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서 도굴은 이집트식 장례문화와 함께 생겨난 이집트의 역사일 정도로 매우 오래되었다. 내세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믿음이 미라를 만들고 많은 재화를 무덤에 투자하도록 했는데, 도굴꾼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먹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의 믿음과도 관련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해야 했고 또 식량이 부족하거나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었을 때를 대비해서 여유분을 비축했다. 재산이나 지위를 상속받는 사람들은 보다 유족한 삶을 누리기 위해 힘썼다. 좀 더 나은 음식과 술, 주택과 옷 등이라 볼 수 있지만 그들을 항상 감싸고 있는 것은 보다 좋은 장례용품을 모아두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상 도굴은 무덤이 만들어질 때부터 예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고대 국가일수록 인구가 증가하는 데 비하여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재화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인구가 늘어갈수록 자신이 죽을 때 갖고 갈 물건들이 부족하게 마련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미 죽은 사람들의 부장품을 훔치는 것이었다.
피라미드를 비롯한 대형무덤의 도굴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는 극심한 고문 끝에 사형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도굴꾼들은 충분히 모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발각되지 않는다면 실생활에서 풍족하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사후에도 영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절대 집권자인 현생의 파라오조차 자신의 선조인 피라미드를 도굴한 이유다.
<경찰이 없는 이집트>
이집트에서 ‘도굴꾼’이라는 직업이 수천 년 동안 계속하여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학자들에 따라 대대로 경찰이라는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론상 파라오는 마아트를 유지하며 사법과 행정을 관장할 책임을 지었지만, 백성들의 법과 질서를 강제할 수 있는 기구가 이집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이집트에서 현대적인 경찰과 같은 기구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반신으로 지위가 상승된 파라오를 보호하고 그들의 왕궁 등 국가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왕궁경호대가 존재했다. 또 신전들을 포함하여 국경지대, 광산, 사막, 수로 등은 재상들의 통제를 받는 군인이나 특수경찰들이 지켰다. 파라오가 이집트를 통치하지만 각자 직분에 따른 경호대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안전과 재산일 경우 상황은 달라졌다. 이집트에서는 개인들 스스로 자신의 안전과 재산을 책임져야 했다. 이집트 왕조 시대 내내 정부는 사적으로 판단되는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 경찰들이 개인들의 일에 관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개인들의 반역적 행위를 적발하는 일에 국한되었다.
이집트에서는 경찰들이 전혀 개인들의 일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인들 간에 민ㆍ형사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피해자는 형사와 변호사의 역할을 겸해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했다. 한 예로 싸움이 일어나 상처를 입었을 경우 그가 하소연할 곳은 경찰이 아니라 법원이었다. 법원에서 그는 가해자의 이름을 대야했고 자기가 배상을 받으려면 사건의 전말을 본인이 직접 요약해서 설명해야 했다.
이와 같이 민간인들을 위해 경찰력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이집트 사회가 운용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집트인들의 철두철미한 사상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은 공동체 특유의 사상으로 인해 어려서부터 자신이 속한 틀을 깨지 않으려고 했다. 이승에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미라가 되어 태양의 배에 탈 수 있었기 때문에, 남에게 해가 될 일을 벌이려고 하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외국인이 그들 사회로 들어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이집트 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그들만의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떤 마을에서 도둑질 등의 범죄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범인을 찾아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뜻이다. 공동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한 범인은 곧바로 알려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수많은 기록들 중에는 범행과 관련된 자료가 많지 않다. 중왕국 시대의 세헤테피브레의 석비에는 이집트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경고가 적혀 있다.
'폐하에게 반역한 자에게는 무덤이 마련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시체는 강에 내던져질 것이다.'
이는 『사자의 서』에서 악령이나 사체절단을 막아달라고 기원하는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폴크너가 해석한 주문의 내용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
'신들의 제왕이시여. 상처를 가하는 이들, 무덤을 파는 이들로부터 저를 구해주십시오. 적들로부터 저를 지켜주시고 제 몸을 절단하려는 자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십시오. 밤잠을 자지 않고 노리는 자들의 칼날이 제 몸을 절단하게 하지 말게 해주십시오. 저를 그자들의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가게 하지 마시고 그자들의 통 속에 들어앉게 하지 말게 해주십시오. 제가 신께서 증오해 마지않는 그 어떤 일도 겪지 않게 해 주십시오.'
물론 신왕국에서 국립경찰은 아니지만 ‘메자이’라는 기구가 존재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들 조직은 이집트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누비아 동쪽 사막에 거주하는 유목민들이 운용하던 기구다. 이집트에서 쫓겨난 힉소스인들이 훗날 이집트인들과 통혼하면서 경호대와 국경수비를 담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경찰기구는 이집트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범죄를 해결하기보다는 왕가의 무덤을 보호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이집트인 입장에서는 외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목민에게 이렇게 막중한 업무를 맡긴 것은 이집트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파라오 무덤에 막대한 재물이 묻혀있다는 것을 알고 눈독을 들였기 때문이다.
