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1)

Que sais 2021. 1. 2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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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궁전의 발굴

1994년 가을 프랑스의 고고학 발굴팀이 알렉산드리아 앞바다 깊이 7미터 정도의 바다 속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파로스 등대의 잔해 수백 점을 건지는데 성공했다. 발굴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4.55미터, 무게 12톤의 여신상을 기중기로 끌어올렸으며 5헥타르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에 거상들의 토르소, 목이 떨어진 스핑크스들이 수없이 수장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최소한 3,000개가 넘는 건축용 돌들이 카페트와 같이 깔려 있으며 원형기둥들의 파편들도 수 백 개가 된다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스탄불과 다르다엘 사이의 프린스 섬에서 채석되는 백색 대리석들이 발견되었다는 것.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이 채석장에서 대리석을 수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1998년에는 클레오파트라의 궁전 터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12로 추정되는 스핑크스를 인양했다. 이 대리석 스핑크스는 프톨레마이오스12세의 얼굴에 사자 몸통을 결합한 모양으로 여왕 궁전과 전용부두가 있었던 안티로도스 섬 지역에서 발견됐다. 이시스 신전 대사제상과 당시 침몰됐던 선박도 인양됐다. 2천여 년 전의 고대 알렉산드리아 항구 및 파로스 섬, 안티로도스 섬 등이 지진과 조류에 의해서 고스란히 가라앉아 있었다. 발굴팀은 전차가 달렸던 도로는 지금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말끔하다고 전했다.

이집트 19왕조 람세스 2세의 이름이 적힌 카르투슈(이집트 왕족의 이름을 기록할 때 사용하는 타원형 윤곽)가 각인된 파피루스 형태의 거대한 기둥들도 발견되었으며 람세스 2세의 아버지인 세티 1세의 오벨리스크(고대 이집트의 사원 입구에 세워진 한 쌍의 커다란 뾰족 기둥)도 발견되었다. 오벨리스크는 아스완에서 나오는 핑크 빛 화강석으로 만든 것이다. 이들 기념물들은 모두 당시의 건축가가 원래 있었던 위치인 헬리오폴리스에서 갖고 온 것이다. 12미터나 달하는 거대한 파라오 부부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조상(彫像)스트라보가 설명한 파로스 등대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파로스 섬의 말단부 사방이 바다로 씻겨 진 바위이며, 섬과 같은 이름의 탑이 그 위에 여러 층으로 된 흰색 대리석으로 건설되었다. 이것은 파라오가 지신들의 거상을 건설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왕의 친구인 소스트라투스가 선원들의 안전을 위해 그것을 세웠다거상은 항구로 배를 타고 들어오는 선원들이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파로스 섬의 각 측면의 해안은 낮은데다 암초가 많으므로 바다에서 들어오는 항해자가 항로를 정확히 항구 입구로 향하게 하려면 높고 눈에 잘 띄는 표시가 필요했다.그 크기는 12미터나 되었으며 이집트 파라오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파라오가 그리스 도시의 지배자임과 동시에 이집트를 통치하는 군주(프톨레마이오스 왕조)임을 알려준다.’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건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파로스 등대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렉산드리아 항구가 건설된 배경이 중요하다.

기원전 341년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는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후 넥타네보 2가 통치하는 이집트를 공격한다. 이것은 이집트 역사에서 페르시아의 두 번째 침공이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군대는 3천명의 보병을 동원하여 전격적으로 델타지역을 휩쓸고 멤피스로 진격했다. 당시 이집트 군대도 그리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용병들과 합하여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멤피스는 함락된다. 이집트군은 곧바로 상이집트로 철수하여 항전을 계속했으나 곧바로 추격해 온 페르시아 군대에 패배하여 이집트 전체가 페르시아에게 점령된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이집트 점령은 원천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페르시아와 이집트간의 거리가 워낙 멀기 때문에 점령군은 이집트 현지에서 모든 식량과 군수품을 해결해야 했다. 이때부터 이집트인들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그야말로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된다.

