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89

조선 왕릉 답사 (89) : 제4구역 융건릉(5)

https://youtu.be/i98tRPFzH8U 융릉과 건릉의 전체면적은 84.2ha이며 수목현황은 침엽수 62%, 활엽수가 38%다. 건릉의 능역 입구에서 배수로와 참배로로 이어지는 진입공간에는 상수리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특히 건릉 진입부와 주변에는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갈참나무 등의 참나무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경관림을 갖고 있는 정조의 무덤은 융릉 서쪽으로 두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을 자주 찾았던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현릉원(융릉) 근처에 묻어주오”라고 했던 부탁대로 묻혔다. 그런데 1821년 효의왕후가 사망하자 정조 릉의 천장이 제기되었다. 정조의 릉이 아버지 무덤의 동쪽에 모셔졌으나 자리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효의왕후는 좌참찬 김시..

조선 왕릉 답사 (88) : 제4구역 융건릉(4)

https://youtu.be/v6_n_pWSj1c ② 건릉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1752〜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씨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융릉에 있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8세 때인 영조 35년(1759)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정조는 출생과 관련해 남다른 이적이 많은 왕으로 기록된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조가 태어나기 얼마 전 신룡(神龍)이 여의주를 물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태어나기 하루 전에는 큰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잔뜩 끼더니 몇 십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 모습을 도성 사람들이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 정조는 사도세자가 꿈 내용을 그린 그림을 동궁(창덕궁) 벽에 걸어놓은 뒤 태어났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극의..

조선 왕릉 답사 (87) : 제4구역 융건릉(3)

https://youtu.be/mqxDLasJ5AE 왕릉의 일반적인 진입 공간은 연지, 재실, 금천교, 홍살문으로 이어지는데 융릉의 연지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연지의 형태가 방지원도임에 반하여 융릉은 원형으로 조성되었다. 원형의 호안은 곡선 장대석으로 원형석축을 쌓아 놓았으며 연지의 지름은 약 186미터다. 융릉의 정자각은 정전 3칸, 배위청 2칸으로 하는 5칸 정자각이며 정자각 상부의 가구 구조는 5량가, 배위청은 3량가다. 지붕은 정전과 배위청 모두 맞배에 겹처마로 박공면에는 풍판을 설치했다. 포작은 정전이 출목 2익공, 배위청이 출목이 없는 2익공이다. 지붕 용마루는 적새를 쌓고 전후면에 회를 발라 마감하는 양상도회했으며 죄우에 취두를 설치했다. 정전과 배위청의 전후 내림마루에는 용두와 잡상 각 4..

조선 왕릉 답사 (86) : 제4구역 융건릉(2)

https://youtu.be/q38ZM_kyuxY 사도세자 비극에서 가장 잘 알려진 ‘뒤주’가 『영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영조실록』 38년(1762) 윤 5월 13일의 기록에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自內嚴囚)’라는 말이 나온다. ‘안에다 가둔다’는 기록을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범 편사연구사는 뒤주와 같은 협소한 공간에서 9일 동안 살아있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함규진의 논거를 들어 뒤주 사망설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뒤주라는 표현이 혜경궁홍씨의 『한중록』에 나오며 『정조실록』에는 ‘한 물건(一物)’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뒤주가 사망에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은 사실로 생각된다고 첨언했다. 실제로 복원된 화성행궁에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뒤주..

조선 왕릉 답사 (85) : 제4구역 융건릉(1)

https://youtu.be/gtfrCMbq8n0 조선왕릉 답사의 마지막 행선지는 사적 제206호인 융건릉(隆健陵)이다. 조선 제22대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를 모신 융릉, 정조와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건릉은 열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의 무덤이고, 융릉은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한 아들의 무덤이다. 세상에는 비극의 주인공도 많고 그 사연도 제각각이다. 왕조의 비극과 권력의 비정함을 상징하는 마의태자와 단종이 역사에 자주 나오는 비극의 주인공들이지만 사도세자의 비극은 그 누구보다도 애절하다. 28세의 꿈같은 나이에 왕세자임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갇혀 당쟁의 제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기까지의 정황은 다소 복잡하다.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조선 왕릉 답사 (84) : 제4구역 장릉(3)

