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독제의 세계>
한국의 인구 5,000만 명 중 100세 이상이 5,000명이나 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100살이 넘는다는 것이 얼마나 장수한 것인지는 청동기시대인 4000년 전 사람의 평균 수명은 겨우 18세였고 2000년 전인 서기 1세기경 로마제국 남자의 평균수명은 약 22세였다. 1〜2세기 전만 해도 30〜40살이었는데 평균 수명이 그 두 배인 70〜80살로 늘어난 것은 불과 100년도 채 안된다.
한국의 경우 1900년대의 조선인의 평균수명은 20대 중반이상, 1930년대의 조선인들의 평균수명은 30 중반 이후로 알려진다. 당시에 환갑 잔치를 거창하게 한 이유다.
그런데 한국인의 평균수명 증가는 놀랍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계속 증가하여 2010년 남자의 평균 수명은 77.2세, 여자의 평균수명은 84세나 되며 2016년 남성의 경우 79.3세, 여성의 경우 85.4세이다. 이는 경제협력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수명 중에서 여성의 경우 전체 순위에서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상당히 높은 수치로 조만간 한국이 전체 순위에서 1등을 차지할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세계적으로 한국인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지구인들의 수명이 급격하게 증가했는데 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인간의 수명이 획기적으로 증가한 배경에는 인류사상 가장 불운한 과학자의 공이 있었다는데 이의가 없다. 그러나 그가 인류의 생명을 늘려주는데 가장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했음에도 현대인들은 그의 이름조차 거의 알지 못한다. 과학사상 가장 불운한 사람으로 알려지는 젬멜바이스(Ignas Philip Semmelweis)다.
수술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수술이 언제부터 인류의 생활에 파고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약 25,000년 전의 구석기시대의 두개골에서 외과적 수술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 전부터 수술이 행해졌던 것은 사실이다. 이 두개골은 예리한 부싯돌을 이용하여 구멍을 뚫는 수술을 행했는데 놀라운 것은 수술이 성공하여 수술 후에도 상당히 오래 동안 생존했다는 점이다. 구석기인들이 왜 이런 수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대에 수술의 효과가 잘 알려졌음은 틀림없다.
여하튼 수술은 마취제의 등장으로 획기적으로 발달하여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서 구했는데 의학사상 연계하여 빠뜨릴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마취제 덕분에 수술에는 성공했지만 수술 후의 경과가 좋지 못하여 수술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수술 후 회복을 기다리던 환자들의 수술 부위가 곪으면서 열이 나고 통증이 생기며 여러 증상이 나타나다가 결국에는 의식을 잃고 사망하는 패혈증 때문이다. 일단 패혈증이 일어나면 죽음을 의미하므로 수술에 임하는 의사나 환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놀라운 것은 당시 수술 받은 사람의 거의 70퍼센트가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균처리이다.
2020년 ‘코로나19’가 한국을 강타하자 마스크를 쓰는 것과 동시에 손 씻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우리의 손은 외부 환경과 직접 접촉하면서 항상 다양한 세균과 바이러스에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균과 바이러스는 손을 통해 주로 옮는데, 제대로 손을 씻으면 손에 묻은 세균의 99.8%가 사라진다. 또한 손 씻기는 독감을 포함한 호흡기 질환을 21%까지 감소시켜주고, 기타 감염 질환을 약 50~70%를 예방해 주는 것으로 알려진다.
학자들은 이와 같은 단순한 소독이 인류를 가장 많이 구한 일등공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균 죽 살균처리처럼 간단한 것도 없는데 놀랍게도 이런 간단한 처리는 질병 역사에서 상당히 후대에 접목된 것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이들 방법이 예전부터 알려졌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멸균이나 소독에 대한 개념은 놀랍게도 이집트에서도 알려졌다. 이집트인들은 상처의 예방을 위해 불로 상처를 지졌는데 흉터가 남는 거친 방법임에도 이 방법은 계속되었다. 영화에서 알코올을 마시고 상처를 불로 지지는 장면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포도주를 소독제로 사용했다. 히포크라테스도 상처를 포도주와 식초로 소독했다고 한다. 한편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4세기에 시체가 썩을 때 나는 악취를 막기 위해 유황연기를 이용했으며 인도에서도 수술실에서 유황연기를 피웠다. 흑사병이 창궐했던 중세 유럽에서도 환자가 머물던 집이나 사용하던 물건 등을 유황연기를 이용해 소독했다.
