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풍 운동>
이노센트 3세가 십자군 원정을 기획한 것은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당시 교황권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이노센트 3세의 성속양권(成俗兩權)은 왕들에게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도전이 일어났다. 바로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할 교회 내부에서 이단이라는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이단 운동이란 기독교를 믿지 않는 타종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청빈. 원시 그리스도교에의 복귀, 속세로부터의 이탈, 최후의 심판의 도래 등을 바라는 소박한 민중적 종교 운동이라는 점이다.
교황권이 점점 비대해지면서 소박한 민중의 종교 감정을 점점 박탈하자 민중은 그리스도가 설파한 청빈을 교회가 상실했고 세속적인 이해에 더렵혀지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이노센트 3세로서는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교회의 본분을 지키라는 운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를 정화하려는 개혁운동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칼라브리아 출신의 성직자 요하킴 다 피오레가 제창한 교리가 널리 유포되기 시작했다. 그는 구약 및 신약성서의 시대, 성령의 시대에 뒤이어 반(反)그리스도의 시대 즉 종말이 오므로 최후의 심판의 때를 대비하여 회개하라고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더구나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도 청빈과 복종을 내걸고 물욕에 현혹된 사회나 교회를 비판했는데 그의 교설은 에스파니아 출신의 도미니코(도미니쿠스)와 함께 민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놀랍게도 이노센트 3세는 개혁운동에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수구 세력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노센트 3세는 자신이 개혁 운동파의 손을 들어준다면 그들이 결국 교황권으로 부터의 독립을 지향하게 되며 그렇게 된다면 유럽에 뿌리를 박고 있는 교황권 자체가 위험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개혁세력을 곧바로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불순한 민중들의 혁명 사상을 방지하기 위해 십자군을 동원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십자군이라는 명분으로 개혁 세력들을 규합하여 이교도들과 싸움터에 나서게 한다면 개혁 운동은 자동적으로 수그러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4차 십자군이 발원되는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런데 이노센트 3세로서는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다. 그의 명령이 내려가기만 하면 십자군들이 구름같이 모여들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모인 병력은 예상외였다.
이는 십자군에 참여해야 할 유럽의 왕들의 상황이 원정을 떠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열성적이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경우도 그가 이슬람을 상대로 분전했지만 결론이 그다지 좋지 않았으므로 반응이 차가웠다. 이는 세 번이나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사람들이 돈과 인력만 날리고 이득이 전혀 없다는데도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압력은 어느 정도 주효하여 프랑스의 기사와 영주들이 주축이 되어 그럭저럭 구색을 갖추었다. 기사 4,500명, 종자 9,000명, 보병 20,000명 등 약 33,500명의 병력으로 이는 교황이 대사, 은사 등을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자군이 공격하는 목표는 성지가 아니라 아이유브 왕조의 근거지인 이집트였다. 명분은 간단하다. 성지 회복이 목표이지만 성지를 회복하더라도 가까운 이집트에 적의 근거지를 둔다면 계속 버티기 어려우므로 성지보다 이집트를 먼저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집트에 있는 막대한 재보를 확보하자는 것은 덤이였다.
이동 경로로는 해로가 채택되었다. 과거의 경험을 볼 때 육로원정은 각종 위험과 원정로 상의 현지 세력과의 갈등을 야기하므로 해로가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인 것이다. 이는 비록 원정군의 숫자는 현저히 줄었지만 그동안의 학습을 통해 보다 세밀한 계획으로 원정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해로에 가장 중요한 선박이 없다는 점이다.
당대 해상로는 제노바와 베네치아 공화국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제노바는 일거에 십자군의 이송을 거절했다. 그러므로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했는데 베네치아는 500여 척의 함선으로 33,500명의 병력을 이집트로 실어다 주고 9개월 분량의 보급을 책임지는 대신, 은화 85,000마르크와 점령지의 영토 일부를 받기로 했다.
문제는 자금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이다.
