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13) : 남산지구 서남산(II)

Que sais 2021. 11. 2. 11:20

<배리삼릉>

배리삼릉경애왕릉에서 북쪽을 응시하면 소나무 사이로 보인다. 삼릉 8대 아달라왕(재위 154184), 52대 신덕왕(912917), 53대 경명왕(917924)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박씨. 또한 삼릉과 포석정 사이의 6대 지마왕, 장창골에 있는 일성왕 박씨. 시조인 박혁거세도 이곳 나정에서 출생했다. 선도산 일대가 김춘추 일가의 산소였듯이 남산 서쪽 일원박씨들의 터전으로 볼 수 있다. 삼릉에 묻힌 아달라왕 154년부터 184년까지 30년을 재위했는데 안내판은 아달라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달라왕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배리 삼릉

 

아달라왕의 업적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개통했다는 점이다. 당대에 험준한 산맥을 뚫고 고갯길을 열었다는 것은 그만큼 나라의 경제적 군사적 힘이 막강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불국사, 석굴암, 다보탑, 석가탑, 안압지 등등 많이 대부분의 유명 경주 문화재들이 통일신라시대 작품이이지만 보물 63 배리삼존석불 입상 7세기 전반 고신라의 작품으로 경주에서도 희귀한 유산이다. 원래 높이 2.75미터의 본존여래입상과 오른쪽 협시보살입상은 같은 장소에, 왼쪽 협시보살입상은 조금 떨어진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 현재와 같이 경주 남산 배리, 일명 선방골(禪房谷)수습·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배리삼존석불 입상

본존 여래상아미타여래로 추정하는데 여래의 둥글고 오동통하게 살찐 양 볼, 묵직한 코, 툭 불거져 올라온 , 입술 양끝을 쏙 들어가게 하여 만든 미소 등 전형적인 신라 불상의 얼굴인데 머리는 올록볼록한 나발(螺髮)과 민머리인 소발(素髮)이 중복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어 이 부분을 사족(蛇足)이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조각할 때 육계 밑붉은 색깔의 보석을 박는 예도 있지만 신라 불상으로서 사족을 나타낸 예는 극히 드문 예.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펴 위로 향해 치켜든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팔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도록 편 시여원인(施輿源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옷 무늬는 아래로 내려올수록 크게 조각되었는데 은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광배불상과 한 돌로 세워져 있다.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6세기 후반에 유행한 북제(北齊북주(北周)의 불상 양식을 닮았다.

왼쪽 협시보살 2.3미터 높이로 이중의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데 삼존 가운데 가장 조각이 섬세하다. 은 애기처럼 작아서 오른쪽 보살상과 대조를 이룬다. 머리삼면두식으로 장엄되었는데 정면에 큰 연꽃이 새겨져 있다. 에서 다리까지 드리운 구슬목걸이와 꽃송이로 장식된 굵은 목걸이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데 이런 장식은 6세기말 내지 7세기 초 중국 수나라 시대 보살상에서 유행되던 장식이다. 얼굴 모습은 본존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왼손은 어깨까지 쳐들고 정병을 쥐고 있는데 대세지보살로 추정한다. 광배에는 작은 부처 다섯을 새겨 놓았는데 그 부처들도 또한 작은 광배를 가지고 있어 특이하다.

오른쪽 보살상도 왼쪽 보살과 마찬가지로 2.3미터로 삼존불 가운데 가장 수법이 떨어지는데 관음보살로 추정한다. 연화대석은 사라졌고 대신 네모난 바위 위에 서있다. 보름달 같은 둥근 얼굴에 눈, , 상현달 같은 입도 모두 자그마하게 나타나 있다. 에는 세 개의 영락이 달린 목걸이를 걸었고 가슴에는 승기지(僧祇支)가 비스듬히 가려져 있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에 얹고 왼손은 허리 부분에 대고 있다.

배리 삼존석불은 당시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만들어진 대형 석불로는 가장 시대가 빠른 것으로 이후 경주에서 크게 유행한 석불의 첫 장을 열었다는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설치하여 조도가 떨어지면서 불상의 원래 조형미가 상당히 사라졌는데 본래의 아름다움을 찾는 다른 방법은 없는지 궁금하다.

삼릉 옆으로는 남산 남쪽으로 오르는 대표적 삼릉골 등산로가 나 있는데 이곳에서 상선암, 바둑바위, 금오산을 거쳐 각지로 방향을 잡을 수 있고 이 역으로도 가능하다. 사시사철 시원한 계곡물과 바람이 끊이지 않는다 하여 냉골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골짜기에 삼릉계 석불좌상(보물 666)을 비롯, 수많은 불상들이 포진해 있어 남산 필수 답사지로 각광받고 있지만 등산을 해야 볼 수 있다. 필자는 여러 번 삼릉계곡을 통해 오르거나 내려오는 답사로를 택했는데 이곳에서는 용장골에서 올라 삼릉골로 내려오는 길을 기본 일정을 잡으므로 서남산(B)’ 설명할 때 함께 다룬다.

