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의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헬리코박터균

위산 속 헬리코박터균의 두 얼굴(1)

Que sais 2020. 9. 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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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산 속에서도 사는 헬리코박터균

2005유산균에 관련되는 두 사람의 스타를 탄생시켰다.

메치니코프1908노벨상을 받은 지 거의 100이 되어서이다.

엘리 메치니코프(1845~1916)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

<노벨상위원회>2005 노벨생리의학상위염과 소화기의 궤양을 일으키는 헬리코박터 파이로리(Helicobacter Pylori)균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로열퍼스 병원로빈 워렌 박사호주 NHMRC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 연구소배리 마셜 박사를 선정했다.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을 발견하여 현대인들의 고질병인 위염과 위궤양, 십이지장 궤양 등의 원인을 밝혀냈다고 인정한 것이다.

로빈 워렌(1937~)2005년 노벨 생리의학상

마셜 박사한국인에게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 유산균음료 광고에 출연해 헬리코박터 파이로리라는 이름을 우리에게 확실히 각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배리 마셜(1951~)2005년 노벨생리의학상

1979년 마셜노벨상을 공동으로 수상하는 워렌 박사는 심각한 만성 위염을 앓는 환자위점막에서 구부러진 막대 모양의 박테리아를 발견했다. 그는 이들 박테리아가 번식한 곳 주변에는 항상 염증이나 궤양 등의 이상이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모든 위장 질환 환자들이 이들 박테리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균을 가진 사람들의 위점막은 모두 헗어 있었다. 그는 이 세균이 위장 질환과 관련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벽에 파고든 위나선균(헬리코박터균)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발견에 의문을 보냈다. 1900대 초부터 에도 세균이 살지 않을까 하는 의혹이 제기된 적은 있었지만, 당시에도 위에서 강산성의 위액이 분비되기 때문에 어떤 미생물도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루에 22.5리터에 달하는 염산이 든 위액을 분비한다. 이로 인해 위장 내부ph13 정도의 강산성을 띠게 되는데 낮은 ph는 위에서 작용하는 단백질 분해효소 펩신활성화시키는 역할도 한다.

따라서 위 내부ph도 낮은데다가 펩신까지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음식물과 함께 삼킨 미생물들은 대부분 위에서 죽어버린다고 생각했다. 강산성이라는 혹독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 생명체가 존재할 리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미생물들은 종류에 따라 적정 ph 범위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 ph 78의 중성 혹은 약한 알칼리성일 때 잘 자란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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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합이 잘 맞는 노벨상수상자>

강산 속의 위속에서도 예상치 못한 세균을 발견워렌 박사는 위 속에 염증을 일으키는 세균이 서식할 지도 모른다고 발표했다. 그의 발표는 예상대로 그를 곤혹스러운 사태로 몰아갔다. 많은 학자들이 그의 말을 무시했고, 때로는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다. 이때 그를 지원한 사람이 그의 조수로 바로 노벨상을 함께 수상한 배리 마셜 박사이다.

마셜1951년 오스트레일리아 서남부의 금광마을 캘굴리에서 매우 어린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선반공이자 수리공아버지는 19, 간호생어머니는 18이었다. 소년 배리는 책을 좋아해 어렸을 때부터 학교도서실에서 아동용 화학시리즈를 모두 읽었다고 한다. 당시에 다양한 약품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으므로 화약이나 불꽃놀이용 물건을 만들기도 했다.

12살 그의 무용담은 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그의 여동생 메리우유병에 넣어둔 등유를 모르고 마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자 배리위급상황이라 판단해 구급차를 부르고 인공호흡을 시도해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이 마을 전체에 화제가 되었는데 막상 메리는 숨을 쉬고 있었으므로 인공호흡은 필요없었다고 한다.

그는 뉴먼대학,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대학을 거쳐 21결혼했고 1979년 로열퍼스병원에 채용되었고 1981년 위장학과에 배치되어 14살 위인 병리학자 로빈 워렌을 만났다. 1937년생에 태어난 워렌은 다소 특이한 인물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심한 강박증 소유자남의 이야기를 좀처럼 진지하게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공통점이 있어 궁합이 잘 맞았다.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보인데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고집불통이었다. 더구나 두 사람의 부인 모두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워렌의 부인정신과 의사, 마셜의 부인심리학자였으며 이들은 다자녀 가족으로 워런은 5, 마셜은 4아이가 있었다.

