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스러운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은 서양에서 일 밀리오네(Il millone)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백만장자가 된 마르코 폴로가 ‘백만장자 마르코(Marco Millioni)’라고 불리면서 그가 살던 저택이 ‘코르트 디 밀리오니(Corte di Millioni)’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당대에 허풍장이로 불린 것은 몽골의 쿠빌라이 황제의 위대함을 입에 달고 다녔고 쿠빌라이의 수입이 연간 100〜150만 금괴에 달한다고 떠들고 다녔으며 각국의 재산을 언급할 때도 늘 ‘백만’ 단위로 설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 백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알려진다. 또한 마르코 폴로에 정통한 영국의 헨리 율(Henry Yule, 1820〜1889년)이나 이탈리아의 오르란디니 등은 마르코 폴로가 대양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백만이라는 말을 많이 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선 마르코 폴로가 사람들에게 동방 즉 중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백만 번(million)이나 했기 때문이라거나 책의 내용이 너무 과장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밀리오네는 백만장자라는 뜻도 있고 허풍장이라는 뜻도 있으므로 이중의 의미로 별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설명한다.
또한 폴로 가문은 예로부터 아에밀리오네(Aemillione, 큰 에밀리오)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이 이름이 와전되어 뒤의 ‘밀리오네’만 남았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동방견문록은 원래 제목은 세계의 지역(La Division du Monde)이며 프랑스어로 발간되었고 이후 라틴어,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어와 베니스어, 스페인어, 보헤미아어, 독일어, 아일랜드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당시에는 모두 사본(寫本)이었는데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여 『성경』을 출간한 지 21년 때 되던 해인 1477년 최초로 독일어 인쇄본이 발간되었고 이후 세계를 석권한 초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콜럼버스가 그의 책을 읽고 인도와 금이 많다는 지팡구를 발견하기 위해 역사적인 탐험에 나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하튼 세계적인 탐험기를 쓴 마르코 폴로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그가 태어난 베네치아를 알아야 한다.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 북쪽 기슭에 있는 118개 섬으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북동부의 상업도시다. 이 도시는 역사상 3대 제국 중에 하나를 건설한 훈족의 아틸라(Attila)가 로마를 공격했을 때 피난한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베네치아의 영광은 1096년부터 1270년까지 진행된 십자군 전쟁에서 두드러진다.
어떤 방법으로든 이익추구에 약삭빨랐던 베네치아는 십자군과 성지 순례자들의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선박으로 수송까지 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라틴제국의 볼드윈1세(Baldwin, 제4차 십자군이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라틴제국을 세웠을 때 황제로 추대됨)는 베네치아의 공헌을 감안해 동부 지중해에 있는 섬들을 양도해 주기까지 할 정도였다. 829년에 건축을 시작해 976년에 화재를 당한 성 마르크 대성당이 완전히 복원되자,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한 네 개의 금동 말 조각상을 대담하게도 대성당에 전시했다(지금은 복제품이 설치되어 있다).
여하튼 이때 베네치아의 세력은 그 어느 곳보다도 강성하여 동로마제국이 소유하고 있던 동서 무역의 이익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한편 세계는 몽골의 칭기스칸(1167〜1227)에 의해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그는 서방 원정을 성공리에 마친 후 획득한 광대한 영토를 자식과 동생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세워진 것이 4개의 한국(汗國)으로 오고타이(북동부, 에미르), 차가타이(남동부, 사마르칸트), 킵차크(북서부, 키예프), 일(남서부, 바그다드) 한국이다.
몽골제국의 본부는 엄연히 동방에 위치했는데 제5대 황제 쿠빌라이(재위 1260〜1294)는 도읍을 대도(현 북경)로 옮기고 1271년에 국호를 원(元)으로 정했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으로 눈을 돌린 것은 바로 이 시기다.
일단 돈이 벌린다는 소문이 돌면 사람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게 마련이다. 베네치아 역시 전 세계로부터 수많은 상인이 몰려들었다. 많은 사람이 무역에 종사할 수 있는 선원이 되기를 희망했는데, 당시 선원이 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대신 일확천금을 꿈꿀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선원이 위험했던 이유는 이들이 현대와 같은 무역에만 종사했던 것이 아니라 해적이나 강탈 행위도 했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도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모험에 찬 생활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대사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마르코 폴로의 출생 기록이 없다. 단지 동방견문록을 근거로 그가 1254년에 베네치아에서 태어났고 1271년인 열일곱 살에 아버지 니콜로 폴로, 숙부 마페오 폴로와 함께 중국을 여행했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몽골의 세계 제패가 가져온 무역의 활력>
마르코 폴로가 살았던 시대는 한창 십자군 전쟁 중이라 기독교도와 회교도 사이에 적대감이 팽배해 있었다. 따라서 폴로 가족처럼 아시아를 상대로 무역을 하는 상인들은 상업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우선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엄격한 허가를 받는 것은 물론 높은 세금을 물어야 했고, 정치적 돌발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그러자 상인들은 대안 무역로를 찾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이들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고대의 지리 지식은 대부분 2세기 이집트에서 활동한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eos, 90~170)의 지리학(Geographike Hyphegesis)에 근거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서 중 알마게스트(Almagest)와 비견할 수 있는 것이 지리학으로, 그는 위도와 경도의 좌표 체계를 구축한 뒤 지구를 일곱 개의 ‘기후대’로 구분한 후 도시 지명 8,000곳을 거론했다. 특히 지도 제작을 위해 삼차원 구 표면의 정보를 이차원 평면이 투영하는 ‘원통형 도법’을 제시했다.
