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 158

중국의 자존심(25) : 진시황릉과 병마용갱(4)

youtu.be/9OAtoXuR8N4 좀 색다른 주장이지만 일부에서 병마용이 정말로 진시황제의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1984년 시안대학 고고학과 주임교수이던 천징웬(陳景元)은 『병마용의 진상』이라는 책에서 60여 개의 근거를 제시하며, 병마용이 진시황제와 관련이 없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병마용의 군진이 진시황 당시의 군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1호, 2호갱에서 병사들은 전차를 중심으로 사열하고 있는 모습인데 사마천의 『사기』를 위시한 모든 사적은 ‘진시황의 군사는 기동력이 강한 기병을 활용하여 천하를 통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진시황 당시 전차전을 벌였다는 역사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병마용의 군진은 진시황 시대 이전의 ..

중국의 자존심(24) : 진시황릉과 병마용(3)

youtu.be/0ro8qk0w4Dw 진시황제의 병마용진 역시 진법의 유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진시황릉 주위에서 발견된 거대한 병마용갱은 토용으로 당시 천하를 통일할 때 사용한 진나라의 군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병마용갱의 배치를 보면 당시 이미 전차 위주에서 보병을 중용하는 보병 위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아직까지 진시황의 병마용은 모두 발굴되지 않았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병마용으로만 분석한 군진은 다음과 같다. 우선 1호 갱의 병마용은 실전군진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쪽에는 동측을 보고 있는 3열의 무사들이 궁노를 들고 있다. 이는 1호 갱의 선봉부대다. 남쪽 즉 우익은 남쪽을 바라보는 1열의 무사들이 배치되어있고 좌익은 북쪽에 배치되어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후위는 서쪽에서 서쪽을 향하고..

중국의 자존심(23) : 진시황릉과 병마용(2)

youtu.be/uwEnAdardSQ 근래에 진시황릉에서 토용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까지는 군인들의 토용만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군인이 아닌 행정관들의 토용도 대량으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 토용들은 군인과 마찬가지의 용모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문방구를 휴대하고 있었다. 당시 행정관들은 대나무 조각을 늘 휴대하고 있다가 자신의 근무지에 돌아가면 죽간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옮겼다. 처음에는 군인의 토용만 발굴되어 진시황제의 전제성을 부각시키는 데 일조했지만, 행정관의 토용이 발견됨으로써 진시황제가 군인을 동원한 무단정치가 아니라 중앙집권제적 관료 제도를 정착시키려 노력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참고적으로 중국인들은 ‘대칭(對稱)’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무덤의 ..

중국의 자존심(22) : 진시황릉과 병마용갱(1)

youtu.be/pX4FJ766RfI 끄새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방문해야 할 3장소를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중국 협서(陜西)성의 서안(西安)을 제시한다. 나머지 2곳은 중국이 워낙 광대하므로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지만 한민족의 터전인 홍산 우하량과 북경 인근의 주구점이다. 주구점은 적어도 60만 년 전 불의 흔적이 있어 유명하지만 특히 동양계에 나타나는 후두부 특징이 나타나 우리의 선조로 인식하여 더욱 친근성이 있는 곳이다. 서안은 중국 내륙에 위치하지만 과거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차로인 실크로드의 기점 즉 과거에 장안(長安)이라고 하면 곧바로 그 중요성을 이해할 것이다. 우선 서안은 중국의 어느 곳보다 명소가 많은 곳이다. 『서유기』로 유명한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고대 인도 ..

중국의 자존심(21) : 진시황릉(3)

youtu.be/3LWp3bCrHUU 세계 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진시황릉의 지하에 50미터 높이의 피라미드 모양의 무덤에 묻힌 건물이 있다는 것을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의 두안 칭보 박사는 피라미드 밑 30미터에 위치하는데 이 구조물은 중국 고대 무덤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 구조물은 4개의 거대한 주위의 계단 모양의 벽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동, 서, 북벽 바깥 쪽 위층에서 많은 타일을 발견했는데 이 타일은 계단 꼭대기 근처에 쌓여 있다고 발표했다. 가장 주목받는 것은 불에 탄 점토와 석탄의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진시황릉의 지하가 온전한 상태라는 것이다. 두안 박사는 계단과 같은 벽의 형태로 볼 때 건물의 계단은 나무로 건설되지 않았지만 계단과 같은 벽..

