 아니라 두 명이 이집트의 엄청난 재산에 눈독을 들여 그녀에게 접근한 것이 옳은 시각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당대의 실력자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만나는 장면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벤트 중 하나인데 먼저 클레오파트라와 시저 이야기를 먼저 설명한다.

처음 아버지로부터 동생과 함께 이집트를 물려받았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매우 잘 나갔다. 기록을 보면 클레오파트라가 동생을 제치고 실권을 갖고 이집트의 공식행사에 참석했다. 그런데 동생의 부하들이 그녀에게 반기를 들어 시리아로 피신까지 가야할 정도로 상황이 역전된다.

그런데 당대의 세계 정황이 매우 복잡하여,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로 돌아와 있었을떄 로마의 실력자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 상륙했다가 클레오파트라의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의해 살해당한다. 원래 이집트를 폼페이우스가 관장하고 있으므로 이집트의 지원을 받고자 이집트에 도착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의 힘이 떨어졌음을 알고 살해한 것이다.

그런데 폼페이우스가 살해된 지 3일 후 시저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시저는 이집트에 도착하자마자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두 가지 요청을 했다.

첫째는 폼페이우스를 살해한 장본인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이며 두 번째는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가 이집트를 보호해달라고 요청할 때 약속한 엄청난 군자금을 달라는 것이다.

실권을 갖고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시저와 보상 액수를 갖고 질질 끌고 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이런 상황이 자신의 위치를 역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에게 걸림돌이 있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왕궁에는 시저, 클레오파트라, 그녀의 동생 모두 있었지만 클레오파트라가 동생 몰래 시저를 어떻게 만나 설득하느냐이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그야말로 절묘한 아이디어를 도출한다.

그녀는 자신의 선물이라며 양탄자를 시저에게 직접 배달하게 했다. 양탄자를 시저에게 선물한다고 하자 동생의 부하가 의심하지 않고 양탄자 배달을 허용했다. 그런데 시저가 양탄자를 풀러보자 놀랍게도 클레오파트라가 나체로 양탄자 속에 들어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기지에 시저가 감탄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 시저는 52, 클레오파트라는 21이었다. 이 내용은 사실로 여겨지며 클레오파트라의 기지 등을 포함하여 그녀에 대한 수많은 전설이 나오게 된 진상이다. 물론 이 당시를 그린 그림을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나체가 아니라 정장 차림이다. 과거에 그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바란다.

시저와 만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복권시켜주면 동생과 달리 시저에게 통 크게 군자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한다. 이후 시저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간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시저에 대패하고 전투 중에 전사하자 시저는 클레오파트라를 복권시킨다.

클레오파트라가 정말로 제때에 줄을 잘 선 것이라 볼 수 있다. 클레오파트라가 다시 실권을 가진 파라오가 되자 그녀는 그녀의 또 다른 동생을 프톨레마이오스 14로 추대하여 공동 파라오가 된다.

클레오파트라시저와 알렉산드리아 왕궁에서 함께 살았는데 시저와 함께 사는 것은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에 대적할 힘이 없었는데 로마는 이집트의 재보에 눈독을 드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로마가 이집트를 합병할 우려가 있었는데 시저를 우군으로 둔다는 것은 이집트의 독립을 보장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의도대로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는 시저를 통해 독립을 유지했고 더욱 금상첨화는 시저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시저가 이집트를 떠난 사이에 클레오파트라가 아들을 낳았다는 점이다. 아들의 이름이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Ptolemaios Kaisar)로 아들의 이름에 시저의 이름을 붙였다.

시저는 아이가 없던 차에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고 하자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불렀고 시저는 파르네세 빌라를 주었다. 시저에게는 카르푸르니아라는 네 번째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남편의 아이를 데리고 온 클레오파트라를 카이사르 가문의 주부로서 환영했다고 한다.

처음에 클레오파트라는 상당한 환대를 받았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로마 제1대 원로인 키케로도 클레오파트라에게 머리 숙여 절을 했다고 한다. 이에 용기를 얻은 시저는 카르푸르니아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클레오파트라를 조각한 화려한 금입상을 베누스(비너스) 게네트릭스 신전에 세우게 할 정도였다.

그런데 모든 로마인들이 클레오파트라를 좋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시각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일부 로마인들은 클레오파트라가 유부남인 시저에게 딱 달라붙은 외국인 요부에 지나지 않다고 평가 절하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일부 로마인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에 개의하지 않고 케사리온을 데리고 대중 앞에 등장하여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때 로마인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은 것은 로마 시민들에게 근검절약령이 내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빌라에서 2년 동안 쉴 새 없이 연회를 베풀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비난은 사실 클레오파트라에게 적절치 않다고 볼 수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당대 세계 최고의 부자로 시저가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은 그녀의 재산도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것이야말로 이집트를 살리는 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저로서도 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는데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돈을 한 푼도 축내지 않고 로마인들을 상대로 연회를 자주 열어주는 것시저의 이미지를 높여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문제는 로마의 국내 상황이다. 시저의 권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반대파들은 그의 여러 가지 행동을 미루어 볼 때 그가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으므로 이를 적극 제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공화정 옹호파로 시저가 가장 신뢰하는 부르투스가 기원 전 44년 시저를 암살한다.

이때 시저는 자신을 살해하는 범인이 부르투스인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알려진다.

부르투스. 너도?”

시저가 졸지에 암살당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자 그녀는 곧바로 로마로부터 도망쳐 이집트로 돌아갔다. 클레오파트라가 시저의 죽음에 미련을 갖지 않고 곧바로 이집트로 탈출한 것은 시저의 유언장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시저의 유언장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막강한 로마인 시저이지만 그가 낳은 아들은 오로지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카에사리온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클레오파트라는 최소한의 그 무엇을 카에사리온에게 남겨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시저의 유언장에는 카에사리온에 대해 한 마디도 없이 18세의 조카인 옥타비아누스(기원전 63~14, 재위기간 기원전 27~기원전14)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이것은 클레오파트라에 큰 충격을 주어 로마인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아무리 재산이 많아 펑펑 지원하더라도 로마인이거나 로마인과 정식 결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당시 로마법에는 외국인을 후계자로 삼을 수 없었다.

시저의 친아들을 제치고 시저의 조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것은 클레오파트라가 후계자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고대 세계에서 이런 경우 목숨이 위험하게 되는 것이 다반사라는 점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총알같이 아들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간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녀가 이집트로 돌아가자 마침 그와 이집트 공동 파라오였던 그녀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죽었고, 그녀는 아들 카이사르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왕위에 앉히면서 이집트 문제에만 전념한다. 그러나 세계 정세는 클레오파트라로 하여금 이집트 일에만 쏟게 만들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