지리학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나일 강의 수원이 아프리카의 적도 가까운 곳에 있고 그곳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 북쪽에 있는 두 호수를 거쳐 북쪽으로 흐르다가 마침내 나일 강이 된다고 적었다. 미국의 탐험가 헨리 스탠리(Henry Stanley, 1841~1904년)는 나일 강의 수원이 우간다, 탄자니아, 케냐의 3개 나라에 걸친 빅토리아호라는 것을 확인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의 기록은 놀랄 만큼 정확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 『지리학』에 등장하는 모든 지역의 태양의 고도를 관측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지리학』에서 약 8,000개의 지명이 다루어지고 있지만 그 중 태양의 고도·위도 등이 명시되어 있는 지명은 불과 400개 정도다. 대부분의 지명에 대해서는 수로지, 해도, 여행안내서, 상인의 정보, 군사정보 등을 통하여 대체적인 위치를 정하고 세계지도 상에 배치하였다.
이후 계속적인 지리 정보가 축적되자 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체계를 확장하여 동서로 연결돼 있는 유라시아가 하나의 대륙이라 확신하였고, 동쪽 끝은 말레이반도까지 다다르며 인도양은 대륙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대서양도 인도를 접한 바다 중 하나라고 간주했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는 유럽대륙과 지중해가 너무 크게 그려져 있고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는 바다의 폭은 상대적으로 아주 작게 보인다. 당연히 지구의 크기도 작게 보였다. 그러다가 1375년 카탈로니아 지역(현 프랑스와 스페인 일부 남부지역을 포함함)의 지도 제작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계산과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 근거해 동아시아의 해안선을 동쪽으로 대략 30퍼센트 밀려나도록 그렸다. 반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거리는 훨씬 짧게 그려졌다. 이것이 콜럼버스가 포르투갈에서 제작한 카라벨 함선으로도 대서양을 횡단해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중요한 이유였다.
물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탐험한 것은 마르코 폴로보다 200년 후대의 일이다. 마르코 폴로가 살았던 13세기에 바다는 위험했고 지구에 대한 정보도 매우 빈약했다. 따라서 동방과 무역을 하려면 옛날부터 알려진 무역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대에 중국과 유럽은 실크로드를 통해 연결되었다. 중국의 진귀한 물품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아시아로 들어갔고 그곳에서부터 유럽까지는 배로 운송되었다. 그런데 이슬람 세력의 등장으로 이 무역로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몽골의 세계 제패가 달성된 것이다. 결국 마르코 폴로가 태어나기 몇 십 년 전부터 서유럽인이 고대하던 동방으로의 무역로가 개방되었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실크로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마르코 폴로가 사망할 즈음인 1324년부터 몇 십 년간 실크로드가 봉쇄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마르코 폴로 가족은 행운아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에도 몽골과 유럽이 매끄러운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몽골은 서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야만적인 침입자였다. 1241년 봄, 몽골은 헝가리에서 당시 동유럽이 동원할 수 있던 최대의 정예 병력 10만 명을 물리쳤고 계속 진군해 리에크니츠 근교에서 독일과 폴란드 연합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바투(Batu, 칭기즈칸의 손자)의 일부 병력은 12월경에 유럽 대륙을 코앞에 둔 다뉴브 강과 아드리아 해안에 진주해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서유럽은 몽골의 말발굽에 눌릴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서유럽을 공격하려던 몽골군이 갑자기 바람처럼 사라졌다. 황제 오고타이가 사망하자 몽골 원정군 사령관 바투가 몽골의 쿠릴타이 회의에 참석하게 위해 철수한 것이다.
이때 서유럽은 주판알을 튕기기에 바빴다. 몽골인이 비록 야만인이긴 했지만 그들은 서유럽이 당면한 무슬림에 맞설 동맹자로서의 가치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몽골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면 예루살렘의 영구적인 확보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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