중세시대로 내려와 프랑스의 외과의사 파레는 1537년에 난황과 테레빈유를 혼합하여 총상에 치료했는데 이는 당대에 매우 적절한 방법이다. 난황에는 항미생물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라이소자임이 들어있고 테레빈유는 화학적 소각작용을 일으키는 독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마취제의 활약으로 고통은 줄었지만 패혈증이 기세를 올려 수술 자체가 극도의 기피 대상이었는데 1840년대 말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일하던 헝가리 의사 젬멜바이스(Ignas Philip Semmelweis)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의사가 불결하여 오히려 환자들에게 치명적인 병을 옮길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의사가 환자를 살리는 구원자가 아니라 환자를 병들게 하는 파괴자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시 산욕열은 유럽의 산실에서 약 10〜35퍼센트의 사망률을 기록할 정도로 공포의 질환이었다. 출산 시 신생아가 산모의 좁은 산도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산모는 종종 질과 회음부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곤 한다. 출산으로 인한 상처는 저절로 아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상처를 통해 균이 침입하면 감염과 고열을 일으키는 산욕열이 발생하는데 이는 왕족이나 귀족, 평민 구분이 없었다. 역사에서 수많은 왕비나 귀족 부인들이 아이를 낳다 사망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1820년 스코틀랜드 작가 존 맥킨토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geulmoe.quesais
‘런던 거리 모퉁이마다 무서운 질병으로 죽은 엄마들을 애도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비엔나 병원 산부인과 청년 의사인 젬멜바이스는 의사들로 하여금 산모를 대하기 전 소독액으로 손을 씻기만 하면 산욕열을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젬멜바이스는 1818년 오늘날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하여 처음에는 대학교에서 2년간 법학을 공부한 후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유학하여 법학대신 의학을 공부했고 빈에 있는 빈종합병원의 산부인과에서 근무했다.
비교적 눈썰미가 좋은 젬멜바이스는 가까이 붙어 있는 두 개의 병동에 각각 분만실이 설치되었는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제1병동에는 학문적으로 교육받은 의사들과 의대학생들이 근무하면서 아이들을 받았고 제2병동에는 전문교육을 받지않은 산파들이 아이를 받았는데 제1병동보다 제2병동의 사망률이 훨씬 낮은 것이다.
의사가 전문적인 지식인임을 감안하면 제1병동에서의 산모 사망률이 제2병동보다 낮아야 했다. 젬멜바이스는 예상외의 결과에 놀라 면밀히 상황을 분석하던 중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젬멜바이스의 선배 의사인 야코프 콜레츠카가 시신을 부검하던 중 실수로 입은 작은 상처 때문에 감염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는 이런 결과를 다음과 같이 유추했다. 콜레츠카가 부검 도중 메스를 다루다가 상처를 입은 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환자의 몸에서 나온 미지의 물질이 상처를 통해 콜레츠카의 몸속으로 들어갔고 이것의 독성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역으로 생각했다. 산욕열은 반대로 의사로부터 산모에게 독성이 전염되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출산한 여성은 산욕열 발생률 자체가 매우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1병동의 의사들은 시체를 만지거나 감염성 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사용한 기구 등을 다루다가 아무런 조치없이 분만실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에는 전염원에 대한 개념은 거의 없었지만 경험적으로 전염병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 있었으므로 젬멜바이스는 1848년 제1병실의 분만실에 근무하는 의사들에게 소독을 강조했다. 물로만 씻는 것이 아니라 시체에서 묻어온 모든 물질이 씻겨나갈 때까지 염화칼슘액으로 손을 박박 씻으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제1병동에서 제2병동보다 산욕열로 사망하는 사람의 숫자가 낮아졌다. 한마디로 간단한 소독만으로 사망률이 급감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대 발견을 했음에도 젬멜바이스는 정치적인 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자유주의의 열망이 높아지자 그는 의사라는 직분을 도외시하고 정치 세력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정치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의사를 의사로 받아드릴 수 없다고 오스트리아는 젬멜바이스를 추방했다. 할 수 없이 고향인 부다페스트로 돌아갔지만 젬멜바이스는 그곳에서도 소독법의 우수성을 확인한 후 1861년 무균처리가 산욕열로 인한 사망률을 감소시킨다는 내용의 『산욕열의 원인, 개념과 예방』이란 책을 발간했다.