중국의 자존심(20) : 진시황릉(2)

youtu.be/TtqsbsmTzF4 진시황제는 흉노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관개 시설을 고치면서 중국 역사상 저수지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또한 중국 대륙의 남북을 이어주는 운하를 건설하여 현재도 활용하는 교통망이 되었다. 이들 대형 공사가 국민들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진시황제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황제가 역사상 가장 사치스런 궁전인 아방궁(阿房宮)과 궁전 270채, 죽은 뒤 묻힐 자신의 거대한 묘를 건설하여 더욱 큰 많은 비난을 받았다. 바로 그 현장이 세계를 놀라게 하는 진시황릉이다. 진시황릉의 공사가 상상을 초래했다는 것은 여러 기록으로도 전해진다. 우선 진시황제는 즉위 직후부터 자신이 죽은 ..

중국의 자존심(19) : 진시황릉(1)

youtu.be/qv50BZIZ-tc 진시황제, 만리장성과 같은 특급 소재를 영화계에서 가만둘 리 만무인데 가장 공력을 들이는 곳은 중국임은 틀림없다. 그중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진 영화는 중국의 간판스타인 장예모와 공리가 주연으로 1989년에 출시한 「진용」이다. ‘주인공 몽천방(장예모)은 진시황제 암살 시도를 물리쳐 총애받는 장군이었는데, 불로불사약을 찾기 위해 서복과 떠나야하는 동남동녀 중 한 명인 한동아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발각되어 한동아가 사형 언도를 받는다. 동남동녀만 불로초를 찾을 수 있는데 동아가 남자와 접했으니 처벌은 피할 수 없는데 한동아는 몽천방에게 키스하며 입으로 불사약을 전해주고 불로 뛰어들어 죽는다. 반면 몽천방은 진흙이 발라진 채로 불에 구워져 인간 병마용이..

중국의 자존심(18) : 만리장성(7)

youtu.be/01a4R5zB9PA 수많은 명나라의 장성은 전략적 요충지였던 덕분에 청나라 군의 침입에 다소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지만, 일단 방어가 뚫리면 오히려 재빠른 진군을 재촉했다. 물론 당시 명나라는 화약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기동력을 중심으로 한 청나라 군에게 그 효용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중국장성학회’의 동휘회(董輝會)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성은 춘추전국시대 이후 총 20개의 왕조를 통해 건설 및 개․보수되었는데 춘추전국시대 2만 리, 진시황 때 1만 리, 한대 2만 리, 서진․북위․동위․북제․북주․수․송․요․금대까지 4만 리, 명대에 약 1.46만 리가 쌓아졌다.’ 이 숫자만 보면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완성했다는 자체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진나라가 중국..

중국의 자존심(17) : 만리장성(6)

youtu.be/txtXuBKgLdw 몽골에 의해 중국이 철저하게 유린당한 사실을 잊지 않고 있던 명나라는 북방으로부터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장성을 보다 견고하게 다지는 것이 몽골의 침략을 막는 데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전술에는 어느 정도 행운도 따랐다. 몽골에 예기치 못한 기근과 질병이 만연했던 것이다. 중국의 원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진 몽골은 계속 교역을 요구했지만 명나라는 이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명나라는 몽골족을 철천지 원수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존의 위기에 몰리면 어느 민족이든 돌파구를 찾게 마련이다. 바로 그때 등장한 사람이 몽골의 알탄 칸이다. 그는 몽골인을 규합해 명나라의 무관심과 방관에 보복했다. 명나라는 알탄 칸의 수..

중국의 자존심(16) : 만리장성(5)

youtu.be/RYTd4aQXN_8 흉노(북적)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의문이 생긴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로 보아서 천하에 무서운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흉노에 대한 진시황제의 생각은 만리장성을 쌓아서라도 그들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 의문에 대해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가 강력한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를 공격했다면 격파할 수 있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은 전국시대에 흉노의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흉노는 인접한 조(趙)나라와 연(燕)나라가 오랫동안 흉노를 통제하고 있었던 작은 세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할 무렵에 갑자기 중원 전체를 위협하는 흉노 제국으로 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