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을 뒤로하고 불국사로 향한다.
1995년에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불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다.
불국사(佛國寺)는 이름이 말해 주듯 흔한 이름의 절이 아니다. 최치원은 불국사가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였다고 기록했는데 한때 화엄법류사(華嚴法流類寺)라고도 불렸다. 불국사는 이름 그대로 화엄사상에 입각한 불국세계를 표현한 사찰이다.
불국사는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나 이보다 오래 전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첫째는 눌지마립간(417~457) 시절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둘째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다음해인 법흥왕 15년(528),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기윤 부인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셋째는 문무왕 10년(670)에 불국사에 무설전을 짓고 의상대사와 제자 오진 등 열 사람의 대덕으로 화엄경을 강설했다고 한다. 신문왕 1년(681) 4월, 가섭과 아란 상이 조성되었다는 기록도 『복장기』에 나와 있다고 신영훈은 적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으로 김대성, 『삼국사기』에는 김대성이 석굴암은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는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창건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따라 다닌다.
‘대성이 장성하여 토함산에서 곰을 잡았는데 그 날 밤 꿈에 귀신으로 변한 곰에게 혼이 난 후에 곰을 위해 장수사를 지었다. 이로 인하여 본성이 감동하는 바가 있어 자비스런 바램이 더욱 두터워졌다. 이에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석굴암)을 창건하여 신림과 표훈 두 스님으로 하여금 각기 주지하게 했다.’
그러나 불국사는 751년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혜공왕 10년(774)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는데 정확한 완성의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상연 박사는 이종상(李鐘祥, 1799〜?)의 시 「등불국범영루」에는 ‘스님은 39년에 완성했다 하네’라는 구절이 보이는 것을 감안할 때 원성왕 6년(790)에 완공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불국사는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설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최치원도 그의 시에서 ‘왕이 주인이 되어 친히 이룩하시니’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왕실의 원찰로 조성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석굴암이 먼저 준공된 이후 불국사는 더욱 활발하게 건설이 진척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국사의 석축을 쌓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총 공사기간이 30년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절대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
불국사와 석굴암을 이해하려면 이 땅이 곧 불국토라고 믿었던 신라의 독특한 불교관을 이해해야 한다. 이들 건축은 당시의 시대 정신과 사회 경제적 배경에 대한 이해 속에서만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건축이 세워지기 전의 고대 사회에서는 현세의 삶이 죽어서까지 연속된다는 계세(繼世) 사상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 시종들을 순장해 데려가는 것도 현세에 누린 영화를 계속 누린다는 생각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세상사를 인과응보와 윤회사상으로 설정한다. 윤회 사상은 모든 신분의 인간 존재를 인정하면서 현생의 자신의 인(因)에 의해 내세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사상의 진보적인 측면은 모든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면과 신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다. 또한 이는 현세의 사회를 합리화할 수 있는 사상이기도 했다. 즉 불교가 이상으로 내세운 개인의 도덕은 현생에 덕을 쌓으면 부처님이 돌보아 내세에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처지에 맞게 불만을 가지지 말고 순종하면서 열심히 살면 결국 내세에서 복을 받으니 집권자들에게 감히 대항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와 다름아니다. 즉 대다수의 피지배자인 백성들이 받는 고통은 전생의 업보로 인한 것이니 참아야한다는 것이다. 특히 불국사와 석굴암이 만들어졌던 경덕왕 시기가 전체 신라 왕권의 전성기임과 동시에 붕괴기로 신분 질서가 이완되어 가던 때임을 상기하면 더욱 더 이해가 빠르다.
그런데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서처럼 왕실에서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후 민간신앙으로 이어지는 순서를 밟지 않았다. 즉 불교가 신라에 도입되는 초기에 불교를 수용하는데 다소의 저항과 반발이 있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윤회사상이 옳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바로 여기에서 대범한 아이디어가 태어난다. 불교가 원래 외래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신라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본래부터 불국(佛國)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성립된 불국토사상은 불교가 우리의 종교라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한다.
