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25

중국의 자존심(5), 진시황제(5)

youtu.be/EVhnKkQ_r0E 진시황제에게 폭군의 이미지를 듬뿍 안겨준 사건은 분서갱유(焚書坑儒)다. 본래 분서와 갱유는 서로 다른 사건이다. 분서는 잘 알려진 대로 시중에 나도는 불온서적을 모두 불태우게 한 것으로 진시황 33년(기원전 214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갱유는 유학자들을 산 채로 묻어 죽인 사건으로 진시황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진시황 35년에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중국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긴 했지만 합병을 당한 국가에는 시황제에게 원한과 적의를 품은 자가 적지않았다. 이에 따라 시황제는 방대한 중국 대륙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성문법을 만들었고, 법령에 따른 법 집행을 제도화했다. 이는 제자백가의..

중국의 자존심(4), 진시황제(4)

youtu.be/DNoPGiecVl8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즉시 관료행정기구와 군현제를 통해 중국의 정치적 실체를 바꾸기 위한 칼을 빼들었다. 그는 과거의 통치체제, 즉 제후국 제도를 타파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 이유는 통일된 중국에서 주나라와 같은 체제를 계속 유지하면 머지않아 또다시 분열될 것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전국을 군(郡)과 현(縣)으로 나눠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중앙집권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과거에 주 왕조가 중국 대륙을 통치했을 때 사용한 봉건 제도와는 그 근본이 달랐다. 기존에 실시되던 봉건제도는 국가의 수장인 왕이 중앙을 통치하되, 그 외의 부분은 쪼개어서 왕족이나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형식으로써 중앙 권력에 비해 지방 정권이 더욱 비대해 질 ..

중국의 자존심(3), 진시황제(3)

youtu.be/RNEAilSedmw 노애, 여불위가 사망하고 조 태후까지 허수아비가 되자 나이 22세의 정은 비로소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친정 체제를 굳힌다. 진시황제의 개인사에서 매우 특이한 것은 이상하게도 시황제의 황후나 후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이다. 당대에 후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알려지기는 진시황제의 자식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이런 서술이 있다. ‘선제의 후궁들 중, 자식이 없는 자를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 말은 진시황제에게 많은 후궁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들이 진시황제의 행보에 어떤 문제..

중국의 자존심(2), 진시황제(2)

youtu.be/_sJUd1id36A 사마천의 이야기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원래 진시황 정(政)의 아버지는 여불위이지만 진나라의 공자 자초(子楚)의 아들이 되어 결국 천하를 통일하는 진시황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자초의 자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초의 적통을 받았다는 뜻인데 사실 사마촌이 이렇게 적은 것은 진시황제를 매우 나쁜 사람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진시황제의 아버지인 자초의 이름은 이인(異人)으로 진 소왕(昭王)의 손자다. 진나라와 조나라가 장평(長平)에서 전투를 치렀는데 조나라가 참패하였고 진 소왕이 여세를 몰아 조나라 도읍 한단(邯鄲)을 공격했다. 그러나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자 조나라와 일시 타협한다. 전국시대에 제후국 간에 결맹을 맺을 때에는 인질을 파견했는데 관례대로 진 소왕은 손..

중국의 자존심(1), 진시황제(1)

youtu.be/IFzcU4npdZA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은 진시황제를 로마의 네로 황제와 마찬가지로 폭군 중 폭군으로 인식했다. 특히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진시황제의 잔혹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남았고, 20세기 최대의 고고학 발굴로 꼽히는 진시황릉과 우주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은 진시황제가 폭군임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로 거론되었다. 그런데 진시황제는 사망 이후 2,200여 년간 폭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혁명 때부터 본격적으로 재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가 중국을 통일해 중국인을 단합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 크게 부각된 것이다.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며 통일 중국을 지양하는 현재의 에서 제일 먼저 내세울 사람이 필요한데 그 덕목에 가장 적합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