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23) 명활성지구

Que sais 2021. 11. 5. 14:19

<명활성>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라벌신라초기부터 외부 세력에 의해 많은 침공을 받았다고 적었다. 이러한 침입으로부터 서라벌을 지키기 위해 주위의 산에 성곽을 쌓아 국방에 대비했다. 그러나 신라는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도성 전체를 하나의 성벽으로 둘러싸지 않고 대신 높은 산 정상에 산성을 축조했다. 동쪽에는 명활성, 서쪽에는 서형산성과 부산성, 남쪽에는 남산신성고허성, 북쪽에는 북형산성이 그것이다.

경주 산성 중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남산지구에 포함된 남산신성제외하고 명활성(사적 47) 하나 뿐이다. 원래 명활산성으로 불렸으나 2011 명활성으로 변경되었다.

신라에 여러 곳의 산성이 있지만 명활성만 등재된 것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신라 초기의 산성대표하기 때문이다. 남쪽의 환등산을 둘러싸고 테뫼식(山頂式) 토성을 먼저 쌓았다가 나중에 북쪽에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식(包谷式) 석성을 쌓았다.

명활성

테뫼식이란 산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되게 한바퀴 둘러 쌓은 것을 말하는데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 같다 하여 테뫼식이라 하고 멀리서 보면 시루에 흰띠를 두른 것같이 보이므로 시루성이라고도 한다.

대체로 규모가 작고 축성 년대가 오래된 산성은 대부분 이에 해당하는데 단기 전투에 대비한 성곽이라 할 수 있다. 포곡식이란 성곽 안에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것으로 규모가 테뫼식보다 크다. 기본적으로 성곽 내수원지가 있고 활동공간이 넓은데다 외부에 대한 노출테뫼식보다 훨씬 적다.

일반적으로 테뫼식성에서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점차 포곡식으로 축조되거나 성곽의 규모확대하면서 만드는데 명활산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데 전체 길이가 약 5.6킬로미터로 결코 작은 성은 아니다.

이 성의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성왕(이사금) 4(405) 왜군이 이 성을 공격하다 철수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으로는 고구려, 으로는 왜적의 침입을 자주 받았던 때로 명활성남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 건설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 당시는 토성이었다.

자비왕(마립간) 16(473) 7에 산성을 개수하고 소지왕(마립간) 10(488)에 거처를 옮겨가기까지 13 동안 궁성으로 사용하는 등 비중이 컸던 성곽이라 볼 수 있지만 이것은 당시 신라의 정황매우 급박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의 광개토왕에 의해 백제의 개로왕아차성에서 살해되고 그의 아들 문주왕웅진으로 천도했으며 죽령과 동해안고구려위협하던 상황을 생각하면 자비왕명활산성으로 옮긴 것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진흥왕 12(551)에 이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의 정보를 상세하게 적은 명활산성작성비 1988년 발견되어 신라 산성 연구에 일조했다. 비의 크기는 높이가 66.8, 최대 너비 31.0, 두께 16.5이며 직사각형이다.

명활산성작성비

비문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축조 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축성 공사 실무자의 인명 및 담당 거리, 공사 담당 위치, 작성 참가자의 수, 공사 기간, 글쓴이의 이름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축성시 비석을 세우는 것은 책임 한계를 명백히 하고 축성에 참가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신라 영역에서 이러한 작성비 591에 설치한남산신성비가 있다.

비석에서 특이한 점 551 11 15에 쌓기 시작해 12 20일까지 35일 걸렸다는 글이다. 1개의 성곽을 축조하는 데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축성의 난이도를 감안할 때 35에 명활성 전체를 완성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구간 35일에 완성했다는 한정된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특이점으로 신라의 금석문 가운데 ()표기최초로 나와서 군제 행정구역 정비와 관련해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았다.

동궁과 월지에서도 명활산성비출토되었다. 이 역시 551명활성을 축조한 뒤 만들었으나 이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비석이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월지 축성 당시 석축의 호안석(護岸石)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월지를 만들 당시 이 비석을 여러 동강으로 내어 사용했는데 그 중 한 부분만 발견되었다고 생각한다. 동강난 내용으로 볼 때 다른 부분 역시 월지 내부의 석축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차후 나머지 부분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재료는 화강암으로 크기는 20*30 cm 정도이며 글자의 크기는 23 cm. 원래의 비석에서 왼쪽 아랫 부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해서체로 쓰여진 4 26가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삼국시대 지방에 대한 기록들이 거의 없는데 신라의 경우 지방통치와 관련된 기록각종 비석을 통해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비석에도 이들 기록을 찾을 수 있어 한국 중고기의 지역사 및 역사상을 추정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한편 신라시대의 격변 중에서 잘 알려진 선덕여왕(647) 말년진덕왕 원년 당시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상대등 비담쿠데타를 일으킨 곳이 바로 이곳이다.

비담의 쿠데타진압과정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상대등이었던 비담 여왕이 존재하는 한 나라가 옳게 다스려질 리가 만무하다.’라는 이유를 내세워 명활성을 근거지로 군사를 동원하여 선덕여왕폐위시키려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군인 김유신 장군의 부대반월성에 본진을 두고 10여 일공방전을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큰 별월성에 떨어졌다. 이것을 본 비담은 병사들에게 별이 떨어진 자리에는 반드시 피가 흐른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여왕이 패전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자 병사들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선덕여왕은 이 소리를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김유신이 왕에게 말했다.

 

길흉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니 오직 사람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새가 모여 들어 중국의 주나라가 멸망하였고, 기린을 잡았기 때문노 나라가 쇠퇴했습니다. (중략) 이로써 덕은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별의 변괴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유신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여서 연에 실어서 날려 보내니 마치 불덩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유신은 어제 밤에 별이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내었다. 김유신은 또한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자리에 제사를 지내면서 다음과 같이 기원하였다.

 

천도에는 양이 강하고 음이 부드러우며, 인도에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다. 만일 이 순서를 바꾸면 큰 변란이 일어난다. 지금 비담의 도당신하로서 임금을 모해하며, 아랫사람으로서 웃사람을 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로서 사람과 신령이 함께 미워할 일이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일이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하여 도리어 별의 변괴를 왕성에 보인 것이라면, 이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일이니 사실을 알 수 없다. 하늘의 위엄으로서 인간이 소망하는대로, 선을 선으로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기게 하여, 신령을 탓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김유신제사를 지낸 후 장졸들을 독려하여 돌격하자 비담 등이 패하여 도망했지만 김유신이 이들을 추격하여 목을 베고 구족을 멸하였다는 내용이다.

명활성은 근래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경주시명활성의 북문지 성벽 및 탐방로 정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6까지 탐방로 4.7조망마루 4를 정비하고 주차장과 휴계 공간 등을 갖춘다는 내용이다. 즉 주변의 보문관광단지,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동궁원 등과 연계역사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도다.

 

참고문헌 :

명활산성작성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활산성비, 나무위키

경주이야기, 국립경주박물관, 1991

그림으로 배우는 우리의 문화유산, 송석상 외, 학연문화사, 1996

경주역사기행, 하일식, 아이북닷스토어,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