기원전 338년 아르타크세르크스 3세가 고문관 바고아스에게 살해되자 두 명의 왕이 그를 잇는데 아르세스와 유명한 다리우스 3. 이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한다. 그는 당시 강력한 제국 페르시아에 대항할 연합군을 형성할 목적으로 이집트에 상륙하여 이집트 원주민의 도움을 배경으로 페르시아 군을 공격한다. 기원전 333년에 이집트에 도착한 알렉산더 대왕을 이집트인들이 해방자로 열열히 환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세력을 이집트로부터 축출했지만 이집트인들에게 나라를 되돌려 주지는 않았다. 그는 기원전 332년 말 프타(Ptah) 대사제가 주관한 이집트 의식에 따라 파라오에 즉위했다. 그는 이집트의 전통에 따라 (Re) 의 사랑을 받는 자이자 아문(Amun) 에 의해 선택된 자가 된 것이다.

새로운 파라오가 된 알렉산더는 이방인 지배자가 아니라 파라오 신분으로 중요한 신전들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신들에게 봉헌했다.

그의 방문 여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아문 신의 신탁소가 있는 시와(Siwa) 오아시스였다. 스스로를 신의 후예라 믿은 알렉산더는 자신이 헤라클레스처럼 제우스의 아들이라 생각했다. 이집트에서 파라오를 신의 아들이라 여기는 관념과도 별로 다를 바 없었고 시와를 방문함으로써 그것을 확인했다. 시와의 제사장이 신을 대신하여 그를 제우스와 아문의 아들로 환영했다.

이집트는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인데다가 당시 세계 최고의 부를 갖고 있으므로 이집트를 직접 통치할 생각을 굳힌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새로운 근거지를 이집트에 건설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렉산더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가 태동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건축가는 그리스인 디노크라테스였다.

디노크라테스는 다소 엉뚱한 사람으로 알렉산더와의 첫 만남에는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건축가 비트뤼브는 다음과 같이 알렉산더와 디노크라테스의 첫 만남에 대해서 적었다.

디노크라테스가 자신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알렉산더를 만나러 마케도니아를 떠났다. 그는 알렉산더를 손쉽게 만날 수 있는 방법으로 당시 영향력이 있는 자신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가 써 준 편지를 갖고 갔다. 알렉산더의 진영에 도착하자 그는 알렉산더를 빨리 만날 수 있도록 그 편지들을 관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편지를 받은 관리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알렉산더 대왕과의 면담을 방해했다. 차일피일 면담이 미루어지자 디노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알렉산더를 만날 수 있는 꾀를 내었다.

디노크라테스는 건장하고 매우 잘 생긴 남자였다. 자신의 용모에 남다른 자부감을 갖고 있는 그는 옷을 훌렁 벗고 기름으로 온 몸을 칠한 후 포플라 나무가지로 몸을 둘러쌌다. 그리고 왼쪽 어깨에는 호랑이의 가죽을 덮고 한 손에 곤봉을 쥔 채 알렉산더가 재판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갔다. 이 기상천외한 옷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 군중의 주목을 끌자 알렉산더는 그를 앞으로 오게 하고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건축가 디노크라테스로 폐하가 마음에 들어하실 도시 계획에 대한 구상을 갖고 왔습니다.”

 

그가 설명하는 계획을 들은 알렉산더는 도시인들이 모두 먹고 살 수 있는 밀을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디노크라테스는 신도시가 항구에 세워진다면 밀을 수입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대의 계획이 매우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대가 말하는 대로 도시를 건설한다면 큰 문제점이 생기오. 주민들이 먹을 식량을 외부에서의 수입으로 충당해야 한다면 그 도시를 마케도니아의 식민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만약에 식량의 수입이 여의치 않아 어린아이들이 우유를 마시지 못하고 주민들이 먹을 것이 없다면, 그래서 인구의 자연적인 증가를 막아야하고 또한 그 도시를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야 한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게 아니겠소. 그러나 그대의 계획은 아름답고 또 그럴듯하게 보이므로 그대가 구상하는 도시를 건설하도록 승인하지는 않겠지만 내 곁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소.”

 

그후 알렉산더는 파로스 섬에서 멀지 않은 마레오티드가 지중해를 마주보고 있는데다가 외적의 침입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곳에 자신이 구상한 도시를 세운다. 현재의 알렉산드리아.

건축가 디노크라테스는 도시를 북남과 동서로 나누었는데 스트라보는 길이가 5.32킬로미터, 폭이 1.42킬로미터가 된다고 적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로마시대를 거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건설이 된지 2세기가 지났을 때 주민의 숫자는 무려 30만 명이나 되었고 클레오파트라를 자살케 만든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시대에는 50만 명이 넘었는데 혹자는 100만 명이라고도 말한다. 여하튼 당대에 로마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