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1809〜1865)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그의 별명은 ‘정직한 에이브(Honest Abe), 장작패는 사람(The Railsplitter), 위대한 해방자(The Great Emancipator) 등으로 불린다.
남북전쟁에서 승리해 미합중국을 보존하고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미국의 여러 영웅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인물로 그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찬양일색이다.
사실 링컨의 모습은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자상하고 친절한 아저씨의 모습이다.
매우 인간적이고 따뜻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연방의 구원자, 노예 해방자로서의 역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구구절절 설명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켄터키의 가난한 오두막집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공부한 후, 신세계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인물로서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사람이다.
특히 링컨은 민주주의를 대변한 웅변가로서 끊임없는 존경을 받아왔다.
그의 아이콘이라고도 볼 수 있는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이란 짤막한 명제는 남북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은 게티스버그에서 발언한 것으로 민주주의의 원칙을 천명한 민주주의자로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러므로 링컨은 전 세계의 어느 사람보다도 더 많은 책의 소재가 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토머스 J. 딜로렌조에 의하면 무려 16,000권의 책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링컨을 심층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그의 놀라운 진면목을 알려준다.
특히 딜로렌조 박사는 링컨을 다룬 책의 대부분이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링컨이 미국에서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했지만 실은 그가 인종주의자였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노예제를 없애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던 전쟁까지 벌였던 사람이 실은 인종주의자였다는 뜻이다.
이 문제는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된 사항이다.
사실 링컨이 1863년, 정초에 발표한 노예해방선언문도 미국 전역의 노예를 해방시킨다는 내용은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은 링컨의 노예해방 조치는 처음에는 남부 주에 있는 노예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었다고 설명한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것은 처음 북군에게 불리하던 전환이 유리하게 돌아가자 노예해방 조치를 미국 전역에 확대하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라는 뜻이다. 즉 그의 노예해방 선언은 노예제나 흑인에 대해 링컨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노예해방조치가 남북전쟁 막바지에 북군에 결정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확대 시행한다고 발표했는데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링컨이 민주주의적 가치를 존중하고, 이를 수호한 인물이 아니라는 반론은 그동안 수없이 제기되었다. 그가 남북전쟁 중 취한 조치들로만 보면 그런 지적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전쟁기간 중, 링컨은 링컨에게 부정적인 메릴랜드주의 언론을 탄압하고 폐간했다. 한마디로 언론의 자유를 크게 침해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그가 의회의 승인없이 남부 연합에 대한 봉쇄조치를 내렸다는 것도 지적사항이다. 또한 기소나 고발없이 사람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 제도를 정지시켰다. 당대 이 조처는 오직 의회만 할 수 있었음에도 링컨은 이것을 의회의 동의 없이 시행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의회의 동의없이 정부 예산을 집행했고 남부 연합에 동조하는 18,000여 명을 재판없이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는 지적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3명의 대통령 모두 정직이라는 미덕과 관련이 있다.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꼽히는 조지 워싱턴과 링컨은 아예 정직함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네 번이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오랫동안 대통령 직에 있었던 루스벨트도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별성이 재임기간 중에 스캔들이 전혀 없었던 대통령이었다.
반면에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책임을 지고 중도에서 사퇴하는 불명예를 섰고 클린턴은 섹스 스캔들에 휘말려 그의 재직 중에 수많은 곤욕을 치렀다. 따라서 정치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정직은 유용한 무기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정직한 대통령으로 알려진 링컨이 알려진 바와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정직했을까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예상외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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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의 생애>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1637년 잉글랜드에서 매사추세츠 주로 이민 온 직공(織工)인데 선조들보다 훨씬 가난한 편이었으나 억센 개척민으로 알려진다.
그는 1806년 6월 낸시 행크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굽은 어깨와 야윈 가슴에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켄터키의 호젠빌에서 남쪽으로 4.8㎞ 떨어진 외딴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링컨 위로는 새러, 동생으로 토머스가 태어났는데 토머스는 어릴 때 죽었다.
링컨이 2살 때 그의 가족은 이웃마을인 노브크리크에 있는 한 농장으로 이사했다.
그런데 1816년 12월 링컨 가족의 켄터키 농장이 소송에 걸리게 되자 토머스는 가족들을 이끌고 인디애나 주의 남서부로 이사를 갔다. 이곳에서 링컨 가족은 엉성한 통나무 구조물즉 유명한 통나무집에서 출발했지만 아버지는 사업 수완이 좋아 승승장구하면서 집 주위의 땅을 계속 사들였다.
링컨의 나이 9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나 아버지는 2년 후 재혼했다. 토마스 링컨의 2번째 아내 새러 부시 존스턴 링컨은 딸 둘과 아들 하나가 딸린 과부로 토머스 링컨과 결혼한 후 링컨을 포함한 아이들을 모두 친자식처럼 대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에이브러햄을 귀여워해 그는 후일 그녀를 ‘천사 엄마’라 불렀을 정도다.
