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리빙스턴과 스탠리 7

리빙스턴과 헨리 스탠리(7)

youtu.be/pWwRdMQBlI0 〈자로 재서 분할한 아프리카〉 콩고에서 벨기에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열강은 앞을 다투어 탐험가를 후원하여 아프리카의 미개척지 진출을 서둘렀다. 아프리카는 불과 15년 만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 혹은 보호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서부, 북부, 중부 일대를 장악했고 벨기에는 콩고, 이탈리아는 트리폴리와 리비아, 독일은 카메룬과 토고를 손에 넣었다. 아프리카 대륙에 남은 독립국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뿐이었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나라간의 국경선이 다른 대륙과는 달리 일직선으로 곧게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분할하면서 정복국의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경계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이..

리빙스턴과 헨리 스탠리(6)

youtu.be/Rz6vnRnbaR4 2020년 6월 30일, 다소 놀라운 편지 한 통이 벨기에 필리프 국왕으로부터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과거의 상처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고 싶다. 그 고통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날은 민주콩고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지 꼭 60년째 되는 날로, 1885년부터 1960년까지 민주콩고를 식민 지배한 것에 대해 사과한 것이다. 민주콩고 독립 뒤 ‘침묵의 전통’을 지키던 벨기에 왕실은 60년 만에 식민 역사에 대한 사과에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그동안 침략국 벨기에는 ‘선택적 기억’과 ‘의도적 망각’으로 역사를 조작했고, 이에 맞서 진실을 알리는 여러 폭로와 자성들이 100년 가까이 진행됐는..

리빙스턴과 헨리 스탠리(5)

youtu.be/UBQ3dMemvUQ 〈콩고를 울린 고무 열풍〉 스탠리와 레오폴드 2세는 사실 운도 좋았다. 그가 처음에 진출한 콩고는 열대 우림 지역이지만 남부는 광산물이 풍부하여 아프리카에서는 노른자위와 같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레오폴드 2세는 전제군주답게 자신의 소유물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면서 많은 비난을 무시하고 콩고인을 철저하게 착취했다. 그런데 콩고에서 벌어들이는 모든 것은 벨기에 정부가 아니라 그의 사금고로 들어갔다. 때마침 세계는 고무 붐이 일었는데 콩고에는 ‘검은 황금’으로 불리는 고무나무가 국토 절반에 걸쳐 퍼져 있었다.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서 고무를 보았지만 처음에는 유럽인들도 고무의 활용성을 잘 몰랐다. 그런데 1700년대에 고무가 연필자국을 지우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리빙스턴과 헨리 스탠리(4)

youtu.be/YXNxjwlm1Zo 리빙스턴은 스탠리와 헤어진 지 단 2년도 되지 않아 치탐보 마을의 오두막집에서 사망했다. 그의 최후에 대한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873년 5월 1일 이른 아침 리빙스턴의 오두막으로 찾아 온 현지의 소년들은 그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기도하는 자세로 침대 곁에 무릎꿇고 있었다고 한다. 리빙스턴을 존경하던 약 60명의 현지인들이 그의 시체를 절개하여 약 2주 동안 햇볕에 말렸다. 그런 다음 시체를 천으로 감싸 원통 모양으로 파낸 나무껍질 속에 안치하였으며 전체를 굵은 천으로 둘러싸고 꿰맨 뒤, 2명이 운반할 수 있도록 2개의 막대를 끼웠다. 그리고 5월 중순 유해를 뒤따르는 사람들은 인도양 해안가에 있는 잔지바르 현재의 탄자니아를 향해 출발했다. 1,6..

리빙스턴과 헨리 스탠리(3)

youtu.be/2RGgjq96duE 〈천사와 악마의 만남〉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현대문명을 아프리카에 접목하기 위해서는 유럽인 상인과 군대가 드나들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원용하면 아프리카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추후 상당한 파장을 갖고 왔다. 실제로 1873년 그가 사망한 이후 유럽의 열강 즉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를 자신들 의도대로 분할하는데 그들은 리빙스턴을 ‘보호 성자’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했다. 즉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점령하여 그들의 야만성을 문명인으로 길들이는 것이야말로 아프리카인들을 위한다는 것인데 이는 리빙스턴의 생각이기도 하다는 주장이다. 여하튼 리빙스턴이 사망한 후 아프리카가 유럽..

리빙스턴과 헨리 스탠리(2)

youtu.be/KrVcwiBlqZA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탐험은 선교와 노예해방〉 1858년 2월 리빙스턴은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켈리마네 영사 겸 잠베지강 탐험대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임무는 잠베지강을 탐험하여 이것을 내륙으로 들어가는 통상로를 개척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동부해안 및 내륙의 독립구(獨立區)를 관할하고 아프리카 동부·중앙부를 탐험하는데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막강한 탐험대의 지휘자로 임명된 것이다. 중앙 아프리카 탐험 대장이 된 그는, 1858년 3월부터 1864년 7월까지 아프리카인 10명, 유럽인 6명의 대원을 이끌었다. 대원 중에는 동생 찰스와 에든버러의 의사 존 커크도 있었다. 이를 ‘리빙스턴의 제2차 탐험’이라고 한다. 이 탐험은 그가 행한 이전의 외로운 여행과는 차원을 ..

리빙스턴과 헨리 스탠리(1)

youtu.be/8Q6sbR6iNW8 1871년 10월 아프리카 오지인 우지지에서 영양실조와 말라리아로 거의 죽음을 눈앞에 둔 리빙스턴(1813〜1873) 박사가 미국의 스탠리(1841〜1904) 기자에 의해 발견된 것은 아프리카 탐험 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 중에 하나로 알려진다. 이들의 만남이 아프리카 탐험사상 가장 가슴이 벅찬 장면으로 알려지는 것은 그들이 만날 수 있는 확률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은 아프리카로서는 가장 불행한 순간인 동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건이 태동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리빙스턴이 스탠리와 헤어지면서 자신이 탐험한 지역을 그린 지도 한 장을 스탠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리빙스턴은 틈날 때마다 자신이 탐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