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봉돈(봉화대)
봉돈은 횃불을 올리는 봉화대로서 성곽 높이보다 높게 쌓았고, 성곽 밖으로 5.5미터나 돌출되어 있다. 봉돈에는 5개의 불구멍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매일 저녁 동쪽의 석성산의 육봉(陸烽)과 연락했고 바다로는 홍천대의 해봉(海烽)과 사이에 간봉을 두고 연락했다. 나머지 불구멍은 비상 때에만 쓰였다.
그런데 화성의 봉돈은 봉화 시설의 기능만 가진 것은 아니다. 봉돈을 성벽에 붙여서 돌출되게 축조하였고 내부는 비워두고 3층으로 나누어 각 층에 대포와 총을 장착하고 발사할 수 있도록 했다. 대포 구멍과 총구멍이 각각 무려 18개나 되는 것을 볼 때 공격적인 방어 진지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봉돈은 외벽과 내부 계단까지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는데 특징이 있다. 남쪽으로 돌출된 부분 끝에 다섯 개의 굴뚝을 두었는데 특히 굴뚝 자체를 벽돌로 쌓은 것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다. 봉돈은 화성의 장인들이 벽돌로 어떤 시설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⑦ 수문
성곽 내에 있는 광교대천이 매년마다 범람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축성의 첫 단계부터 수문 설계에 심혈을 기울였다. 수문에는 북한산성 수문처럼 석축 아치를 성문 형식으로 하나만 내어 높이 올리고 그 위에 누각을 건축하는 방식이 있는데 화성의 북수문(화홍문)은 석축 아치를 여러 개 연속적으로 이어서 설치하고 그 위에 누각을 건축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북수문은 7개의 아치가 있으며 그 높이는 7~8척 이상이 되며 20여 개의 대포 및 소포를 배치했다.
⑦ 각루
화성에는 4개의 각루(일명 누정)가 있는데 각루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우선 성곽 건축 구성상의 효과인 유람과 휴식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 유사시 방어 중심의 망루 역할을 하는 것이다. 동서 3칸(중앙에 온돌)을 중심으로 북쪽에 한 칸, 남쪽에 반 칸을 추가했으며 서쪽으로는 한 칸, 남쪽으로는 두 칸을 추가하는 등 평면을 자유롭게 구성했다. 루는 격자살창을 두었고 온돌방의 네 벽면에도 역시 격자살창을 설치하였으며 마루방은 온돌과 같은 높이로 판자를 깔았다. 전시에는 적군 감시와 지휘소 기능을 하면서도 평시에는 휴식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게 설계된 방화수류정은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갖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화성의 건설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화성 건설은 채제공․조심태 등 남인의 관료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유형원․정약용 등의 ‘실용지학’과 청나라에서 배워온 ‘북학의 기술’까지도 총동원된 사업이었다.
특히 화성 건설은 ‘정권의 명운을 건’ 대사업이었다. 화성은 국왕 지지세력을 총결집하는 거점이었고, 그 동안 구상해왔던 개혁 작업을 본격화할 수 있는 일대 기회였다. 그리고 그 작업의 목표는 한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의 정치․경제․군사적 카르텔의 해체에 있었다.
정조가 혁파하려고 한 한양을 근거지로 형성된 카르텔은 배타성과 고도의 내적 연관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우선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기본 조건인 과거시험의 1차 관문인 초시(初試)에서 성균관의 유생들은 특혜를 받았다.
각 도의 유생들이 인구수에 따라 할당된 좁은 1차 시험의 관문인 향시(鄕試)을 통과해야했지만 도성의 유생들은 한성부에서 실시하는 한성시(漢城試) 외에도 관시(館試)라는 특별 쿼터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길게는 10여년을 준비해야 하는 과거시험을 아무나 치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안이나 가문에서 줄기차게 경제적으로 뒷받침하지 않으면 최대 1,000 대 일 이상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급제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정조와 남인에 의해 ‘천도’가 강행될 경우, 기득권 세력의 복합적 카르텔은 일거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정조의 숨은 뜻을 잘 알고 있는 노론 벽파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노론의 영수 김종수는 ‘개혁으로 생긴 폐해’를 열거하면서 ‘점진적 개선’을 주장했다.
이들은 장용영 창설 등 군제 개혁에 대해서 경비 문제를 들어 반대했고, 국왕의 서얼 허통 지시를 ‘가정 내부의 일’이라면서 묵살했다. 언관 등 하위관료의 권한 축소에 대해서는 ‘조종의 법에 위배된다’하여 저항했다. 무엇보다도 당시 대다수 신료들은 그 동안 너무 많이 사용되었던 개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개혁한다는 혐의를 뒤집어쓰지 않으려 했다.
화성 건설 중지론은 성역이 한창 진행 중이던 1795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노론의 권유(權裕)는 형벌을 받아 복주(伏誅)되는 것을 무릅쓴다며 화성 건설 과정의 비리를 폭로했다. 그에 따르면 아무도 화성을 경영하는 일에 대해 감히 입을 놀리지 못하고 있지만, 측근 신하들이 화성 축조를 빌미로 뇌물을 챙기고 공사비를 빼돌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1796년 3월에는 사간 오정원(吳鼎源)이 경기․충청지방의 흉년을 이유로 공사의 정지를 요구했고, 7월에 노론의 김종수는 진시황제의 만리장성 축성에 비유하면서 화성 성역을 비판했다.