https://youtu.be/yzdzi_LAkwM 장릉의 능침은 다행히도 양지바른 곳에 있어 눈이 와도 쉽게 녹으며 따뜻하다. 특이한 것은 능침을 둘러싼 소나무가 모두 봉분을 항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진 것이 많다. 장릉 터를 풍수가들은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한다. 능역 내에는 홍살문, 정자각, 단종비각, 재실 등 여타 왕릉과 다름없다. 그러나 장릉은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이 일반 능과 다르게 배치돼 있다. 장유형의 능선 중간에 능침이 있으며 능침 서측 수십 미터 아래에 평지를 이용, L자형 참도 끝에 능침을 옆으로 하고 정자각을 배치해 놓았다. 일반적 직선형 제향공간과 다른 형태다. 이것은 단종이 몰래 암매장되고 능침 앞이 좁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장릉의 상설은 정릉(貞..

조선 왕릉 답사 (83) : 제4구역 장릉(2)

https://youtu.be/y1vdbqHB3sc 단종의 복위사건에서 특이한 것은 세조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의 행보다. 그는 세조에게 끝까지 항거했는데 금성대군은 세종 8년(1426)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로 세조는 그의 친 형이다. 그런데 세종은 금성대군을 총애하여 계속 그의 집에 거처하거나 이어하기도 했다. 1444년과 1445년에는 세종이 병이 있어 금성대군의 사저에서 정양하였을 정도다. 세종의 금성대군에 대한 총애는 극심하여 1445년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화포(火砲) 제작의 감독을 맡아보았다. 세종 31년(1449) 세종이 병석에 눕자 그의 집에 거동하여 2개월간 체류하다가 나중에 영응대군의 사저로 이어했을 정도다. 그는 불교 신자였고 사찰에 후원을 하기도 했다..

조선 왕릉 답사 (82) : 제4구역 장릉(1)

https://youtu.be/AJhDJ8tAXAA 영월의 장릉(莊陵, 사적 196호)은 비운의 왕으로 알려진 제6대 단종(1441〜1457)의 능이다. 조선 왕릉은 현재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반경 4〜40km에 조영됐다. 그러나 조선 제6대 단종의 장릉(莊陵)은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번지에 있다. 이곳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오지로 면적은 107여 만 평이나 된다. 단종이 이처럼 먼 곳에 묻힌 이유는 ‘단종애사(端宗哀史)’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서는 생략한다. 단종은 1441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아들로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를 여의었다. 10세 때인 1450년 문종의 즉위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아버지 문종이 왕이 된지 2년 3개..

조선 왕릉 답사 (81) : 제4구역 영녕릉(7)

https://youtu.be/A9zJiqnnO0Q 효종의 무덤은 건원릉 서쪽 능선에 있는 현재 구리시에 위치한 영조 무덤인 원릉으로 정해진 후 10월 말 계획대로 안장되었다. 그런데 막상 효종의 시신을 관에 넣는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효종의 어깨가 너무 넓어 시신을 넣기 위해 준비한 관이 맞지 않은 것이다. 조선 시대의 왕의 장례 절차는 왕이 즉위하자마자 관을 짜고, 왕이 사망하기 전까지 매년 옻칠을 덧칠해서 보관한다. 효종의 재위 기간인 10년 동안 어깨가 더 굵고 넓어졌다는 뜻이다. 효종이 북벌에 신경을 쓰기 위해 체력을 단련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실록에 의하면 송시열이 ‘효자는 염을 단단히 묶지 않는데 이는 부모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효심을 보이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 ..

조선 왕릉 답사(80) : 제4구역 영녕릉(6)

https://youtu.be/TAw3aaBuUCs 놀라운 것은 최석정이 9차 직교 라틴 방진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각각 9차 라틴방진을 이루면서, 81개의 칸에는 (1, 1)부터 (9, 9)까지 81가지 경우가 중복되지 않고 한 번씩 제시된다는 것을 뜻한다. 『구수략』에서는 ‘종횡개득구십수(縱橫皆得九十數) 총적팔백일십(總積八百一十)’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종과 횡 모두 90을 얻어 더하면 810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각 칸의 첫 번째에 제시된 수들은 각각 가로와 세로 방향으로 1부터 9까지이므로 그 합이 45이고 두 번째 수들의 합 역시 45가 되므로 합하면 90이 되며, 그런 가로줄이나 세로줄이 9개 있으므로 810이 된다는 뜻이다. 최석정이 만든 9차 직교라틴방진은 중국의 수학책에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