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동방견문록 10

마르코 폴로, 중국 여행 없는 동방견문록(10)

youtu.be/2quF2fSAtyA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 기록된 모든 곳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마르코 폴로가 직접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루스티켈로가 받아쓴 것이기 때문에 여행기라기보다 정보지의 성향도 큰 것도 사실이다. 루스티켈로가 지리, 인구, 교역 등에 관한 마르코의 방대한 기록과 구술을 토대로 영웅담 분위기를 가미해 새 작품으로 탄생시켰다는 얘기다. 몽골 군주간의 전쟁 장면을 삽입하고 마르코가 요란하게 묘사한 쿠빌라이 궁전을 더욱 현란하게 치장한 것도 마르코가 아니라 루스티켈로이며, 쿠빌라이 군대에게 폴로 일행이 투석기를 만들어주었다며 졸지에 그들을 병기제조기술자로 둔갑시킨 것도 루스티켈로라는 설명이다. 󰡔동방견문록󰡕의 진위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지만, 1940년..

중국 여행 없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9)

youtu.be/CP5M-uqtCyE 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을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증거는 또 있다. 원나라의 공식 사서에는 외국인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은데, 이상하게도 마르코 폴로에 대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역사책과 바티칸의 문서보관실에는 폴로 가족에 관한 기록이 없다. 반면 1260년 11월에 팔랑에서 상두로 간 사절단이 몽골에 도착해 환영받았다는 사실은 중국 연대기에 적혀 있다. 학자들이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마르코 폴로를 포함한 폴로 가족이 원나라로 들어가는 여행로다.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폴로 가족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해 카라코람 산맥을 거쳐 원나라 서쪽 관문인 카슈가르에 도착했다. 마르코는 노아의 방주가 있다는 아라라트 산에 대해 곁가지로 이야기하면서 ..

중국 여행 없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8)

youtu.be/NWgZ_ieYF0I 마르코 폴로가 아시아를 여행할 때 이슬람제국은 몽골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의 내용으로 학자들을 크게 괴롭힌 것은 마르코 폴로 가족이 몽골인을 위해 투석기를 제작했다고 기록했다는 점이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인이 자신이 개발한 투석기를 이용해 중국의 송나라 도시 샹양(襄陽)을 정복했다고 적었다. ‘샹양은 열두 개의 크고 부유한 도시를 관할하는 만지 지방의 큰 도시로 상업과 광범위한 제조업의 대중심지다. 이곳 주민들은 시체를 화장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타타르 황제(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은 물론 황제가 발행한 지폐를 사용한다. 이곳은 대도시답게 모든 물건이 충분히 공급돼 만지 지방이 점령된 다음에도 황제에게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3년간 포위 공격..

마르코 폴로, 중국 여행 없는 동방견문록(7)

youtu.be/wsrBj-MZzT8 마르코폴로의 이야기에 석연치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지만 그를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 중 하나는 그가 유명한 금패를 갖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금패는 역참과 함께 몽골이 세계를 제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핵심 요소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역을 자랑했던 몽골 제국의 출현으로 유라시아 대륙은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 두 대륙을 연결하는 육로나 해로가 몽골 제국에 의해 뚫린 것은 아니지만 두 세계간의 거리는 크게 단축되었고 왕래자도 큰 폭으로 늘어났다. 동양사학자 박한제 교수는 몽골 제국의 역사가 1260년을 경계로 양분된다고 말한다. 몽골군이 동쪽의 한반도에서부터 서쪽의 도나우 강 하구, 지중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혔던 시기를 전기로 보고, 쿠빌라이(재위 1..

중국 여행 없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6)

youtu.be/7H5WewzpKvQ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갖고 온 금패다. 당대에 원나라를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폴로 형제는 분명 원나라의 금패를 갖고 돌아왔다. 금패는 폭은 좁지만 길이 약 40센티미터나 되는 매우 특이한 물건으로 사실 금패가 있으면 제국 안에서 어디를 가든 지방관리의 호위 아래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고, 식량을 비롯해 모든 필수품을 받을 권리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귀향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작 귀향하는 폴로 형제를 괴롭힌 것은 홍수, 폭풍우, 눈, 빙하 등의 악조건이었다. 어쨌든 이들은 3년에 걸쳐 소아르메니아 연안의 현 알렉사드레타 만에 있는 라이아스(Laya..