새러는 링컨에게 책 읽는 습관을 붙여주었는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부모가 거의 문맹(文盲)이었고, 링컨 자신도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는데 결국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이다. 후에 이웃들의 말로는 링컨이 책 한 권을 빌리기 위해 수㎞를 걸어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링컨 자신이 ‘어린 시절에 배움을 자극하는 것이 전무했다’고 말한 것을 볼 때 링컨이 어릴 때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그가 읽을 수 있는 책을 여러 번 통독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1830년 링컨 가족은 일리노이 주로 2번째 이사를 했는데 그때 링컨의 나이는 장년인 21살이다. 일리노이에 도착하자 아버지의 새로운 농장을 관리하는 한편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댔다. 젊은 시절 깡마르지만 막노동을 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힘이 셌다고 한다. 특히 그의 엄청난 도끼질로 나무를 패는 실력은 전설아닌 전설로 유명하다. 여하튼 그는 집에서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알기 위해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항해하기도 했는데 종착점은 변호사였다. 놀랍게도 학력이 전무한 링컨은 독학으로 법률책을 파고들어 1836년 법률 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여기서 설명될 것은 링컨이 무학자라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큰 약점도 아니었고 드문 일도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미국의 평균 학력은 무학이 대부분이었고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초등학교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업도 변호사 사무소에서 약간 일했다는 경력을 갖고 개업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여하튼 변호사 시장에 뛰어든 링컨은 곧바로 뉴셀럼보다 수입이 좋은 일리노이 주의 스프링필드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그는 존 T. 스튜어트 이어서 스티븐 T. 로건과 동업했고, 1844년부터는 윌리엄 H. 헌던과 같이 일했다.
그의 재주는 뛰어나 그 당시 매년 주지사나 순회판사의 연봉보다 많은 1,200〜1,500달러의 돈을 벌었다고 한다. 또한 스프링필드에서의 변호사 일 뿐만 아니라 순회법정이 열리는 곳을 따라다녔다.
특히 1850년부터 서부에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하면서 링컨은 세계 최대의 철도회사로 성장하는 일리노이 센트럴 철도회사를 위해서 일했으며 은행․보험회사․금융회사의 소송을 비롯해 특허신청이나 형사소송도 담당했다.
법조계에 들어온지 20년쯤 되어서는 정치에 관련된 사건의 변론에도 두각을 나타내 일리노이 주에서 가장 저명하고 성공적인 변호사 대열에 올랐다. 링컨은 치밀함과 현실적인 상식을 갖추어 항상 소송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정직하고 어떤 경우든 공정성을 잃지 않는 것으로 정평을 얻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링컨은 매우 현실적인 변호사로 알려진다.
1837년부터 1860년까지 수천 건의 사건을 수임하여 처리했는데 알려지기로는 링컨은 주로 돈 되는 사건만 맡았고 23년간의 변호사 생활에서 노예 소유주를 변호한 적은 있지만 도망친 노예를 변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링컨에 정통한 학자들은 그를 둘러싼 몇 가지 신화에 제동을 건다. 제일 먼저 제기되는 것은 링컨에 항상 따라다니는 것으로 링컨이 엄청난 흑수저로 태어나 결국 대통령까지 된 의지의 사나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전적으로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우선 링컨의 아버지가 지역에서 3번째 고액 납세자였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통나무집에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지만 링컨이 째지게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링컨의 아버지는 원래 켄터키 주에서 15번째 가는 부농이었으나 링컨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3번의 파산을 경험한 후 인디애나 주로 건너왔다.
이 말은 링컨이 원래 금수저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파산하여 처음 매우 어려운 시절이 있었던 적은 있으나 아버지가 곧바로 재기하여 그는 크게 어려움이 없이 자랐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흑수저가 아니었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다소 예외적이라 볼 수 있다. 아버지가 만만치 않은 자산을 갖고 있었지만 미국 전체로 보면 대통령이 될 만큼 부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대단한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조롱하기도 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한 명문 출신 상원의원이 ‘내가 지금 신은 구두도 토머스 링컨이 만든 것인데 그 아들이 대통령이 되다니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며 대놓고 링컨을 조롱했다. 그런데 링컨이 오히려 고맙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의원님. 제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략) 저도 구두를 조금은 다룰 줄 아니까 혹시 구두에 문제가 생기면 저에게 가져오십시오. 다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어깨너머로 배운 거니까요. 저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링컨이 상당한 유머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링컨이 무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유머에 자질을 보인 것은 아버지와 재혼한 새라 때문으로 인식한다.
그녀는 책을 좋아하던 링컨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지원했으며 아버지가 농장일을 강요할 때도 링컨을 지지하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링컨은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지만 풍부한 독서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는데 그녀는 유머 감각이 풍부하여 링컨과 곧잘 농담과 장난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링컨이 정치계에서 보인 유머 감각은 대부분 새라로부터 전해졌다는 것이다.
여하튼 링컨이 적어도 흑수저는 아니지만 흑수저라고 이야기되는 것은 대통령을 가난뱅이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오랜 전통이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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