배리삼존석불입상을 지나면 곧바로 포석정사적 제221호인 6대 지마왕릉(112134)이 있다. 지마왕릉은 밑둘레 38m, 높이 3.4m아담한 모습이다. 무덤은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일단 높은 곳에 만들고, 외부 모습은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으로 겉으로는 아무 표식물이 없는 단순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능 앞에 놓여 있는 잘 다듬은 돌최근에 설치한 것으로 영혼이 나와 놀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다는 혼유석(魂遊石, 석상)이다. 이 무덤은 남산 서북쪽에 분포하는 무덤 가운데 가장 특징이 없고,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경주 평지에 있는 고분과는 다른 입지조건이다.

안내판은 지마왕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말은 지마왕 시대 전쟁의 세월이었음을 알려주지만 2세기경에 속하는 무덤으로는 볼 수 없어 지마왕릉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지마왕릉

<유상곡수의 포석정>

포석정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의 서쪽에 있는 석구(石構)로서 사적 제1로 지정되어 있다. 대한민국 사적 1로 지정될 정도로 중요성이 부여되었다는 뜻이다.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에 헌강왕(875885)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 춤을 추는 모습을 왕이 보고 따라 추었던 데서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 또는 어무상심무(御舞祥審舞)라는 춤이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통일신라 시대 헌강왕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일연 스님은 이 일화를 매우 색다른 각도로 보았다. 지신과 산신이 장차 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리려고 춤을 추어 경계했는데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로운 일이 나타났다면서 술과 여색(女色)을 더욱 즐겼으니 나라가 마침내 망했다는 것이다.

포석정신라 패망의 현장으로 더 잘 알려진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경애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 11비빈과 종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 소위 노천파티를 열었는데 갑자기 후백제 견훤의 군사들로부터 습격을 당한다. 경애왕은 호위병도 없이 병풍을 손수 가리고 광대들에게 군사를 막게 한 후 이궁으로 달아났지만 곧바로 견훤에게 사로잡혀 왕비와 부하앞에서 자결한다. 이후 효종 이찬의 아들 ()가 왕위에 올라 신라 최후의 경순왕이 되지만 그도 왕위에 오른 지 몇 년 안 되어 견훤에게 항복함으로써 신라는 패망한다.

신라의 최후를 목격한 포석정이 설치된 포석정지는 경주 서쪽 후궁(後宮) 또는 이궁원(離宮苑)으로 면적이 약 1만 제곱미터이며,  2.3킬로미터 상류에 최대 저수용량 약 18천 세제곱미터 내외의 안골샘못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물이 포어(鮑魚) 모양을 따라 만든 수구(水構)로 흐르면 물 위에 띄운 술잔으로 술을 마시며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면서 즐기도록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

이를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시회(詩會)로 부르는데 중국 동진(東晉) 의 절강성의 작은 도시 소흥(紹興)에서 명필 왕희지(王羲之, 321379)로부터 비롯되었다. 왕희지난정(蘭亭)에서 가까운 문인 41초대시회를 즐겼다. 난정포석정과 다른 것은 자연석을 이용해 물길을 만들었고 그 규모도 훨씬 크다. 명대에 편찬된 난정수회도(蘭亭修會圖)는 그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데 연꽃 속에 술잔을 넣어 물 위에 띄워 놓고 유상곡수를 즐기는데 시를 짓지 못한 사람벌칙으로 술 석 잔을 마셔야 했다고 적혀있다.

포석정

포석정동서의 긴축 10.3미터, 가운데 회측 길이 4.9미터이며 수로의 폭은 일정치 않으나 평균 30센티미터 정도며 깊이도 일정치 않지만 평균 22센티미터. 측벽을 다양한 크기의 63개 석재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높이는 20cm 정도인데도 폭은 15cm 정도로 매우 안정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수로의 입구와 출구에서의 낙차 40센티미터 정도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의 포석정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도는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와류(渦流, 회돌이)현상이 생기도록 설계하였기 때문이다. 회돌이 현상이란 주 흐름에 반하는 회전 현상을 말한다. 포석정의 수로에서 물이 흘러 나가는데 12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시를 한 수 지으려면 최소한 7분 정도 걸리기 때문에 포석정에서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도록 만든 것이다.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아 수로를 따라 흐르지 않는 것이다.

유동훈 교수시뮬레이션에 의하면 포석정의 흐름은 근본적으로 비정상 난류 유동으로 확실한 회돌이 현상이 일어난다. 포석정에서 물이 흘러가는 도중에 10여 개 군데에서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며 그중 2군데에서 매우 큰 회돌이가 일어난다. 포석정은 물이 흘러가는 경로가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잔을 출발시킬 경우 술잔이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경사가 급격히 변하는 지점이나 꾸부러진 지점에서는 수로 폭을 확장하거나 내부의 바닥 면의 굴곡을 세심하게 설계하여 술잔전복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포석정에서 회돌이 현상을 만들어 술잔이 돌게 하는 것은 실용적인 면에서 매우 특이한 예. 보통 수로를 설계할 때 공학적으로 소용돌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설계한다. 소용돌이 현상이 일어나면 물이 돌아 흘러가는 부분에서 벽에 충돌하여 에너지가 분산되어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시무외인(施無畏印)

#시여원인(施輿源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