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포장?>
이휘소는 미국에서 그야말로 바쁘게 지내면서 연구에 몰두했고 특히 ‘힉스’ 입자를 주력 연구로 삼았다. 힉스는 원자핵 속에 있는 강력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1976년 지미 카터가 미국 대통령이 되자 한국과 미국의 상황은 그야말로 한 치도 모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카터는 박정희를 독재자라 비난하며 주한 미군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박정희는 국산 미사일을 개발하고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하기 시작했고 해외유치과학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이휘소에게도 편지를 보내 핵무기 개발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이휘소는 박정희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 동안 수행하고 있던 소립자 물리학 연구에 더욱 몰두했다.
그런데 이휘소는 1977년 6월 16일 일리노이 주 케와니(Kewanee, Illinois) 근방의 고속도로(Interstate 80) 상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당시 그는 페르미 연구소의 여름 연구 심의회에 참가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콜로라도 주 아스펜(Aspen, Colorado)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과학과 기술> 1994년 1월호에 실린 「내가 아는 고 이휘소 박사」라는 강경식 교수의 특별기고문에는 당시 이휘소의 비서가 사고 직후 강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한 사고 당시 상황이 실려 있다. 이휘소는 1977년 6월 16일 12시가 되기 전에 가족들을 태우고 콜로라도 주 아스펜 시로 출발했고, 그로부터 약 1시간 30분 간 일리노이 주 내의 고속도로 I-80의 아이오와 주 경계로부터 약 30마일 떨어진 지점까지 정규속도 55마일로 운전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오후 1시 22분 경, 건너편 내부 고속도로선을 동쪽으로 달리던 대형 트레일러의 타이어가 터지면서 중심을 잃어 조정을 못하고 중앙 분리 지역을 넘어와 서쪽으로 달리고 있던 이휘소의 차량의 운전석을 덮쳤다.
<뉴욕타임스>지도 1977년 6월 18일 이휘소 일가가 탄 차량의 대향 차선에서 달려오던 트럭의 타이어에 펑크가 났고, 트럭이 고속도로 중앙의 중앙분리대를 미끄러져 가다가 오후 1시 22분경에 마주 오던 이휘소 일가의 승용차와 충돌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사고로 이휘소는 중상을 입었고 가족들은 경상을 입었는데, 경찰이 의식을 잃은 이휘소를 병원으로 옮겼으나 곧바로 숨지고 말았다.
KBS의 취재로 발견된 일리노이 주 경찰서에 보관돼 있는 당시 사고 기록에 의하면 이휘소의 차량은 1975년형 닷지 다트로 폭이 약 20미터인 잔디밭 중앙분리지대를 가로질러온 36톤급 탱크 트럭과 충돌하였다. 당시 가해 트럭운전사 존 L. 루이스는 트럭에서 큰 소리가 나더니, 트럭이 오른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왼쪽으로 꺾였다고 진술했는데 대덕대학 자동차학부 이호근 교수는 그 큰 소리의 원인을 타이어의 펑크라고 추측하였다. 타이어의 펑크는 대형 트레일러와 같은 경우 위험성이 더욱 커지고,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은 당황하면서 핸들을 과격하게 조작하거나 특히 급브레이크를 밟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차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다. 또한 사고 기록에는 트럭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직각으로 꺾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 상황에서 트럭이 20미터를 미끄러져 대향 차선을 침범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스팔트나 시멘트 도로에서의 마찰 계수는 제어가 가능하지만, 잔디 위에 올라타게 되면 거의 스케이트 타듯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한번 미끄러지면 그 상황에서는 방향 전환 등이 절대 불가능하고 진행 방향으로 곧게 나간다고 봐야 한다.’
노벨상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이휘소의 죽음은 한국인들에게 그야말로 큰 충격을 주었다. 한마디로 그의 죽음으로 한국이 노벨과학상 수상국의 대열에 낄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렸다는 것이다. 가장 많은 의문은 한국이 핵폭탄을 개발하겠다고 천명한 상태에서 이휘소가 이에 동조할 것을 우려한 미국이 이휘소의 사망에 관련 했을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조선일보> 1977년 7월 4일 기사에서도 알 수 있다.
‘20일 전 미국에서 우리 물리학의 거두인 벤자민 리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후 상세한 보도가 없다. 플로리다주의 과학회의에 가던 길에 일리노이주 남부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페르미연구소의 말만 보도되었다. 며칠전 국회에서 ’단순한 교통사고냐‘는 질문이 아침내 나왔다. 1968년 미국 시민이 되었으나 4년 전 고국을 다녀간 뒤부터 ’이제부터는 조국을 위해 일할 때‘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였으며 그가 내년 4월 귀국할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중략) 소립자 이론이라지만 그것은 최근 연구가 진척중이고 핵물리학 관리쯤은 이미 마스터한지 오래라는 것, 순수 이론물리학자였던 미국의 오펜하이머가 사실상 2차 세계대전 중 원폭 제조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는 쉽게 알 수 있다. 재미 250명 과학자들을 위해서도 우발사고인지 분명해져야 한다.’