워렌1968부터 로열퍼스 병원에서 병리학자로 근무하기 시작했고 마셜과 만난 무렵에는 자신이 발견한 세균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병리학이란 질병의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일반적으로 환자의 세포, 조직, 장기의 표본을 검사해 질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진단을 내려 임상 의사들이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워런이 한창 현장에서 일하던 1970대는 새로운 진단 기기와 기법들이 속속 도입되었다. 특히 당대에 광섬유를 이용한 내시경, 전자현미경 등이 도입되어 이들로 위점막병리학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워렌과 배리 박사가 위속에 존재하는 헬리코박터를 발견할 수 있었던 요인이다.

여하튼 위속에서 세균을 발견한 그들은 주위의 비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983년 위장 속에 사는 세균의 배양에 성공해 여기에 헬리코박터 파이로리(Helicobacter pylori)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헬리코는 나선 모양, 박터는 세균, 파이로리는 위의 유문 부위를 뜻함). 간단히 헬리코박터균 또는 파일로리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Helicobacter pylori’에서 ‘helico’나선형, ‘bacter’세균(bacteria), ‘pylori’ 유문(幽門)이라는 뜻으로, 위의 유문부에 사는 나선형 세균을 가리킨다.

줄리오 비조제로(1846~1901)

한편 헬리코박터워렌이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1892 이탈리아 의학자 줄리오 비초제로(Giulio Bizzosero)가 이 세균에 대한 보고가 있고 1919년 일본에서 도쿄 기타사토연구소고바야시 로쿠조(小林六造)동물의 위속에 상재하는 병원체에 대해 보고했다. 1967년에하버드대학의 일본인 이토 스스무가 자신의 위에서 채취한 시료에서 세균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건가했으므로 그 세균을 질병과 관련지어 생각지 못하고 단지 위에 공생하는 세균이라고만 적었다.

여하튼 워렌의 발표는 예상대로 그를 곤혹스러운 사태로 몰아갔다. 많은 학자들이 그의 말무시했고, 때로는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다. 이때 그를 지원한 사람이 바로 노벨상을 함께 수상한 배리 마셜 박사이다. 워렌위장 속 세균을 찾아낸 2년 후인 1981 워렌은 같은 병원 위장학과에서 근무하는 마셜을 만난다. 마셜심한 위통으로 고생하는 환자의 검사를 의뢰하다가 알게 된 워렌을 통해 그의 위장 속 세균가설에 흥미를 느끼고 함께 연구에 몰두한다.

마셜과 워렌의 발견도 무시될 뻔했다. 다른 동료들은 파일로리균 역시 위장에 이상이 생긴 탓에 감염된 세균 혹은 검사할 때 다른 곳에서 혼입된 것으로 추측했다. 파일로리균이 반드시 위장 질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 게다가 위염이나 위궤양이 아니라 십이지장궤양파일로리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정 등이다.

마셜도 동요할 때인데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프리맨틀 병원이언 히스로프 박사배리 박사의 견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흥미로운 발견인 것 같으니 자신의 병원에서 연구를 계속하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마셜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프리맨틀병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파일로리균 연구를 계속했다.

로베르트 코흐(1843~1910)1905년 노벨 생리의학상

문제는 병원균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운 코흐의 법칙에 따라 배양한 미생물궤양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 비로소 위속의 미생물질병을 일으킨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었다. 마셜자신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새끼돼지감염시켜 위궤양을 일으키려는 실험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마셜은 한 단계 더 나가기로 결정했다. 의학사에서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그 방법은 홀데인스스로 토끼가 되는 법이란 논문의 내용을 보면 곧바로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처음엔 토끼를 실험했을 것이고 몇몇 연구는 그 방침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토끼가 어느 때 어떤 기분인지를 확신하기 어렵다. (중략) 대부분의 토끼는 겁을 먹는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한 일반적인 의대생이 개에게 그런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두 대주교세 통의 서류에 서명한 허가증이 필요하다.’

