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소금강산>
큰 틀에서 형산강 좌측에서 우측으로 건너면 천년 고도 경주의 일곽이 된다. 남산지구를 포함하여 5구역으로 나뉘어진 유네스코세계유산인 경주역사유적지구의 본향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인데 경주 소금강산(북악)을 지나칠 수 없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굴불사터에 사면석불(보물 제121호)이 있고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이 있는 백률사가 있다. 소금강산이라는 이름 때문에 산세가 험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높이 280여 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소금강산은 신라 오악 중 하나로 이차돈의 순교 이후 붙여진 이름이다.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이차돈이 순교하는데 그의 목이 잘라지자 머리가 하늘 높이 솟았다가 떨어진 곳이 북악으로 그 자리에 세워진 사찰이 자추사(刺楸寺)인데 후에 백률사(栢栗寺)로 바뀐다.
굴불사터의 사면석불은 ‘동서남북 사방에 부처가 있다’는 뜻에서 조성된 것으로 남산의 칠불암, 안강 금융사터의 사방불과 함께 신라의 사방불 신앙을 알려준다. 굴불사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가 있다.
‘신라 35대 경덕왕이 백률사에 나들이 하는데 땅속에서 어느 스님의 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왕은 신하에 명하여 그곳을 파보게 했더니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나왔다. 경덕왕은 이곳에 굴불사라는 사찰을 지었다.’
굴불사란 석불을 파내었다는 뜻으로 명명한 것이다. 사방불 사면에 어떤 부처를 모시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신라에서는 대체로 서쪽에 서방극락정토를 주석하는 아미타불, 동쪽에 동방유리광 세계를 주재하는 약사여래, 남쪽에 현세의 사람으로 태어나 부처가 된 석가모니불, 북쪽에 56억 7천만 년 후에 세상에 나타나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모셨다. 이곳 사면석불도 이와 같은 배치를 따르고 있다. 서쪽이 정면인데 아미타불과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조각되었으며 동쪽에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가 있다. 동서쪽에 조각된 부처는 확실하지만 남ㆍ북쪽의 부처는 마모가 심해 분간이 어렵다.
서쪽의 아미타불은 높이 3.9미터로 다른 불상들보다 큰데 머리는 별개의 돌로 둥글게 조각하였지만 오른손을 사라졌다. 양쪽의 협시보살은 높이 1.95미터로 모두 독립된 돌로 조각하였는데 오른쪽 대세지보살의 머리 부분은 파괴되었고 왼쪽 관세음보살은 반쪽 다리에 무게중심을 잡은 삼굴(三屈) 자세이다. 삼굴 자세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다. 동쪽의 약사여래상을 결가부좌(結跏趺坐,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에 놓고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놓는 앉음법)하였고 왼손에 약합을 들었다.
남쪽의 두 보살상과 불상은 돋을 새김으로 조각된 몸체의 굴곡 표현이나 옷주름 등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불상의 광배는 1.6미터 정도 되는 주형(舟形) 신광(身光, 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이다. 두광(頭光,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에는 연꽃무늬, 빗살무늬, 당초무늬가 차례로 새겨져 있으며 이 주위로 불꽃무늬가 둘러져 있다.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북쪽의 보살입상은 높이 틀어 올린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손을 든 자세나 천의를 두른 모습이 남쪽의 보살과 비슷하나 보존 상태는 좋지 않다. 왼쪽에 선각으로 된 보살상은 6개의 손에 11면의 얼굴을 가진 관음보살이다. 이와 같은 관음상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주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사면석불에 십이면의 관음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신앙된 불상 중에 밀교적 성격을 띠는 불상이 섞여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굴불사의 사면석불 위로 다소 가파른 돌계단이 있는데 백률사로 오르는 계단이다. 현재 건물로 대웅전과 요사채 밖에 없지만 이차돈의 순교와 신라의 화랑 무례량을 구출한 대비천에 얽힌 이야기 등이 전해지는 곳이다. 이들 전설 등을 볼 때 매우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현재의 백률사는 재건한 것인데 대웅전 기단부에서 일부 신라시대 양식이 발견되었다. 자추사와 백률사는 발음이 완전히 다르지만 같은 뜻이다. 곧 ‘자(刺)’는 잣이니 ‘백(栢)’과 같고 ‘추(楸)’는 밤이므로 ‘율(栗)’과 같은 것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이차돈순교공양비는 경주박물관에 있다.
백률사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탈해왕릉과 숭신전이 나타난다. 신라 최초의 석씨왕인 탈해왕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왜국 동북 1,000리 지점에 다파나국의 왕비가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 하여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처음에는 금관국(김해)에 닿았으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아무도 거두지 않았고 다시 진한의 아진포에 닿았는데 노파가 거두어 키웠다. 궤짝이 떠오를 때 까치 한 마리가 따라다니며 울었다고 하여 까치 작(鵲)자에서 조(鳥)를 떼고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라 지었다.
제3대 유리이사금의 유언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어 62세에 왕이 되었다.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다. 서기 57년에 왕이 되어 80년에 승하하였으며 재위 23년간 왜구와는 친교하고, 백제와는 자주 다투었다. 계림(鷄林)을 국호로 하였으며 가야와 싸워 크게 이겼다.
경주의 북쪽 양정구(壤井丘)의 언덕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경주 시가지의 동북방에 해당하는 이곳을 탈해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높이 4.5m, 지름 14.3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아무런 시설과 표식물이 없는 가장 단순한 형태이다. 봉토 밑에 둘레석을 설치하였던 흔적도 외견상으로는 찾을 수 없는데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능 앞에 마련된 잘 다듬은 혼유석은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탈해왕릉 오른쪽에 있는 숭신전은 조선시대 말기 현재의 능을 탈해왕릉으로 정한 뒤 월성 안에 세워졌으나 월성을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1980년 지금의 위치로 이동했다. 홍살문, 영녕문, 경엄문을 지나 앞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숭신전이 나온다. 홍살문과 영녕문 사이에 1921년에 세운 ‘신라석탈해왕비명’이라는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탈해왕에 대해서는 월성지구에서 다시 설명한다.
숭신전 옆에 표암(瓢巖, 경상북도기념물 제54호)이 있다. ‘박바위’ 또는 ‘밝은 바위’를 뜻하는데 신라 6부 가운데 급량부였던 알천 양산촌의 시조 이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고 한다. 알평이 하늘에서 표암봉으로 내려와 급량부 이씨 즉 경주이씨의 조상이 되었다는 설명으로 이곳은 신라 화백회의의 연원이 되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등 신라 건국의 산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참고 문헌 :
『답사여행의길잡이(2) 경주』,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2001
『경주여행 109선』, 정선중, 혜지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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