1202년 6월까지 집결한 병력은 12,00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원정에 필요한 자금은 십자군 영주들이 지불해야하는데 인원 부족은 자금 부족을 의미한다.
십자군 동원으로 유럽 내부의 종교문제를 해결하려던 이노센트 3세로서 이미지를 구기고 있는데 베니치아에서 십자군에게 기발한 제안을 해 왔다. 그것은 같은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 보호령인 달마티아 지방의 자라(Zara)시를 십자군이 찾아 주면 자신들에게 진 빚을 따지지 않고 십자군들을 이집트까지 수송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성지 탈환을 위해 일어선 십자군에게 기독교인들의 근거지인 자라 시를 공격해 달라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말도 놀랍지만 십자군은 그들의 제안을 즉각적으로 수락했다.
약 한 달의 항해 끝에 1202년 11월, 십자군은 자라에 도착하였다. 복잡한 해안선과 절벽 등 험한 지세가 원정군에 장애가 되었고 같은 기독교를 공격한다는 사실이 공격을 주저하게 만들었지만 성전에 필요한 자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명분하에 결국 십자군이 자라시를 공격했고 사상 최악의 약탈과 만행을 자행되었다.
이와 같은 사건이 생기게 된 것은 1203년 4월, 자라 시에 폐위된 동로마 제국 황제의 아들인 알렉시우스 황자가 망명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분에 의해 제위를 빼앗긴 아버지를 복위시키기 위해 자라시를 확보한 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자면서 그야말로 솔깃한 제안을 내걸었다.
(1) 십자군이 갖고 있는 빚을 탕감해주고 이집트 원정을 위한 비용으로 20만 마르크를 지불한다.
(2) 성지 수호를 위해 병사 10,000명과 기사 500여명을 파견한다.
(3) 교황수위권을 인정하고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의 산하로 통합시킨다.
그의 말을 듣고 십자군들을 충실하게 기독교인들이 장악한 자라시를 공격한 것이다.
기독교인 도시인 자라를 십자군이 공격했다는 보고를 받은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격분했다. 자라는 엄연히 교황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교황인 자신의 이름으로 시작된 십자군이 같은 기독교계, 그것도 엄연한 가톨릭 도시를 공격한 것은 상식 밖의 일이자 교황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자라의 보호자인 헝가리는 강력하게 교황에게 파문을 요구했다. 교황은 결국 십자군을 동원하기 위해 발표한 십자군에 대한 대사ㆍ은사를 취소하고 공범인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파문을 날렸다. 베네치아와 십자군 측이 반발하였지만 이노센트 3세의 파문은 철회되지 않았다.
그러나 십자군은 해체되지 않았다. 교황의 서신이 십자군 지도부에 의해 은폐된 것은 물론 대신 십자군에 참전한 일선 성직자들이 사면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한 월권 행위였지만 이미 십자군 지도부는 자라의 약탈로 큰 이득을 취한 상태이므로 교황의 통제를 전혀 듣지 않는 상황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자라에 이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당대의 정치 역학을 바꾸는 결정적인 요인인데 이노센트 3세 측은 곧바로 이 황당한 제안을 거부했지만 이노센트 3세로서는 무조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동안 동로마는 그리스도 정교회를 믿고 있으므로 서로마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데 동로마를 점령한 후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의 산하로 통합시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는 십자군으로서도 교회 통합이라는 명분도 있었다.
더구나 십자군 당사자로서는 물자 및 병력이 부족하므로 이집트 원정을 고민하고 있었던 차에 어느 정도 명분도 확보했다는 생각에 십자군 사령관 몬페라토 후작은 이를 승낙한다. 이때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의 절반을 받는 조건도 포함되었다.
이들의 합의로 알렉시오스 앙겔로스 황자는 디라히온과 코르푸에서 지지자들과 연합군의 도움으로 알렉시오스 4세로 추대되었고 연합군은 1203년 4월 자라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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