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의 수난>
신라 불교의 정수라 볼 수 있는 석굴암은 고려 건국 이후 그 존재감이 약해졌지만 지역에서 전혀 잊혀진 것은 아니다. 석굴암이 갖고 있는 위상 때문으로 볼 수 있는데 17세기〜18세기 정시한의 『산중일기』, 정선의 『교남명승첩』등의 기록을 보면 어느 정도 석굴암의 존재가 나름대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산중일기』에 전주에서 불국사와 석굴을 보러 오는 사람이 있다고 적혔는데 이는 석굴암이 당시에도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참배객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석굴암이 조선조에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와 보수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숙종 29년(1703)에 종열(從悅), 영조 34년(1758)에는 대겸(大謙)이 석굴암을 중수했고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완전히 세인에 잊혀졌다고 볼 수 있는데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에 우연히 발견된다. 경주에서 동해안 마을로 우편배달을 가던 우체부가 토함산의 동산령을 넘어가면서 범곡 근처에서 능 같은 것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가까이 가서 입구를 들여다보니 무너진 천장 사이로 돌부처가 가득 묻혀 있었다.
당시 본존불의 코가 깨졌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갈라져 파손되었으며, 천장의 1/3이 무너지고 구멍에서 흙이 내려오고 있으므로 이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우체부는 자기가 목격한 사실을 일본인 우체국장에게 보고했다. 전문가들의 현장 답사로 석굴의 존재가 밝혀졌는데 얼마 후 소네 아라스케가 직접 경주로 내려와 석굴을 시찰했다. 석굴암이 그동안 아름아름으로 일부에게 알려졌지만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일반인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바로 이때부터 석굴암의 수난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경향신문>의 이기환 기자가 철저히 추적했다.
석굴암이 재발견된 후 당시 대한제국의 관리로 경주에서 일했던 일본인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는 1909년 제2대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로부터 황당한 명령을 받는다.
기무라 시즈오가 받은 명령은 석굴암을 완전 해체한 뒤 경성 즉 서울로 수송하라는 명이다. 그러면서 소요 경비가 얼마인지도 보내라고 했다. 당시 일제의 계획은 석굴암 불상들과 불국사 철불을 모두 해체한 뒤 토함산에서 동해안 감포를 통해 선박으로 인천까지 운반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폭명(暴命)이었다.
석굴암 이전 명을 받은 기무라 시즈오는 현실을 모르는 명령이라며 맹종해서는 안 된다며 회답하지 않고 묵살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정말로 그랬는가는 1924년 그의 회고록 『조선에서 늙으며』말로도 확인된다.
‘이후 나의 명령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해서 중지된 것은 지금에 이르러서 흐뭇하게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이런 황당한 명을 내린 사람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였다고 전해진다. <동아일보> 1961년 11월2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곧 합방이 되었는데 이런 보물을 산중에 방치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이것을 전부 뜯어 서울로 운반하라고 지시했다. 업자들이 경주로 내려왔으나 모두들 데라우치를 두고 ‘미친 사람’이라고 욕하고 돌아갔다. 이리하여 석굴암은 현장에서 수리 공사를 착공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석굴암 완전해체 후 서울이송이라는 기상천외한 명을 처음 내린 사람은 데라우치가 아니라 한일합병 직전 조선의 2대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라는 것이다. 소네는 1909년 6월 통감으로 승진했고 9월 경주를 초도방문한 후 석굴암을 해체하여 서울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여하튼 그의 명령은 당대의 실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지에서의 반발 등으로 이행되지 않았으며 결국 원래의 장소에서 석굴암을 복원하는 것으로 결정난다.
그런데 학자들이 분개하는 것은 소네 아라스케가 경주를 방문한 후 석굴암 본존불 바로 뒤의 11면 관음상 부조 앞에 안치돼있던 대리석 5층 소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1930년대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는 유력한 용의자로 ‘소네 통감’을 지목했다.