설상가상으로 축성 공사 도중인 8월에 태풍이 불고, 9월에는 전국에 즉위 이래 최대의 기근이 들면서 축성에 대한 반대 여론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가자, 국왕은 신하들에게 공사의 계속 여부를 물었다.
이 자리에서 채제공을 비롯한 대다수 측근 신료들은 공사 강행을 주장했다.
채제공은 현재의 공장(工匠)과 모집한 일꾼들은 팔도에서 모은 사람들인데, 지금 만약 이들을 돌려보낸다면 몇 년 후에 다시 모으기란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수원유수 조심태는 ‘성 쌓는 공사도 흉년을 구제하는 한 가지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흉년에는 없던 토목공사라도 일으켜 구휼의 효과를 거두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사 강행론과 반대론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정조는 놀랍게도 공사 중지를 선택했다. 정조의 말은 간단했다.
“지금 국가나 개인이나 모두 재력(財力)이 결핍된 시기를 당한 때에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라면 응당 그만 두어야 한다.”
『정조실록』 18년 11월 1일조에 중단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화성의 공사가 중요한 점이 있기는 하나 그것을 정지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중략) 지금 삼남과 경기 지역은 가을이 되었는데도 백성들이 잇따라 굶주림에 쓰러지고 있으며, 서북 지역의 변방 고을들도 양곡을 대기가 어렵다고 보고하고 있다.
(중략) ‘성 쌓는 공사에 드는 비용은 없으면 만들어 내면 되고 황정(荒政)에 필요한 것은 창고를 열어 곡식을 진휼해 주면 되니, 판연히 다른 두 가지 일로 각기 상관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한 나라의 재화는 일정한 수가 있어서 위에 있지 않으면 아래에 있고 밖에 있지 않으면 안에 있는 법이다. 따라서 이는 농민들이 한 해를 꾸려나갈 양식이 아니면 백성들에게 입에 풀칠이라도 하도록 진휼해 주어야 할 밑천이다. 밭을 갈지 않으면 어떻게 수확할 수 있겠으며, 백성들을 진휼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 말하기를 ‘우선 너희들의 농사짓는 것과 진휼하는 일은 놔두고 나의 성 쌓는 일에 종사하라’ 한다면 인화(人和)와 지리(地利)의 면에서 보더라도 그것이 되겠는가.‘
정조는 ‘토목공사와 구휼을 겸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그것은 다만 일개 수령이나 장수로서 한 고을, 한 진을 구제할 수 있는 정사였을 뿐이다. 지금 나는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한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는데, 가까이는 도성과 경기 지역으로부터 멀리는 아득한 바다와 변방 지대의 노약자나 부녀자․절름발이․귀머거리․벙어리 할 것 없이 나의 적자(赤子)가 아닌 이가 없다. 이미 저 목을 빼고 바라는 천만이나 되는 무리들로 농사도 못 짓고 장사도 못하게 하고는 처자식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일개 성 쌓는 노역에서 품팔이하는 대가나 받아먹고 살게 한다면 임금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여기에서 적자란 어린애와 보호․사랑의 대상을 뜻한다. 요컨대 군왕의 정치와 수령의 정치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서 수령의 정치에서 좋은 것일지라도 규모가 다르고 전체적인 재정을 고려해야 되는 군왕의 정치에서는 좋지 못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결단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다.
‘정치의 설 자리’와 관련하여 정조는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라고 말하곤 했다. ‘물은 배를 떠가게 할 수도 있고, 물 속으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말처럼 백성의 지지와 신뢰를 못 받는 군주는 아무리 명분이 바른 일을 하고 지지 세력이 막강하다 할지라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정치의 조건’을 정조가 재빨리 파악했다는 뜻이다.
사실 역대 임금 중에서 정조의 주위만큼 온통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둘러싸인 적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며, 할머니뻘인 정순왕후는 사도세자 사건은 물론이고, 정조 자신의 즉위 방해공작에도 개입된 혐의를 쓰고 있었다.
남인의 일부와 노론과 소론 일부 신하들만이 국왕의 지지 세력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들도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조정의 요직은 노론 벽파, 즉 자신의 생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 불가피했고 정당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채제공은 ‘천지간에 극악무도한 자들의 지친(至親) 즉 부자(父子), 형제와 인척들이 모두 벼슬아치의 대장(臺帳)을 꽉 메우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왕이 정치적으로 의지하고 또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은 그야말로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는’ 백성들이라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정조는 자신을 적극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규합을 원했다. 번번이 국왕의 개혁 조치를 무력화시키고 국가보다 당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벽파들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댐을 만들고자 했다. 규장각을 세우고 초계문신을 양성하며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창설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정조는 노론과 소론을 내부적으로 분열시키는 한편, 국왕 동조세력에게는 파격적인 대우를 베풀었고, 반대세력에게는 ‘움츠리고 두려워 떨게’ 만들곤 했다.
궁극적으로 정조는 ‘피를 흘리지 않고도 이기는 싸움’을 원했다. 그러므로 화성 건설을 잠시 중단하는 것은 화성 건설을 보다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한 휴지기요 전력 비축이었다. 소위 반대 세력들에게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계획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조가 화성공사를 둘러싼 논쟁에서 그가 반대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포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공사는 6개월 후에 재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화성공사는 10년으로 예정한 공기보다 훨씬 단축된 34개월로 마무리된 것은 정조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박현모 박사는 강조했다. 개혁반대세력도 더 이상 정조의 개혁에 꼬투리만 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조는 포용과 위협을 적절히 배합하면서 노론과 소론 안에도 국왕동조세력을 형성하면서 장차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전향하도록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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