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에 이휘소는 그의 지도교수 클라인과 자발적인 대칭성의 부서짐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소립자의 질량의 존재를 규명하는 힉스 메커니즘이 등장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소립자들은 게이지 입자(빛알, 글루온 등)라 불리는 입자들을 공유하면서 상호작용을 하는데, 이때까지 확립된 게이지 이론만으로는 자연스럽게 질량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었다. 국소 게이지 대칭성을 갖는 라그랑지 안에는 게이지 보존의 질량항이 없으므로, 설령 사람의 손으로 끼워 넣는다고 해도 그것은 국소 게이지 변환에 대해 불변성을 갖지 않아 국소 게이지 대칭성을 위반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게이지 보존은 질량이 없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편 난부 요이치로와 제프리 골드스톤 박사 등은 ‘반드시 대칭적인 상태만이 가장 안정적이지는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대칭적인 상태보다도 더 안정적인 상태가 있을 수 있고, 만약 그렇다면 자연계는 스스로 대칭을 깨서라도 더 안정적인 상태가 되는 쪽을 선택한다’는 자발적인 대칭성의 부서짐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골드스톤의 정리에 의하면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이론에는 반드시 무질량 입자가 존재하며 그러한 입자를 ‘골드스톤 보손’이라 정의한다.
이휘소와 클라인 박사는 대칭성의 자발적인 부서짐의 예로서 당시 유명했던 초전도체를 하나씩 비교해가며 무엇이 골드스톤 보손이 될 수 있는지를 논하고, 결국 무질량 입자로서 추가적인 스푸리온(Spurion)의 존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 논문이 쓰여 질 당시에는 힉스 보손의 존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논문은 힉스 메커니즘과 같은 이론의 등장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이휘소가 1960년대 당대의 물리학계에서 파격적인 대우로 각 대학교의 중진으로 성장하지만 이휘소의 진면목은 1970년부터 더욱 발휘되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1960년대에 이휘소는 젊은 연구자로서 무시못할 명성과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이를 업그레이드 시킨 중요한 학문적 성과는 모두 1970년대부터 나타난다. 이 말은 일부에서 이휘소가 1960년대에 이미 노벨상을 받아야했다 라는 말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1965년 가을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양전닝이 이휘소를 찾아왔다. 양전닝은 1957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거물로 뉴욕 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의 아인슈타인 석좌교수(Albert Einstein Professorship of Physics)로 옮겨가면서 이휘소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유한 것이다. 이휘소는 그의 청을 승낙하고 1966년 5월 16일에 뉴욕 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에 방문 교수로 초청되었고 9월부터 양전닝 이론물리학 연구소의 정교수로 부임하였다.
뉴욕 주립대학교에 노벨상 수상자인 양전닝 박사와 이휘소가 있다고 알려지자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는데 특히 한국 유학생과 중국 유학생들이 많았다. 이 당시 이 박사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이 상당수 한국에 들어와 물리학에 큰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이휘소는 전 세계를 상대로 소립자 이론에 대해 특별 강의를 했는데 1971년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겔만 교수가 그를 초청했다. 1969년 소립자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겔만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천재로 15살 때 미국의 명문 예일대학에 입학하여 21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박사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겔만, 파인먼, 마이어 등 세계적인 물리학자들과 함께 연구했는데 이들 모두 노벨상을 받은 그야말로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자들로 이 자체만으로도 이휘소가 노벨상 수상자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을 뜻한다.
1967년 11월, 스티븐 와인버그가 약한 상호 작용에 관한 설명을 시도하였다. 약한 상호 작용은 자연계의 네 가지 상호 작용 중 하나인데, 이러한 네 가지 상호 작용들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빛알, 글루온 등 게이지 보존들이다. 이들은 모두 게이지 대칭성 아래에서 존재하고 있는데 이 대칭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일단 게이지 보존의 질량이 ‘0’이어야 한다. 그러나 약한 상호 작용을 중개하는 위크 보존이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이들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와인버그 박사는 게이지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진다는 것을 전제로 게이지 입자의 질량을 설명하려고 했다. 당시 와인버그 박사가 이들을 설명하는 모든 계산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주장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휘소는 1968년 미국시민권을 받았고, 1969년 프랑스 파리 제11대학교에서 세미나를 갖기도 하고, 프랑스 고등연구실습원에서 자유롭게 연구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지는 현상과 그에 의한 난부-골드스톤 보손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겔만과 모리스 레비(Maurice Lévy)가 1969년 자발 대칭 깨짐을 논할 때 장난감 모형으로서 대표적으로 애용되고 있는 시그마 모형을 제시했다. 이런 가운데 당시 네덜란드의 대학원생이던 헤라르뒤스 엇호프트가 힉스 메커니즘을 양-밀스 이론에 적용하여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국소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지는 모형을 연구했다. 그의 연구는 이휘소 박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엇호프트는 1970년 프랑스령 코르시카의 카르제스 여름학교에서 이휘소의 강의를 듣고 학위 논문 주제였던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에 대해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마침내 이에 성공했다고 인정했다.