또 이집트 사람들이 ‘외국인 도굴꾼은 외국인을 이용해 막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데도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메자이를 이용해서라도 지켜야 할 막대한 재산이 있다는 사실은 도굴꾼들에게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도굴해야 한다는 유혹이 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12왕조부터 피라미드 건설은 거의 기피하게 되었는데, 투트모세 1세(재위 기원전 1493~1483년)는 피라미드를 대체할 ‘왕가의 계곡’이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물론 왕가의 계곡이란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도출한 사람은 투트모세 1세가 아니라 그의 선임자인 아멘호테프 1세(기원전 1514~1493년)다.
과거의 무덤은 하나의 장례 기념물 안에 왕의 무덤과 예배실을 마련하고 그 예배실에서 후대 사람들이 공양을 함으로써 내세에서도 파라오가 영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건축구조는 도굴꾼에게 보물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였다. 예배실만 찾으면 그 인근에 엄청난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멘호테프 1세는 이러한 무덤의 개념에 혁신을 가했다. 어느 한 곳에 순수한 의미의 무덤을 만들고 예배실 또는 장례신전은 다른 곳에 짓는 것이다. 이것은 신왕국의 신개념 건축술로 과거의 것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독창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후임자인 투트모세 1세는 선임자의 새로운 아이디어에 더욱 활력과 영속성을 불어넣고자 했다. 그는 건축가 이네니에게 죽은 파라오들이 영면할 수 있는 비밀스런 장소를 찾아내도록 명령했다. 그가 선택한 곳이 바로 나일 강 서부 해안에 있는 황량한 사막, 데이르엘바하리다.
‘왕가의 계곡’ 즉 ‘왕들의 문’을 뜻하는 왕가의 계곡은 산꼭대기가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고대부터 내려오던 무덤은 피라미드 형태라는 개념과도 일치했다. 이집트인들은 이들 지역을 과거부터 신성시 여겨 이곳을 침범하는 자는 ‘침묵의 여신’이 벌을 내린다고 믿고 있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가운데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는 황량한 곳이지만 위대한 자, 즉 파라오들의 영혼이 교감하고 내세에서 살기에는 적합한 신비의 장소였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파라오의 저주’가 태어나는 산실이다.
파라오의 무덤을 파는 장인들은 비밀을 약속하고 작업에 임했다. 건축가도 엘리트 장인들로 구성된 소수의 인원들로만 구성했고, 어느 누구도 그들 인부들을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게 했다. 이 장인들은 데이르엘메디나에 모여서 살았고 파라오, 대신, 건축가들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들의 생활은 오직 파라오의 무덤을 만들고 정비하는 일 뿐이었다. 장인들도 불만은 없었다. 파라오는 비밀이 새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장인들에게 어느 누구보다도 좋은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왕가의 계곡의 또 다른 장점은 무덤이 있는 장소가 계곡이므로 입구와 출구만 경비하면 관리가 수월하다는 점이다. 사실 왕가의 계곡이 개발되기 시작한 초창기는 이집트의 정세가 안정적이었으므로 도굴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 말은 곧 정세가 불안해지면 얼마든지 도굴이 가능했다는 뜻으로, 투탕카문의 무덤을 제외한 왕가의 계곡의 모든 무덤이 도굴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여하튼 투트모세 1세의 무덤은 왕가의 계곡의 시작이 되었는데 그의 무덤은 전실과 타원형의 현실을 하강 계단으로 밋밋하게 연결시킨 아주 간단한 것이다. 후대의 파라오들은 그를 이어 계속 왕가의 계곡에 매장했는데 람세스 2세의 아버지인 세티 1세의 무덤은 입구에서 현실까지 거리가 150미터나 되었다. 큰 방은 한 변의 길이가 8.5미터나 되었으며 아름다운 벽화와 천장화가 그려져 있다. 그중 천장화 북천도(北天圖)는 이집트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간주된다. 진한 청색으로 북쪽 하늘을 그린 다음 그 위에 황색별을 수없이 박아 놓은 그림으로 백조좌, 목우좌 등 그밖의 성좌를 동물로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의 또 다른 특징은 왕에 제례를 바치는 신전 시설을 경작지 외곽에 축조했다는 점이다. 이들 신전은 이른바 ‘수백만 년의 거처’로서 신격화된 왕의 영생에 부응하는 건축물로, 이처럼 혁신적인 파라오의 무덤 개념을 창안 한 투트모세 1세는 사후에 ‘가장 위대한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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