 

이러한 번거로움을 피하는 방법자신이 실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콜레라균을 마시고 인체실험을 감행한 독일의 막스 폰 페텐코퍼(Max von Pettenkofer, 1818 ~ 1901)의 선례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막스 폰 페텐코퍼(1818~1901)

폰 페테코퍼1818년 바이에른 주의 리히텔스하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문학을 좋아했지만 삼촌의 희망에 따라 약학을 전공했고 대학생이 되어 삼촌의 궁정 약국에서 수습을 받았고 1843년 뮌헨대학을 졸업한 후, 뮌헨중앙조폐국에서 근무했지만 생리화학에 관한 실험연구를 계속했다. 이 동안 담즙산(膽汁酸), 오줌 속의 히푸르산(馬尿酸, 크레아틴), 크레아티닌 등을 연구했고 1847년 뮌헨대학 영양화학 교수가 되었다. 당대의 열악한 위생상 문제를 제기하여 대기와 수중의 이산화탄소, 주거 내의 환기, 의복의 이학적(理學的) 관계 등에 관한 실험연구를 하였다. 1855부터 시작한 콜레라와 지하수에 관한 연구에서는 콜레라의 병원(病原)을 지하수에서 찾아냈으며, 코흐의 콜레라균설반대했다. 세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습기는 물론 지하수의 불결한 환경세균을 변형시키므로 깨끗한 세균을 사람이 마셔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코흐로부터 콜레라균 배양육즙을 제공받은 후 자신이 직접 마시겠다고 했다. 제자폰 페텐코퍼 대신하여 배양육즙직접 마시겠다고 하자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이 직접 마셨다.

 

나는 74세나 되었고 이제 치아도 없다. 내가 잘못된다면 학문을 위해 일하다 죽은 것이다.’

 

학자들은 그가 왜 콜레라에 걸리지 않았는지 미스터리로 본다. 콜레라병세균만 있어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으므로 그의 말은 틀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전에 받았던 접종 때문에 면역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폰 페텐코프자기 신체 실험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위대한 학자엄청나게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확신과 과감함이 오히려 오류에서 벗어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루이 파스퇴르처럼 다방면에서 활약했으며 사람의 생활환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위생의학의 학문 분야로 만든 최초의 인물가난한 농부의 아들임에도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894년 대학 교수를 사임한 후 일할 수 없게 된 자는 사라져야 한다자기의 신조에 따라 권총자살하였다는 점이다.

폰 페텐코프가 직접 콜레라균을 마셨다는 것은 결과는 어떠하든 유럽 과학계에서 매우 유명한 일화인데 마셜은 자신이 실험 대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동료 의사에게 자신의 위를 검사해달라고 부탁했다. 실험 전에 자신의 속에 헬리코박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실험 당일 미리 준비해두었던 헬리코박터10억 마리 정도 있는 배양액을 먹었다.

변화의 조짐3일 후부터 시작되었다. 자다가 일어나 쿠토를 시작했고 며칠 지나자 중성 위액토했다. 10일이 되자 다시 위를 조사하니 위점막이 단 10일 만에 여기 저기 헐어 있었고 점막에서 헬리코박터들이 발견되었다.

위내시경으로 충분한 증거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항생제와 위산 분비 억제제를 복용하고 2주 만에 궤양을 치료했다. 일부 자료에는 마셜 항생제 등을 먹지 않았음에도 위염이 자동적으로 치료되었다고 한다.

마셜 박사헬리코박터 파일로리를 섭취하자 즉시 궤양에 걸렸다는 것은 그가 매우 행운아라는 것을 알려준다. 현재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에 의해 상당수 사람들이 십이지장 궤양과 위궤양을 일으킨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염증이나 궤양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도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는 자신이 원하는 병에 걸렸으므로 자신을 실험체로 삼은 실험은 효과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병에 걸렸으므로 그의 실험은 효과적이었고 소화성 궤양은 단기간의 항생제와 위산 분비 억제제치료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건강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실험 결과웨런 박사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미국의 <스타>의 기자에게 마셜 박사가 죽다 살아났다는 식으로 과장해서 들려줬다. 이 스토리는 기니피그(실험동물) 의사가 위궤양의 새로운 치료법과 원인을 밝혀냈다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됐다. 이 보도 이후 헬리코박터와 위궤양의 관계가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고 곧이어 위궤양 환자를 대상으로 한 항생제 치료의 효과를 알아보는 대규모 임상이 곳곳에서 진행됐다. 우여곡절로 노벨상을 수상한 배리 박사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작가대니얼 부어스틴의 말을 인용했다.

대니얼 부어스틴(1914~2004)

 

지식의 최대 장애는 무지가 아니다. 자신에게는 지식이 있다는 환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