중국 여행 없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5)

youtu.be/XRulVWM6SxA 마르코 폴로를 두둔하는 한 가지 가설은 베네치아의 유력 가문들은 제노바와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적어도 한 척 이상의 갤리선을 준비토록 명령 받았다고, 그가 아시아에서 돌아오자 폴로 가문의 갤리선 선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마르코 폴로가 코르출라 전투보다 다소 일찍 일어난 1296년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고도 한다. 마르코 폴로와 동시대인이던 도미니쿠스회의 수도승 야콥 굿다이가 편찬한 연대기 󰡔이마고 문디󰡕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296년에 아르메니아 해에 있는 레이아스라는 곳에서 15척의 제노아 함선과 25척의 베네치아 함선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 끝에 베네치아의 함선이 파괴되어 모든 선원은 살해 혹은 포로가 되었다. 포로 중에는 마르코 ..

마르코 폴로, 중국 여행 없는 동방견문록(4)

youtu.be/b_V0jNJULOQ 󰡔동방견문록󰡕에서 이상한 점은 여ㆍ원연합군이 1, 2차에 걸쳐 일본을 공격했음에도 마르코폴로는 제2차 원정에 대해서만 설명한다는 점이다. 마르코 폴로의 말이 맞다면 그는 제1차원정 때에도 중국에 있었다. 그가 쿠빌라이의 궁에 도착한 것은 1274년 여름인데 제1차 여ㆍ원연합군은 10월에 출발했으므로 이 원정에 대해 상당한 식견이 있어야 마땅하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데 마르코 폴로는 여ㆍ원연합군 중에서 강남군만 설명하고 동로군에 대해서 조차 언급이 전혀 없다. 여하튼 󰡔동방견문록󰡕에 기록된 전쟁의 전황 설명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하루는 바람이 북쪽에서부터 세차게 불어오므로 장병들이 만약 지금 떠나지 않으면 배들이 파손될 것이라..

중국 여행 없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3)

youtu.be/IBqcFDBjhww 13세기에 로마 교황청은 몽골과 동맹을 맺고자 카라코룸으로 사절단을 보냈다. 여기에는 종교와 정치적 목적은 물론 비단, 향료, 금 같은 재물이 있는 동방과의 무역로를 개척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이들에게 많은 지식과 정보를 주는 귀한 자료가 되었음은 자명한 이치다. 사실 폴로 가족이 아시아를 처음으로 여행한 유럽인은 아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플라노 카르피니(Plano Carpini, 1200∼1252년)로 이후 그는 󰡔카르피니의 몽골 여행기󰡕를 남겼다. 그는 교황 이노센트4세(InnocentⅣ)의 위임을 받아 몽골군이 기독교 세계를 침입한 것을 항의하고 또한 몽골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1245년 4월 ..

중국 여행 없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2)

youtu.be/JL7rCiWchWw 󰡔동방견문록󰡕은 서양에서 󰡔일 밀리오네(Il millone)󰡕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백만장자가 된 마르코 폴로가 ‘백만장자 마르코(Marco Millioni)’라고 불리면서 그가 살던 저택이 ‘코르트 디 밀리오니(Corte di Millioni)’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당대에 허풍장이로 불린 것은 몽골의 쿠빌라이 황제의 위대함을 입에 달고 다녔고 쿠빌라이의 수입이 연간 100〜150만 금괴에 달한다고 떠들고 다녔으며 각국의 재산을 언급할 때도 늘 ‘백만’ 단위로 설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 백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알려진다. 또한 마르코 폴로에 정통한 영국의 헨리 율(Henry Yule, 1820〜1889년)이나..

중국 여행 없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1)

youtu.be/AQvHQJ629wo 중세시대 유럽인은 지구가 평평하고 네모나거나 원반모양으로 생겼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며 그 서쪽에 서유럽이 있으며 유럽 변경 저 너머에 있는 아시아 대륙은 수많은 땅이 복잡하게 어울린 기이한 곳으로 다채로운 신화와 괴수, 무서운 부족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루크(Rukh, 전설에 등장하는 대형 새로 코끼리를 새끼들의 먹이로 준다고 함)와 유니콘, 우상 숭배자들이 살고 있었다. 또한 금이 엄청나게 많았고 자극적인 향료들이 넘쳐난 ‘향료의 땅’ 또는 ‘행운의 섬’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유럽 중세 시대인들에게 비쳐진 아시아는 결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사실 고대 지중해 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의도적으로 아시아를 여행하면서 교역했다. 인도와 실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