그러나 문제는 젬멜바이스가 산부인과 의사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는 태도를 견지한 것이다. 타인과 타협을 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은 고향의 의학계에서조차 왕따 당했다. 간단한 소독으로 인명을 구할 수 있다는 그의 방법에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는 자신의 주장을 갖고 사사건건 주위와 싸웠다. 급기야는 1865년 친구들이 강제로 그롤 정신병 수용소에 억류시켰다.
그런데 그는 정신병원에 수감되자마자 손가락 상처로 인한 패열증으로 곧바로 사망했다. 그가 패열증을 막는 방법을 제시했음에도 소독조차 하지 못하고 패열증으로 사망한 것이다.
젬멜바이스처럼 하는 일마다 꼬이는 사람이 있지만 하는 일마다 잘 풀려 소위 황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는 경우도 허다하다.
인류에게 다행한 것은 젬멜바이스가 영욕의 세월을 보내다 사망한 것과는 달리 그의 소독법이 다른 사람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역사는 의학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또 한 명의 명인을 배출하는데 바로 조셉 리스터(Joseph Lister)이다. 리스터가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의학도일 때의 일이다.
1846년 12월 스코틀랜드 태생의 리스턴 박사는 공개적으로 마취된 환자의 수술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는 대학 교수이지만 당대의 관례 즉 평소와 마찬가지로 몇 달 동안이나 세탁하지 않은 불결한 상의와 에이프런을 걸치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의 환자는 집사 일을 맡아보던 프레드릭 처칠이라는 환자로 넓적다리가 썩어 들어 절단 수술을 공개적으로 받는 것이다.
에테르에 적신 스폰지가 든 흡입 장치를 이용하여 마취제가 투입된 환자는 곧바로 마취 상태로 들어갔고 리스턴은 톱니 모양의 시술용 메스로 통증없이 환자의 넓적다리를 절개했다. 이 시술은 당대의 관례대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의대생인 조셉 리스터도 이를 참관했다.
리스터는 교수가 당대 최첨단 의학 기술인 마취제를 사용하여 통증없이 수술하는데는 대성공했으나 공개적인 수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위생적인 수술실 상태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학생임에도 그런 환경에서 수술을 받는 환자들은 수술보다도 세균 감염에 의해 환자의 상태가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영국에서 마취제 덕분으로 통증없이 성공적으로 수족 절단 수술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세 명 중에 한 명 꼴로 환자들이 사망했다. 대부분 수술 후 감염되는 ‘패혈증’이 원인이었다.
그런데 패혈증은 상처 악화로 악취가 심했다. 그러므로 당시에 많은 의사들은 악취가 감염을 일으키며 사망률도 악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냄새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때 선구적인 사고를 가진 여성이 등장하는데 바로 램프를 든 전설적인 숙녀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그녀는 비누와 따뜻한 물 그리고 햇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무시되었다.