이휘소의 사망 소식이 보도된 이후 그의 죽음을 둘러싼 소문이 한국에 무성했다. 1970년대 후반 박정희가 독자적인 핵무기개발을 선언했고 미국 정부는 이를 중지시키려고 여러 경로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박동선사건과 청와대도청사건 등으로 양국 정부는 감정적인 대립으로까지 발전해 있었다. 이런 시기에 미국에서 활약하던 한국인 물리학자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고 그 경위가 자세하게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갖은 억측이 난무한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원폭제조를 총지휘했던 핵물리학자 페르미를 기념해 만든 페르미연구소의 이론물리학부장이었다. 그가 해외과학자들의 국내유치계획에 따라 귀국할 것이라는 말도 있었으므로 이휘소가 귀국하면 한국의 핵무기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고 이를 우려한 미국 측이 의도적으로 그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그의 사후 소설가 김진명에 의하여 그의 생애를 주제로 한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당시 민주화 운동과 맞물린 사회 변화에 미묘하게 대응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화제작이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허구이지만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의 죽음과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향수등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한국의 핵개발을 둘러싼 국제적인 갈등을 서사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소설 속의 화자는 기자의 입장에서 역사적 과거 속의 거대한 정치적 스캔들을 서사의 전면에 배치한다. 한국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 이용후는 미국에서 자신의 연구 업적을 통해 노벨상에 근접할 정도로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예와 보장된 영화를 버리고 한국으로 귀국하여 대통령의 명에 따라 핵 개발에 착수한다. 한국의 군사력과 국가적 위상을 뒤바꿀 수 있는 지하 핵실험이 계획되고, 한반도의 핵개발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던 미국은 최후의 수단을 준비한다.’
결국 성공을 눈앞에 둔 순간 이용후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며 막강한 권력을 잡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구축하기 위해 핵개발의 의욕을 키웠던 대통령마저 수하의 정보부장 손에 죽음을 당하게 된다. 냉전시대 논리에 따라 한국이 독자적인 핵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한 대통령과 그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연구 개발을 주도하게 된 핵물리학자의 만남은 미국이라는 거대 군사력의 방해공작에 직면한다는 설명인데 이 문제는 많은 화제를 불러모았다.
이휘소의 미망인 등 유족들은 소설에서 이휘소 박사의 일기, 편지 등을 무단 전제하거나 인용하여 저작권과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었고, 이휘소 박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음에도 소설에서 대한민국의 핵개발과 관련하여 미국의 정보기관에 의한 공작에 의하여 살해된 것으로 묘사하여 고인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점을 이유로 소설의 출판 및 판매 금지 등 가처분 신청했다. 그러나 법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박정희시대 상황 묘사 부분은 객관적 사실을 인용한 것일뿐 표절이라 볼 수 없으며 공석하의 책을 인용한 부분은 출전을 밝힌데다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는 주장은 인정하기 어렵다.’
공석하도 이휘소에 관한 소설을 섰다. 『핵물리학자 이휘소』라는 책에서 박대통령이 수차례 이휘소에게 친서를 보내 핵무기개발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이휘소는 이를 받아들어 1977년 5월 일본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다리뼈 속에 마이크로 필름을 숨겨 한국정부 측에 전달했다라고 적었다. 특히 이휘소의 죽음은 사고사가 아니라 이를 눈치 챈 미국 측이 사고를 위장해 주도면밀하게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공석하가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소설을 쓴 것이라고 말하여 일단락되었다.
이휘소 박사의 사망이 일파만파로 퍼지자 의도적으로 펑크를 내어 이휘소의 차를 덮칠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KBS 취재진과 이호근 교수 팀이 수차례에 걸쳐 의도적인 펑크 실험을 했는데 펑크 직후의 차의 궤적은 일정하지 않았다. 이 실험 결과를 토대로 이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고속도로 중앙에 완충 지대가 노면 재질이 다른 잔디로 되어 있고, 또 대향차선에서 오는 차량의 속도도 불명확하고, 또 어느 차선으로 올지도 불명확하며(80번 주간 고속도로는 당시 왕복 4차선), 또 트럭 자신이 차선을 이탈해서 중앙분리대를 넘어가는 상황에서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을 지 차선을 변경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제 불능 상태로 대향 차선의 자동차를 의도적으로 가격해서 충돌시킨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휘소의 또 다른 논제는 그가 미국측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정도로 한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정말 관심이 있었느냐이다. 그러나 일반의 생각과는 달리 이휘소가 생전에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관심을 기우리지 않았고 특히 인간이 개발한 무기가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과학은 인류 복지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이휘소 생활 전후를 살펴보면 이휘소가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다는 주장은 그의 숭고한 뜻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시각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휘소는 1977년 10월에 국민훈장 동백장에 추서됐으며 그의 유해는 시카고 교외의 글린 알렌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APCTP)에서는 지난 2012년부터 이론물리학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남긴 이휘소 박사를 추모하기 위해 ‘벤자민리 석좌교수’ 프로그램을 매년 열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이휘소 박사의 이름을 딴 유일한 국내 학술기념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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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케스트 운영 채널 ***
참고문헌 :
「비운의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김학진, 과학동아, 1991년 06월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강주상, 신동아, 1993년 12월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네이버지식백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한국이 낳고 세계에서 활약한 뛰어난 과학자들」, Science and Academy Today
, 한국과학기술한림원, 2015.10.22.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C%98%EC%86%8C
http://www.kast.or.kr/HALL/
https://namu.wiki/w/%EB%B2%A4%EC%9E%90%EB%AF%BC%20%ED%9C%98%EC%86%8C%20%EB%A6%AC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박성래, 교보문고, 1997
『우리 과학 100년』, 박성래, 현암사, 2003
『한국의 과학 천재들』, 이종호, Book Sta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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