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가 중국 천하를 통일하여 당대 최고의 지존으로 떠올랐지만 이를 고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형가(荊軻, ?〜기원전 227년)와 창해역사의 암살사건이다. 이중 창해역사는 강원도에서 한국인으로 설명할 정도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인물이다. 형가를 먼저 설명한다.
형가는 전국시대 위(衛)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선조는 제나라의 명문인 경씨(慶氏)이며, 위 사람들은 형가를 ‘경경(慶卿)’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독서와 검술을 좋아했으며, 젊어서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귀국한 뒤 위왕을 비롯한 여러 군주들을 찾아다니며 국정에 대한 논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형가는 협객으로서의 삶을 택하게 되는데, 사마천의 『사기』 <자객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있다.
‘한 번은 검술 이론을 두고 갑섭(蓋聶)과 다툴 때 갑섭이 그를 노려보자 형가는 바로 물러났다. 또한 한단(邯鄲)에서 노구천(魯句踐)과 쌍륙을 하다가 그 규칙 때문에 길 한복판에서 싸움을 벌였는데 노구천이 위협적인 태도로 형가에게 소리치자 형가는 이번에도 그냥 물러났다. 사람들이 형가를 겁쟁이라며 비웃었지만 형가는 굳이 사소한 일로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후 연나라에 들어가 백정 노릇을 하면서 고점리(高漸離)라는 당시 현악기의 일종인 축(筑)을 잘 타던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연나라의 저자 즉 시장판에서 술을 마시다 취하면 고점리가 켜는 축의 반주에 맞추어 저자 한복판에서 노래를 불렀고, 이윽고 크게 통곡하는데, 그 행동은 마치 자신의 옆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것이 고사성어 「방약무인(傍若無人)」의 유래이다. 술꾼으로 살면서도 형가는 여전히 독서를 좋아했고 각지에서 찾아온 현인과 호걸, 덕망 있는 자들과 교분을 맺었으며, 현지 유력자였던 전광(田光)의 빈객이 되었다.
기원전 233년, 연의 태자(太子) 단(丹)이 인질로 있던 진나라에서 도망쳐 왔다.
단은 진왕 정(政)과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지만, 자란 뒤 정이 자신을 낮춰보자 연으로 도망쳐 복수를 꾀한다. 그러나 진은 연보다 강국이므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정을 암살코자 했는데 단에게 전광이 형가를 추천했다.
다소 놀라운 일은 단이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전광은 형가에게 정의 암살을 이야기한 후 ‘태자에게 의심을 품게 했으니 내가 부덕한 탓이다’라며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고 한다. 2000년 전 사람들의 생각이 현대와 같을수는 없는 일이다.
형가는 조심스럽게 진왕에게 가까이 다가갈 방법을 찾았다.
그 방법이란 첫째로 연에서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인 독항(督亢) 땅을 바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과거 진의 장군으로서 정이 제안한 군의 소수 정예화에 대하여 비판하다 일족이 처형되고 연으로 망명해 온 번오기(樊於期)의 목을 바치는 것이다.
형가가 이 정도라면 진왕을 만날 수 있다고 단에게 요구하자 단은 영토는 몰라도 자신을 의지해 도망쳐 온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형가가 직접 번어기를 찾아가 말했다.
‘상금이 걸려 있는 당신의 목을 대가로 내가 진왕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죽일 수 있다면, 분명 억울함도 수치도 벗겨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형가의 설득에 번어기는 복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을 형가에게 내주었다. 한편 단은 형가가 암살에 사용할 비수를 구입하여 형가에게 주었다.
기원전 227년, 형가는 자신의 친구 노구천과 동행코자 편지를 청했지만 폭우로 길이 막혀 노구천이 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태자 단이 추천한 진무양(秦舞陽)과 동행했다. 진무양도 13세의 나이에 사람을 죽여서 장사로서 이름났지만 자질은 미지수였다.
진으로 떠나던 날 태자 단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소복을 입고 황하 북쪽에 있는 역수(易水) 부근까지 전송하러 나왔다고 한다. 이때 형가가 고점리의 축을 반주로 노래한 것이 유명한 ‘역수의 노래’이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geulmoe.quesais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 물은 차구나.
장사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
이 시구가 사마천의 『사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의 하나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불려진다.
진의 수도 함양에 당도한 형가는 영토 할양의 증표인 지도와 번어기의 목을 진왕에게 바치는 형식을 취하며 진무양과 함께 진의 왕궁으로 들어갔다. 진왕 정은 크게 기뻐하며 구빈(九賓)의 예로 함양궁에서 형가 등을 맞이했다. 그런데 진무양이 진왕 정 앞에서 벌벌 떨기 시작했지만 형가가 진에 바치는 땅을 보여주겠다며 가까이 접근하여 두루마리로 된 지도를 풀자 두루마리 끝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비수 상절이 드러났다.