‘지금 석굴암 9면(11면의 잘못) 관음 앞에 남아있는 대석 위에 소형의 훌륭한 대리석탑이 있었는데 불사리를 봉납한 소탑이었다. 그런데 1909년 ‘존귀한 모 고관’이 순시하고 난 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1909년 ‘모 고관’이라면 소네를 지칭한 것이 분명했다. 한국의 예술에 조예가 깊은 야나기 무네요시도 1922년 ‘소네 아라스케’를 유력한 용의자로 꼽았다.
소네 아라스케를 유력한 용의자로 꼽는 이유는 충분하다. 그는 한국통감으로 재직한 기간이 1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고서들을 수집, 일본 왕실에 헌상한 인물이었다. <황성신문>은 그가 수집한 고서가 2,000여 권에 달한다고 적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고려자기를 ‘싹쓸이’ 했다면, 소네는 고서와 고문헌을 휩쓸어간 약탈자였던 것이다. 소네는 한일합병 직후 통감에서 물러나 귀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그가 궁내청 서고에 보낸 책은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이라는 이름으로 소장돼있었다.
그러다 1965년 한·일 국교수립 이후 반환문화재로 돌아와 현재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다.
학자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소네가 가져간 것이 틀림없는 ‘석굴암 내 오층소탑’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이다. 역사학자 이홍직은 소네의 야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네가 오층소탑을 갖고 간 후 불국사와 석굴암의 보물을 송두리째 일본으로 옮기려 했다는 것이다.
석굴암을 통째로 일본으로 옮긴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말에 이기환 기자는 당대에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1906년 일본의 궁내대신인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가 황해도 풍덕군 부소산 기슭에 있던 경천사 10층 석탑을 해체한 뒤 일본으로 반출했다. 다나카는 당시 고종 황제가 하사품으로 탑을 선물했다며 석탑을 마구 해체·포장해서 수십 대의 달구지로 야밤에 개성역으로 빼돌린 뒤 인천에서 배에 옮겨 싣고 일본으로 반출했다. 경천사 10층 석탑은 높이가 13미터나 되는데 이것을 해체·밀반출할 정도라면 석굴암도 적어도 이동하는데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당시 유력 일본인들 사이에서 조선의 문화재 약탈은 일종의 ‘트로피 사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석굴암에서 사라진 것은 5층 소탑 뿐이 아니다. 석굴암 내의 감실에 안치되었던 작은 불상 2점과 불국사 다보탑 사자 3구 등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1910년부터 경주군 주임서기였던 기무라 시즈오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마지막 소원이 있다. 도아(盜兒) 즉 도둑놈들에 의해 환금되어 일본으로 반출된 석굴암 불상 2구와 다보탑 사자 3구, 그리고 석조사리탑 등 귀중물이 반환되어 보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이다.’
여기에서 환금이란 돈 주고 빼앗았다는 뜻인데 기무라는 당시 불국사를 지키던 스님 몇 명에게 돈 몇 푼 쥐어주며 반강제로 석조물들을 약탈해간 일본인들을 ‘도적놈’이라 가리킨 것이다.
일본의 석굴암에 대한 만행은 이에 끝나지 않는다. 의병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에서 1907년 동안 석굴암을 지키는 사람이 없자 석굴 본존의 뒤편 둔부를 무자비하게 때려 파괴했다. 이는 신라인들이 본존불 조상 안에 진귀한 복장유물을 넣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일제는 불국사 다보탑의 경우 상층기단 네 귀퉁이에 있던 돌 사자상 4개 가운데 상태가 좋은 3개를 약탈했다. 또 대웅전 뒤에 있던 섬세한 조각 장식의 석조사리탑 역시 약탈했다. 이 중 석조사리탑은 <와카모토제약회사> 사장이던 나가오 긴야(長尾欽彌)의 소유로 됐다가 조선총독부로 반환됐고 현재 보물 61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석굴암 5층소탑과 벽감에 있던 감불 2점, 그리고 다보탑 돌사자 3점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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