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적벽대전은 없었다 8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8)

youtu.be/1m8YAIpEhFA 적벽대전을 중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전투가 전체 중국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적벽대전의 파급 효과는 광의와 협의로 구분하여 설명된다. 먼저 협의의 결과를 보면 적벽대전은 군사적인 결정성을 갖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조가 상대가 되지 않는 손·유의 연합군에게 패전하여 형주를 떠나 중원의 ‘업’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권력기초는 적벽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았다. 조조의 군사력은 여전히 손권과 유비의 군사력을 월등히 앞섰다는 것은 그 후 조조가 다시 오나라를 침공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213년). 적벽대전은 단기적으로도 남북 간의 군사적 평형을 깨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광의적인 측면에서 적벽대전은 역사상에 매우 큰 영향을..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7)

youtu.be/Obn4lfoRu3c 조조가 압도적인 별력과 전력을 갖고 있음에도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사실이다. 학자들이 궁금한 것은 바로 당대의 판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가 적벽대전인데 조조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인 손․유 연합군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인가이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패배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예상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적벽대전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조조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호기롭게 형주를 점령하고 손권과 대치했는데 이때 조조에게 계속 패배만 하던 유비는 유기와 합하여 겨우 2만 여 명의 군사만 갖고 있었다. 손권도 많아야 3~5만 명의 군사를 갖고 있었으므로 총 5~7만 명에 불과했다. 조조군이 실제로 20~25만 명이라고 하더라도 전투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6)

youtu.be/MFMoie3LVNM 함부로 화공을 쓰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화공은 『삼국지』처럼 대형 전투에서 일어나는 것보다는 상황에 따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정상이다. 『무경총요』에 적힌 화공술을 보면 고대 전투에서 여러 가지 화공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작행(雀杏)’이다. 적의 성 안에 있는 새를 잡아 속이 빈 은행 안에 쑥을 넣어 만든 불씨를 새의 다리에 묶은 후 황혼녘에 둥지로 돌려보내 적군의 식량 창고를 불태운다. 둘째는 ‘행연(行煙)’이다. 성 바깥의 바람이 잘 부는 곳에 건초나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연기를 만든 후 연기에 의해 성 위를 수비하는 병사들이 자리를 피할 때 이 틈을 타서 성을 공격한다. 셋째는 ‘연구(煙毬)’로 화약을 황..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5)

youtu.be/TETXXDzh-aU 『삼국지』에서 나관중은 적벽대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대단히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특히 적벽대전에서 공명의 역할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유비와의 연합에 반신반의했던 손권으로 하여금 조조에 대항하도록 설득했으며 조조의 수군을 화공으로 공격할 때 이에 절대 필요한 동남풍이 불도록 했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적벽대전을 매우 간략하게 적었지만 이와는 달리 나관중은 적벽대전에 대해 매우 공들여 적었다. 사실상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은 유비가 제갈량을 초빙하는 삼고초려를 포함할 경우 그 내용이 거의 1/5에 달하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당연히 적벽대전에도 나관중이 허구로 적은 내용이 많이 삽입되어 있다. 적벽대전을 설명하려면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어느 부분이 사실이..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4)

youtu.be/cS6Y6za3o00 적벽대전이 『삼국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장차 중국의 전체 판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전투로서의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적벽대전’이란 말이 의미하는 뜻을 알아보자.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을 ‘적벽지전(赤壁之戰)’이라고 부른다. ‘전’이란 회전(battle)을 가리키는 말로 적벽은 회전이 발생한 지점이다. 예로 들자면 해하지전(垓下之戰)은 바로 초․한 양군이 해하에서 한 판 벌인 회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적벽지전’이란 적벽에서 발생한 한 번의 회전을 뜻한다. 이를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적벽대전으로 적었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런데 적벽대전이라는 대전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적벽대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문..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3)

youtu.be/jBQ5SWi52Zc 결론을 말하자면 손권과 유비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하고 결국 승리하였지만 당대의 정황을 볼 때 이들이 연합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오나라 군진을 종횡무진하면서 탁월한 정세를 논하여 오나라 수뇌진을 설득했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형주를 접수하고 자신의 취약점인 수군을 확보하자 동오 공격에 자신감을 얻은 조조는 곧바로 손권에게 공갈의 의미를 지닌 다음과 같은 초항서를 보냈다. ‘최근에 나는 조정의 명을 받들어 죄를 지은 자들을 정벌하고 있소. 군대의 깃발이 남쪽으로 향하자 유종은 바로 손을 들어 투항했고 형양(荊陽)의 백성들도 모두 귀순했소. 이제 나는 다시 80만 명의 수군을 동원하여 그대와 함께 그대가 머무는 ..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2)

youtu.be/xaymOF1TeM4 조조는 유비가 자신을 넘보기 전에 꺾어야한다고 생각했고 결론을 말하자면 조조의 생각은 옳았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려고 했을 때 유비를 공격하는 것에 반대하는 부하들은 없었지만 유비에게 새로운 무기가 생겼다고 조언했다. 그가 얻은 무기는 바로 제갈공명이다. 조조가 제갈량의 친구로 이름이 높았던 전략가인 서서(徐庶 ?~230년경)에게 제갈량의 재주가 어떠냐고 묻자 천하의 서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같은 사람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반딧불이의 형광(螢光)이라면 제갈량은 호월천리(晧月千里)의 밝은 달입니다.’ 나관중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을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설정하고 서서의 입을 통해 그를 지나칠 정도로 찬양했는데 그것은 제갈량을 돋..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1)

youtu.be/sYodMgDDmD0 프랑스에서 오래 주재했던 친구가 프랑스에서 있었던 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어느 날 라디오를 틀었다가 ‘한국에서 대단히 놀라운 오페라를 보았다’는 프랑스 기자의 이야기가 흘러나와 깜짝 놀랐다고 한다. 프랑스 기자는 한국의 오페라는 단 두 사람이 하는데 한 사람은 부채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다른 한 사람은 북을 친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오페라가 있다는 것도 생소하지만 공연 시간이 8시간이나 되어 더욱 놀랐다고 말했다. 그의 칭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부채를 든 가수가 8시간이나 계속 노래를 부르는 데도 관객들 중 어느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고, 자신 또한 끝까지 한국의 오페라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문화에 독특한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프랑스 기자가 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