여기에서 젬멜바이스가 인류에게 알려준 것은 소독제의 효과이다. 소독제는 세균을 죽이거나 성장을 막는 물질이란 뜻이다. 현재 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적시적소에서 구하고 있는 항생제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있는 소독제에 대해서는 다소 무지한 것은 사실이다.
항생제와 소독제는 말 이름처럼 다르다. 항생제는 박테리아만을 죽이는 데 반해 소독제는 박테리아를 포함하여 곰팡이, 바이러스 등과 같은 여러 세균을 동시에 죽인다는데 차별성이 있다. 또한 항생제는 온몸에 퍼져 있는 세균을 주사나 약으로 죽이지만 소독제는 손을 씻기만 해도 효과를 보이며 상처 또는 수술 부위에 발라 효과를 유발한다. 상처가 나거나 수술을 한 부위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 등에 쉽게 감염되므로 소독제를 쓰지 않으면 세균 수가 급격히 증가해 급성 염증과 패혈증이 생긴다.
다양한 소독제가 개발되고 활용된 곳은 전쟁터였다. 18세기에는 전쟁터에서 수술을 받다가 균에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죽는 병사들이 많았다. 외과의사 찰스 길만은 염증이 심한 병사의 손에 우연히 럼주를 쏟았는데 이후 그 염증이 빨리 낳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유럽의 의사들은 술의 알코올 성분이 치료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861년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많은 병사들이 감염으로 사망했다. 당시 외과 의사들은 보통 손과 수술 도구 등을 물로 씻기만 했지 소독하지는 않았다. 수술 장갑 없이 맨손으로 평소 푸줏간에서 쓸 법한 앞치마를 두르고 수술을 했다. 그러므로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어 죽은 사람보다 의료 캠프에서 세균에 감염되어 사망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소독제의 효과는 계속 발견되었는데 1863년 외과의사 미들턴 골드스미스는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괴저 환자에게 브롬액이라는 약을 발랐더니 피부 조직이 더 이상 죽지 않았다. 그는 계속하여 브롬액으로 치료했는데 304명 중 단 8명만 사망했다.
수술 후 환자들의 사망 원인에 대해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매사를 꼼꼼하게 분석하는 리스터는 불결한 병동에 떠도는 세균이 감염의 원인이라고 추정했다.
마침 리스터는 ‘발효와 식품 부패의 원인은 세균이다’라는 루이 파스퇴르 논문을 읽은 뒤 수술에 의한 감염도 같은 원인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소독제가 세균을 죽이는데 큰 역할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1861년 글래스고의 <왕립진료소>로 발령받은 리스터는 5년 동안 환자의 약 50퍼센트가 패혈증으로 사망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자신의 가설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리스터는 당시 악취나는 하수구 정화용으로 주로 사용되던 석탄산(페놀을 녹인 수용액)을 방부제로 선택했다. 페놀이 악취 나는 하수도를 청소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리스터는 1865년 8월 복합골절 환자의 환부를 석탄산으로 소독하고 다리에 부목을 대어 붕대로 감았다. 4일 후 붕대를 풀어보니 화농의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후 방부제 도포를 계속하자 환부는 아물기 시작했고 골절을 당한 지 6주가 되자 환자는 완쾌되어 걸어서 퇴원했다.
인간의 피부는 매우 단단한 보호 장벽이므로 세균을 직접 피부에 발라도 대개의 경우 병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세균이 피부 장벽을 넘어서 인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철옹성과 같은 피부라도 상처가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상처로 피부에 틈이 벌어지면 이 사이로 세균이 얼마든지 침입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처의 크기보다 상처에 닿는 것들에 어떤 균이 묻어 있는가이다. 리스터의 방법은 환부에 직접 닿는 물건을 소독해 가능한 한 상처를 깨끗하고 안전하게 유지하자는 것이다. 현대 병원에서는 이를 위해 두 가지를 병행한다. 소독과 멸균이다. 소독(disinfection)은 살아 있는 미생물을 제거하는 물리화학적 절차이며 멸균(sterrilization)은 살아 있는 미생물뿐 아니라 아포(포자)까지 제거하는 보다 더 적극적인 방식이다. 예를 들어 주사 맞기 전에 알코올 솜으로 피부를 닦는 것은 소독이며 수술용 메스를 고온고압기에 넣고 끓이는 것은 멸균이다. 보통 피부 소독에는 75퍼센트의 알코올이나 10퍼센트 포비돈-요오드용액(소위 빨간약)이 많이 이용된다. 알코올은 미생물의 단백질을 변성시키고 포비돈-요오드 용액은 미생물의 단백질 뿐만 아니라 DNA의 구조까지 망가뜨리는 성질을 갖고 있다.