이에 놀란 진왕이 재빨리 일어나는 바람에 형가가 내지른 비수는 상처도 내지 못하고 진왕의 옷소매만 스쳤을 뿐이다. 여기에 다른 설명으로 형가가 짧은 단검을 휘두르기 위해 진왕의 옷소매를 잡아챘는데, 그 옷소매가 북 찢어졌다는 설도 있다.
학자들은 형가가 원래 한손으로 진왕의 의복을 잡고 다른 손으로 단검을 쓰면 암살이 성공할 것이라고 여겼으나, 추운 북쪽 나라라 두껍고 질긴 옷을 입는 연나라에 비해 진나라에서는 훨씬 얇고 부드러운 옷을 입었기 때문에 소매가 찢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계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진왕이 다급히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려 했지만, 검이 너무 긴 탓에 칼집에 걸려 빠지지 않았다. 진왕이 도망가자 형가는 비수를 가지고 진왕을 뒤쫓았고 진왕은 필사적으로 기둥을 이리저리 돌며 도망쳤는데 이때 시의(侍醫)인 하무저(夏無且)가 갖고 있던 약상자를 형가에게 집어던졌다. 형가가 놀란 사이 진왕이 칼을 빼 형가의 다리를 베자 형가가 진왕을 향해 비수를 던졌지만 비수는 빗나갔다.
그 틈을 노려 진왕이 칼로 형가를 여덟 번이나 내리쳤다. 그는 진왕을 보고 미소 지으면서 ‘나의 일이 실패한 것은 진왕을 사로잡아 반환 약속을 받아내어 태자에게 보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라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당시 어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당시 진나라의 국법에는 왕이 부르기 전에는 그 어느 누구도 왕이 있는 전상 위로 올라갈 수 없었으며, 또한 대전에서는 무기를 지참할 수 없었기에 검을 가진 자는 진왕 혼자였다.
여하튼 진왕 암살에 실패한 형가는 어전에서 죽었지만 육신이 처참하게 찢어져 참혹하게 처형되었음은 물론이다. 전상 아래에 있던 진무양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당연히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진시황은 하무저를 '그대가 나를 위해 약봉지를 던졌도다!'라고 칭찬하며 금을 포함하여 막대한 보상을 내렸다고 한다.
연나라의 단에게 암살될 뻔한 진왕은 곧바로 연나라를 공격한다. 연나라도 조나라의 부흥 세력과 연합해 반격을 시도하지만 진나라 군대는 연나라 연합군을 격파하고 기원전 226년 10월에는 수도 계(薊) 현재의 북경을 함락시켰다.
연나라왕 연희는 수도 계성까지 함락당하자 조가(趙嘉)의 주장을 받아들여 암살을 주도한 아들 연단의 목을 잘라 진나라로 보내 화평을 청하지만 진나라는 무시하고 계속 연왕을 추격했다. 결국 연나라왕은 진의 포로가 되었고 연은 멸망한다.
형가는 심지 하나로 강대국의 왕에게 맞섰던 ‘의사(義士)’로 잘 알려져 있지만 현대에는 형가가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는 논평도 있다. 또한 일개 자객에 불과한 형가에게 국운까지 맡겨 결국 연나라가 멸망하는 빌미를 제공한 연의 태자 단에 대한 평가도 별로 높지 않다.
형가가 죽고 연나라가 망하자 형가의 친구 고점리는 머슴이 되어 송자(宋子) 땅에 잠적하지만 그의 축 솜씨 때문에 진시황에게 알려진다.
시황제의 행궁에 불려가게 된 고점리는 시황제를 암살하기 위한 특수한 흉기를 고안했는데, 비녀처럼 생겼지만 끝부분에 교묘하게 날이 숨겨져 있고 한 번 누르면 송곳 모양의 날카로운 흉기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장치였다. 그러나 환관 조고(趙高)에 의해 고점리의 계획이 발각되자 시황제는 고점리의 축 타는 재주를 아껴 대신 그의 눈을 멀게 하고 궁중에서 축을 연주하게 했다.
악공으로 일하면서 고점리는 축에 납을 넣어서 암살기회를 노린다. 어느 날 연주 도중 진시황의 목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축으로 쳤으나 눈이 멀어서 빗맞았고, 결국 형가의 뒤를 따른다.
형가와 고점리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던 진시황은 다시는 멸망당한 나라 사람을 자신에게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했다고 한다.
'어! 그래?(세계불가사의) > 중국의 자존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자존심(12) : 만리장성(1) (0) | 2021.01.14 |
---|---|
중국의 자존심(11), 진시황제 저격 창해역사는 한국인(2) (0) | 2021.01.13 |
중국의 자존심(9), 2세황제 호해 (0) | 2021.01.13 |
중국의 자존심(8), 진시황제(8) (0) | 2021.01.13 |
중국의 자존심(7), 진시황제(7) : 아방궁 (0) | 2021.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