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건축물 석굴암>
석굴암은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 면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지 않으면 건설될 수 없는 걸작이다. 김형자 교수는 석굴암이 10분의 1 비율로 건축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비율은 기원전 25년 헬레니즘 사상가이자 건축가인 비트루비우스가 주창한 ‘균제비례(Symmetry)’와 유사하다. 그는 ‘건축미는 건물 각 부의 치수관계가 올바른 균제비례를 이룰 때 얻어진다’고 강조했다. 균제비례는 인체에서 얻어진 것이며 인체에서 가장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주는 비율이다.
석굴암 본전 불상도 이런 균제비례가 적용되어 빼어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은 얼굴과 가슴 어깨 무릎의 비율이 1:2:3:4 의 비율로 되어 있어 본존불상 자체를 1로 봤을 때 10분의 1인 균제비례가 적용되었다.
신라인들이 당시 비트루비우스가 주장한 균제비례를 알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신라인들도 비트루비우스가 발견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의 비율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석굴암 전체의 구조를 기하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공간이 가로 : 세로 또는 세로 : 가로의 비율이 1 : 2 인 직사각형으로 이뤄져 있다.
석굴암은 네모꼴의 전실과 둥근 후실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천원지방(天元地方)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후실의 천정은 돔형으로 돌을 쌓아올려 만든 것으로 당시의 발달된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석굴암의 정수는 시각적인 효과도 고려했다는 점이다. 사각형의 예배공간에서 당대의 일반 사람들의 키로 추정되는 160센티미터 되는 사람이 서서 본존불을 바라보면 본존불의 머리 뒤에 있는 광배의 정중앙에 나온다는 점이다. 이런 시각적인 효과까지 고려했다니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학자들은 원래 돔은 중근동지대에서 발생하여 로마시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했는데 그것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방에까지 알려졌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신라인들은 전래된 돔의 형태는 받아들이면서도 축조법은 신라 특유의 기술을 사용했다. 석굴암의 천장 구조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돔형 구조와는 다른 특이한 형태를 보인다. 석굴암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돔형 구조라는 기본 틀에 쐐기돌이라고 하는 특이한 무게의 균형 장치를 갖고 있다.
반지름 12당척 즉 29.7센티미터의 궁륭형 천장은 화강석을 둥근 띠 모양으로 묶어 5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띠 둘레는 각각 10개의 2중 곡면 부재로 묶였는데 아래쪽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띠의 폭이 줄어들며 정점에 연꽃 문양으로 된 125개의 돌을 올려놓았다. 기울기가 크지 않은 아랫부분의 2개 층을 제외하고는 띠를 묶을 때 돌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연접부에 쐐기돌들을 수평으로 박았는데 이를 ‘멍에돌’이라고도 한다.
멍에돌을 팔뚝돌이라고도 부르는데 길이 2미터 크기의 약간 운두가 높고 폭이 좁은 단면의 장대석으로 그 길이가 상당히 길기 때문에 설치하면 머리 부분만 천장 벽면 밖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적심에 넣어 고정시키게 된다. 멍에돌 머리 부분엔 잘록하게 판 흠이 있고 홈에 천장 판석을 끼운다. 멍에돌을 삽입하여 반 모멘트를 조성시켜 조립식으로 구형 방막을 건설한 것과 각 부재들의 이음줄이 세로 면에서는 궁륭의 원심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궁륭 표면상에서는 정확하게 자오선을 따라 형성되도록 한 것은 신라의 석공들이 높은 구조역학적 지식을 갖고 석굴암을 축조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돌 부재가 중심축 방향으로는 주로 압축력만이 작용하게 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부재의 무게를 줄이게 하는 합리적인 구조로 불국사 청운⋅백운교 좌우의 석벽 구조에서도 멍에돌 공법이 사용되었다.
천장 덮개돌은 손잡이 없는 찻잔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상으로 연화문 지름 2.47미터, 높이 1미터, 바깥쪽 지름 3미터나 되는 크기로 무게가 자그마치 20톤이나 된다. 기중기로 들어 올려도 만만치 않은 무게의 커다란 덮개돌이지만 정확하게 반구형 돔을 시공했기 때문에 역학적 균형을 이루어 매우 튼튼하고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석굴암의 천장구조에 있어서는 아랫돌이 먼저 무너지지 않는 한 위의 돌이 따로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본존불이 이 돔 천장 밑 주실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다. 만약 천장을 구성하는 면석들이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진다 해도 쐐기돌 머리 부분의 홈이 위아래 돌들을 잡아줌으로써 본존불을 향해서 떨어지는 것을 막으면서 주실의 바깥쪽으로 떨어지도록 했다. 쐐기돌은 만약의 경우라도 본존을 보호한다는 절묘한 고안으로 한편으로는 돔 구조의 최하부로 전달하는 힘을 감소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본존을 보호하는 장치로서, 이런 쐐기돌은 세계에 그 유례를 볼 수 없다고 이성규 박사는 설명했다.