1971년 전반기에 이휘소는 머리 겔만의 초청으로 로스앤젤레스 근처 패서디나에 있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의 교환 교수로 5개월간 재직하였다. 이후 시카고 대학의 정교수겸 페르미연구소 이론 물리학부장(Head of the theoretical physics department)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 해 9월부터 1975년 8월까지 브룩헤븐 국립연구소 고에너지 자문 위원을 맡았다. 봉급은 페르미 연구소에서 받고, 시카고 대학교에서는 일종의 아르바이트로 일하기로 했는데 이휘소만 원한다면 언제든 전임교수가 될 수도 있었다. 이 기간 동안인 1972년 이휘소는 「재규격화가 가능한 질량이 있는 벡터 중간자 이론」이란 논문을 발표하여 전성기를 맞는다. 이 논문이 바로 ‘게이지’라는 이론의 시대를 여는 단초가 되었다.
이 박사는 게이지 대칭이라는 이론을 이용해 자연계의 네 가지 상호작용 가운데 전기적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작용을 통합해 기술하려는 전기약작용 이론에서 문제가 되었던 재규격화의 해결책을 제시해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확립했다. 그가 사망한 뒤 게이지이론은 표준이론이 되어 ‘전기’와 ‘자기’ 현상을 통합 설명하는 맥스웰 이론에 버금가는 물리학 이론으로 자리를 굳힌다.
또한 1974년 6월부터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의 과학정책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았는데 임기는 1978년 8월까지였다. 당시 이휘소 박사가 받은 여러 가지 직책은 미국에서도 매우 파격적인 것이다.
당시 페르미 연구소는 지름 2킬로미터가 넘는 소립자 가속기를 갖춘 세계 최고의 소립자 연구소였다. 에너지를 이용하는 입자가속기를 사용하면 새롭게 등장한 이론을 검증하거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입자를 탐색할 수 있다. 지금도 이 연구소는 유럽의 핵물리학공동연구소(CERN), 일본 쓰쿠바의 트리스탄 가속기연구소, 스탠포드 대학의 선형가속기연구소, 로렌스-리버모어 연구소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소립자물리학 연구소다.
이는 사실상 이휘소가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페르미 연구소의 직원은 1,000명이나 되는데 이곳에서 실험하려면 반드시 이론 물리부장의 승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막강한 위치에 있는 만큼 매우 바쁜 일정을 소화시켜야 했는데 이휘소는 바쁜 시간을 쪼개 탁월한 업적을 이룩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겔만이 주장한 쿼크 이론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계산을 해낸 것이다. 겔만이 쿼크를 제안한 후 하버드 대학의 글래쇼는 보통 물질은 주성분인 업 쿼크와 다운 쿼크 외에 ‘c쿼크’라는 전혀 다른 성분의 쿼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당시까지 해결할 수 없었던 여러 문제를 납득되도록 풀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복잡한 질량을 계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휘소가 이에 성공한 것이다. 소립자는 베타 붕괴와 함께 그 전하를 바꾸게 되는데,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베타 붕괴를 하고 나서도 전하가 변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를 중성 보존류라 한다. 하지만 연구 결과 기묘도를 가진 입자가 베타 붕괴를 하면 언제나 중성 보존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셸던 글래쇼, 이오아니스 일리오풀로스, 루차노 마이아니는 1970년, 맵시(charming) 쿼크(혹은 참쿼크)라는 또 다른 쿼크의 존재를 가정하여 이를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휘소가 1974년 여름에 메리 게일러드(Mary K. Gaillard), 조너선 로즈너와 함께 「참쿼크를 찾아서」라는 프리프린트 논문에서 J/ψ(제이/프사이) 중간자와 맵시 쿼크가 존재한다면 그가 가질 수 있는 질량 범위를 예측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논문이 저널에 실리기 전인 1974년 11월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의 버튼 리히터와 브룩헤븐 국립연구소의 새뮤얼 차오 충 팅 박사가 맵시 쿼크와 그 반쿼크가 결합해서 이루어진 제이/프사이 중간자를 발견하여 맵시 쿼크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휘소가 논문을 저널에 기고하면서 프리프린트를 공개했기 때문이다. 버튼 리히터와 새뮤얼 차오 충 팅 박사는 이휘소 박사의 프리프린터를 읽고 맵시 쿼크를 탐색하여 성공했고 두 사람은 공동으로 1976년 노벨상을 받았다.
버튼 리히터와 새뮤얼 차오 충 팅 박사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는데 이들의 탐색이 가능하도록 이론을 제기한 이휘소 박사도 노벨상을 받아야하지 않았느냐는 주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휘소가 사망한지 2년 후에도 이휘소 박사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사망한 지 2년 후인 1979년 노벨상을 수상한 파키스탄 출신 물리학자 살람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휘소 박사의 정확하고 믿을 수 있는 질량 계산이 없었으면, 우리가 c쿼크를 이렇게 빨리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은 지금도 소립자물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고전으로 알려진다. 특히 수상 당시 살람은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는 수상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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