정병조 박사는 신라의 불국토사상은 당대에 전해지던 몇 가지 설화로서도 알 수 있다고 적었다.
첫째는 전불가람지(前佛伽藍地)에 대한 것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는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일곱 개 가람 터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가섭불이 설법했다는 황룡사다.
둘째는 진흥왕이 불상 조성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포구에 닿은 어떤 배에 철과 황금이 가득 있었는데 서축의 아육왕이 보낸 편지가 있었다. 그 내용은 석가삼존상을 만들려다 실패했으니 인연 있는 땅에 가서 성공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진흥왕은 아육왕의 기원대로 동왕 32년(573)에 아육왕이 보낸 재료로 장륙존상을 만들었다. 참고적으로 신라에서 만든 장륙존상은 5미터 높이의 불상으로 조선시대까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후의 행방이 묘연하다.
셋째는 의상대사의 낙산사 창건으로 의상은 입당구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동해변을 참배했다. 그러나 관음을 보지 못하자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이때 홍련(紅蓮)이 바다 속에서 피어나며 의상을 건지고 그 안에 나타난 관음보살이 수정염주를 주면서 의상의 높은 신심을 찬양했다. 의상대상은 낙산사를 창건하고 관음소상을 모셨다.
이들 설화는 불교가 신라 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는 전위적 역할을 담당한다. 즉 신라인들에게 신라 땅이 본래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불어넣으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불교에 귀의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국명도 불교성지의 이름을 써서 실라벌(實羅伐)이라 표기하면서 서라벌의 어원을 이룬다.
그러므로 불국사는 이 당시 신라가 불국토라는 것을 충실하게 알려주기 위해 건설된 사찰로 심오한 화엄사상을 가시적인 조형예술인 사원건축의 독창적이고 독특한 형태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라는 뜻이다.
불국사가 다소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입면도와 평면 구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종교적 상징 구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입면도에서 불국사는 크게 대웅전과 극락전 등의 목조건물과 이를 받치고 있는 석조구조로 나뉜다.
불국사를 전면에서 바라볼 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 당시에 건설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들은 임진왜란 전까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으며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복원 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극락전 뒤쪽에 법화전 터로 알려진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창건 당시의 불국사와 현재의 불국사 규모에는 차이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국사를 자세히 보면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무설전, 자하문, 청운교, 백운교, 범영루, 좌경루, 석가탑과 다보탑 등이 있는 넓은 구역과 그 옆에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비교적 좁은 구역이 있다. 또한 무설전 뒤로 비로전과 관음전이 있으며 앞의 두 구역과 달리 거대한 석조 구조물이 없어 구조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세 구역 중 넓은 구역은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1,072평)이며 다소 작은 규모의 구역은 『무량수경』에 의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473평)이며 무설전 뒤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 부처님의 연화장 세계다. 결국 불국사는 세 분의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있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석가가 상주하는 절대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가 아미타정토보다 훨씬 넓고 범영루ㆍ청운교ㆍ백운교 등 전면의 건물들이 앞쪽으로 돌출된 것은 아미타정토보다 석가정토를 의도적으로 강조했기 때문이다. 불국사의 전면을 전체적으로 보면 석가정토의 대웅전이 아미타정토의 극락전보다 한 층 높은 위치에 있다. 즉 아미타 정토를 단층, 석가정토를 중층으로 보이게 의도적으로 건축한 것인데 이는 석가정토를 강조하려 했기 때문이다. 특히 석가정토의 장대석ㆍ아치석ㆍ기둥석ㆍ난간석 등은 석조이지만 다듬어진 형태는 목조건축물을 번안하여 다듬어졌고 맞춤새도 목조처럼 짜 맞추었다. 석재를 다듬어 목재 건축을 짓듯이 짜 맞추어 건설한 건축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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