일반인들이 혼동하는 상식 이야기. ‘천장’과 ‘천정’의 차이점이다.
천정(天井)은 고급 집이나 법당과 같은 건물에서 반자 즉 방이나 마루의 천장을 평평하게 만든 시설에 우물 정(井)자형의 바둑판 반자틀을 만들어 설치한 것을 말하며 천장(天障)은 서까래가 다 드러나 보이도록 꾸민 것이다. 석굴암의 경우 당연히 천장이다.
경주의 석굴암은 해발 500여 미터나 되는 토함산 중턱에 자리하고 거기에다 멀리 동해 바다를 조망하고 있으므로 건물 구조체로서는 다소 불리한 지형에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곳은 해풍(海風)과 골바람은 물론 안개와 눈비, 그로 인한 습기, 이에 더해 동절기 동파의 위협에 상시 노출되기 마련이다. 토함산 일대의 경우 강우 일수가 134일, 강설일수가 40일에다 안개 일수는 123일, 결빙일수는 110일에 달할 정도로 습기가 많은 지역이다.
당연히 신라의 기술자들은 이런 지리적 기상 악조건을 해결하기 위해 특이한 주실의 지붕 처리 방식을 채택했다. 우선 주실 돔 지붕은 모두 108개가 되는 석재를 이용했다. 108번뇌가 대표하듯 짙은 불교적 색채가 묻어나는 구조인 셈이다.
<김대성의 꿈에 나타난 선녀>
『삼국유사』에는 ‘본존불을 조각하기 직전에 석굴 천장의 돌 덮개를 만들던 중 갑자기 돌이 세 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김대성이 분을 이기지 못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천신이 내려와서 덮개를 다 완성시켜 주고 돌아갔다. 꿈을 깬 대성이 나가서 석굴암을 보니 꿈에 본대로 덮개석이 원위치에 올려져 있었다. 김대성은 감동하여 남쪽 고개로 달려가서 천신께 제사를 지냈고 그곳을 향령(香嶺)이라고 부른다’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석굴 천장 중앙의 돌 덮개는 세 조각으로 깨어져 있다. 이를 두고 유홍준 교수는 김대성이 잠든 틈을 타 석공들이 완성시켜 놓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나는 김대성이 잠든 틈을 타 석공들이 완성시켜놓았다고 해석하고 싶다. 그들은 20개의 쐐기돌을 박아 천장덮개돌을 얹은 것이다. 그것은 지루한 공사를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던 석공들의 욕망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무게 20톤이나 되는 2.5×3×1미터의 돌을 채석해서 복판연꽃을 새긴다는 일 자체가 한심스러웠을 것이다. 일이란 마무리단계에 오면 더욱 그런 법이다. 생각해 보아라, 25살에 이 공사를 시작한 석공은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것이 겨울날이었다면 또 어떠했을까 미루어 알 만하다. 석공들은 그들의 고집대로 또는 밑져야 본전인 셈으로 후딱 해치웠는데 김대성의 꿈에는 그들이 천신으로 현몽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유홍준 교수의 이와 같은 설명은 신라인들의 종교적 열정과 구원에 대한 믿음, 엄격한 주종 관계라는 사회적 조건을 무시한 ‘천박하기 짝이 없는 상상력’이라는 비평을 받았다. 우선 고대 사회에 있어서 20톤이라는 돌의 무게는 엄청난 것이다. 요즈음에는 일반 공사 현장에도 크레인이 있어서 20톤 정도를 움직이는 것이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1970년대 말까지도 10톤 정도의 무게를 현장에서 움직이는 데는 상당한 노력을 들여야 했다. 그 정도의 커다란 돌이라면 김대성이 잠자고 있을 때, 즉 하룻밤 사이에 얼렁뚱땅 제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불심이 돈독한 김대성이 어떤 이유로 깨진 덮개석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시공했을까? 그 이유를 추론하기 전에 우선 석굴암에 사용된 석재의 산지가 어디인지가 큰 의문점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신라가 총력을 기우린 석굴암이므로 재료 역시 신라에서 최상질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 말은 현재는 고갈되어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백제 지방인 전라북도 황등석급이 격이 맞는다는 뜻이다. 황등석 정도가 되어야 석굴암의 재료로 적정하다는 것이다. 사실 상질의 석재가 경상도 지역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므로 이 사실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본존불일 경우 황등석을 사용했다면 거의 30톤 정도나 되는 원석을 어떻게 옮겨갔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백제에서 신라까지의 길고 험준한 도로로 거대한 석재들을 끌고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때 커다란 돌이지만 뱃길로 옮기는 것은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삼국이 통일되기 전에도 신라에서 불사를 일으킬 때 많은 백제 사람이 기술자로 갔으므로 석굴암을 건조할 때 황등에서 일하던 석공들이 작업을 했다면 백제 땅 황등에서 거대한 석재를 갖고 갔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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