리스터의 청결 치료법은 그야말로 놀라운 결과를 보였다. 절단 수술로 인한 사망률이 50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급감했다. 수술진 의사들이 백색 가운을 입게 된 것도 그의 공이다. 혁신적인 청결 운동의 일환으로 병원에서 때가 묻으면 금방 눈에 띄는 백색 가운을 입었다. 환부를 감싸는데 거즈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그의 공이다.
리스터의 방부 치료 가치를 최초로 인정한 국가는 독일로 1870~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독일의 외과 의사들은 처음으로 방부 치료법을 사용했다. 리스터는 1871년 9월 빅토리아 여왕의 왼쪽 겨드랑이에 난 커다란 종기를 절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왕실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그날 여왕은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장시간에 걸쳐 소름끼치는 드레싱 치료를 받았다. 시의인 마셜 박사가 리스터 박사를 도왔고 붕대를 풀기 전과 드레싱을 하는 동안 살균을 위해 그의 위대한 발명품인 석탄산 분무기가 사용되었다.’
그는 추후에 이 당시의 수술에 자부심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여왕의 몸에 칼을 댄 유일한 사람이다.’
리스터는 1897년 남작이 되었고 1902년에는 그 해에 제정된 메리트 훈위를 수여받은 12명 중에 하나였다. 인류를 가장 많이 구하는 소독법을 발견한 젬멜바이스는 어떤 공로도 인정받지 못한 채 사망했지만 이를 이어 받은 리스터는 의학사상 가장 존경받는 의학자로 자리매김한다.
젬멜바이스와 리스터의 소독법은 계속 발전하여 20세기 초 영국과 독일에서 개발된 무균처리법은 박테리아를 소독하는 살균법과 달리 완전한 무균 상태에서 치료하는 것이다. 무균치료법은 우선 수술 전에 환자의 절개부위를 소독하고 나머지 신체 부분은 살균한 타월과 시트로 싼다. 수술진은 소독한 가운, 장갑,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술에 사용되는 모든 기자재는 화학적인 방법이나 열로 살균 처리한다. 현재의 병원에서 사용되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에 대비하여 손씻기를 기본으로 하는 것은 손씻기와 같은 간단한 소독 방법이 큰 효과를 얻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가 코로나19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손 씻는 방법 6단계는 다음과 같다.
① 비누 거품을 충분히 낸 후 양 손바닥을 마주 대고 문지른다.
② 양손의 손가락을 마주 잡고 문지른다.
③ 양손의 손등과 손바닥을 마주 대고 문지른다.
④ 엄지손가락을 다른 편 손바닥으로 감싸 문지른다.
⑤ 손깍지를 낀 후 문지른다.
⑥ 손가락을 세워 반대편 손바닥에 문지르며 손톱 밑을 깨끗이 닦는다.
참고문헌 :
『세계사의 100대 사건』, 리더스다이제스트, 1995
『의학사의 숨은 이야기』, 예병일, 한울, 1999
『장난꾸러기 돼지들의 화학피크닉』, 조 슈워츠, 바다출판사, 2002
『하리하라의 몸 이야기』, 이은희, 해나무, 2012
『위대하고 위험한 약 이야기』, 정진호, 푸른숲,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