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국립공원 대본지구>
명활성은 매우 큰 산성이므로 기본적으로 복원된 일부 일원을 맛 본 다음 경주국립공원 대본지구에 있는 문무대왕릉인 대왕암으로 향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본지구에 있는 대왕암을 비롯하여 감은사터와 이견대 등은 유네스코세계유산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신라의 간판 유산인데다 경주역사지구 자체가 이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므로 경주를 답사할 때 반드시 방문할 곳이다.
명활성에서 이들로 가는 방법은 간단하다. 감포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명활성에서 나와 감포로 방향을 틀자마자 길목에 보물 제168호인 ‘천군동 동ㆍ서 삼층석탑’이 있다. 넓은 평지에 동·서로 서 있는 쌍탑으로, 1939년에 복원한 것인데 두 탑 모두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양식이며 규모와 수법이 같다.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데 기단은 각 층마다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가운데에는 2개씩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각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 층마다 우주의 모각이 있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층마다 5단이며, 처마선은 반듯하게 깎았는데 네 귀퉁이에서 약간씩 들려 있다. 동탑의 상륜부는 전부 사라졌고 서탑은 그 일부를 남기고 있는데 갑석 위에 복발과 보륜, 그리고 수연 등이 남아있다. 복발은 두 가닥의 횡대와 네 면에 꽃 모양을 지닌 편구형이다. 3층 몸돌에서 한 면이 24㎝, 깊이가 15㎝인 사리를 두는 공간과 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8세기 후반의 작품이다. 탑신에 비해 기단부가 다소 큰 듯하지만 건실함을 잃지 않은 석탑으로 뛰어난 수작에 속한다.
경주국립공원 대본지구에 있는 대왕암으로 가는 중도에 있는 유적들도 빠뜨릴 수 없다. 우선 화랑고등학교 좌우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국보 236호인 ‘경주 장항리 서5층석탑’을 찾는다. 이름이 특이하다. 보통은 ‘경주 불국사 다보탑’이나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등인데 이곳은 ‘경주 장항리 서5층석탑’이다. 소재지를 설명하는 ‘경주’만 같고 그 뒤의 표기 방식은 아주 다르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은 경주에 있는 불국사에 가면 다보탑을 볼 수 있다는 뜻이며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경주의 감은사 터에 가면 동서 두 개의 삼층석탑을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경주 장항리 서5층석탑’은 사찰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항리라는 마을에 가면 본래 동서 두 탑이 있었지만 동탑은 사라졌으므로 서쪽에 있던 것만 남은 5층 석탑만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곳에서 금당 터와 석탑 2기, 불상 대좌 등이 발견되므로 사찰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명확한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이런 명칭이 생긴 것으로 일반적으로 장항사로 부른다. 장항리는 마을 앞 산등성이가 노루목을 닮았다는 뜻에서 붙은 지명이다.
금당 터에는 돌계단을 설치했던 흔적이 있다. 불상을 모셨던 8각형의 연꽃대좌의 윗돌은 모퉁이가 많이 부셔져 나갔지만 아랫돌에는 돋을 새김한 신수(神獸)가 잘 남아 있다. 대좌 위에 있던 불상은 좌불이 아니라 입불이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두 팔이 잘리고 허리 윗부분과 광배만 남아 있는데도 불상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 크기로도 유명하다. 국립경주박물관 뜰에 옮겨져 있는데 학자들은 광배와 연화문 등의 잔해로 미루어 석굴암의 대불과도 견줄 만한 대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장항사가 가람 배치에서 다른 사찰과 다른 것은 금당을 사이에 두고 앞쪽이 두 탑이 있지 않고 탑과 금당이 거의 같은 선상에 나란히 늘어서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양식상의 특징이 아니라 사찰터가 넓지 않았고 더불어 도굴꾼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들은 놀랍게도 도굴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탑을 폭파했다. 이때 상당수의 석재가 계곡 아래의 대종천까지 굴러 떨어져 추후에 복원할 때 이를 회수하여 사용했는데 일부 석재들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이 여파로 동탑은 몸돌을 모두 잃고 지붕돌만 차곡차곡 쌓여 있어 원형을 알 수 없는 모습이 되었지만 다행하게도 서탑은 상황이 좋다. 약 9.5미터의 서탑은 1932년에 복구되었는데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갖추고 있는 모습으로 기단부는 비교적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이 있으며,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을 본떠 조각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탑은 일반적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인왕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분황사 모전탑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1층 몸돌에 벗은 상체에 무릎 위까지 오는 짧은 군의를 입은 인왕상은 동서남북 면에 각기 2구씩 조각되어 있는데 이들 인왕상 중앙에는 도깨비 장식의 문고리와 문이 조각되어 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몸을 버티고 있는 두 다리의 근육은 당당하면서도 활기찬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부라린 눈과 큼직한 코, 듬직한 입, 강인한 턱과 불거진 광대뼈 등 조각이 매우 빼어나 당당히 국보의 영예를 누리고 있다. 이런 조각은 8세기 전반기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이 탑의 독특한 특징이 되고 있는데 전체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수법도 우수한 8세기의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장항리서5층석탑을 거치면 유명한 대왕암, 감은사터, 기림사, 골굴암 등이 지척으로 나오는데 어느 순서로 보아야하는 지 난감하기 마련이다. 기림사와 골굴암이 대왕암으로 향하는 길에서 약간 빠져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상황에 맞추어 슬기롭게 목적지를 택하기 바라지만 ‘끄새’는 기림사, 골굴암을 거쳐 대왕암과 연계되는 감은사터의 길을 택한다.
선덕여왕 12년(643) 천축국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했다고 알려지는 기림사(祇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의 본산인 불국사의 말사로 함월산 바로 아래에 있다. 그러나 기림사는 해방 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사찰로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렸다. 그런데 교통이 불편한 데다 불국사를 대대적으로 개발함에 따라 사세가 역전되어 지금은 거꾸로 불국사의 말사가 된 것이다.
함월산은 달(月)을 먹고 토함산은 달을 뱉는다(吐)는 뜻이며 기림이란 이름은 석가모니가 제자를 가르치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원정사의 숲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창건 150년 후에 원효대사가 기원정사에 착안하여 기림사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기림사의 본래 이름은 임정사(林井寺)였는데 광유가 우리나라에 오기 전에 머물렀던 절 이름이 임정사였다고 전하지만 분명치 않다. 『삼국유사』에 ‘신라 31대 신문왕이 동해에서 용으로 화한 선왕으로부터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얻어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잠시 쉬어갔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통일신라 초기인 신문왕 이전부터 있던 고찰로 생각한다.
현재 기림사 뜰 앞에 서 있는 작은 3층 석탑만 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보물이 4점이나 된다. 보물 833호로 기림사의 본전인 대적광전은 17세기에 건설된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배흘림기둥의 다포식 단층 맞배지붕이다. 넓은 전각 안에 거대한 소조비로자나삼존불(보물 958호)을 모시고 있는데 중앙이 비로자나불, 왼쪽에 노사나불 그리고 오른쪽이 석가모니불이다. 세 불상은 손의 위치와 자세만 다를 뿐 표정과 자세가 거의 같고 옷주름까지도 비슷하다. 1986년 대적광전에 있는 흙으로 빚어구운 비로자나불 속에서 고려시대에 만든 불경을 비롯한 많은 복장(服臟) 유물이 발견되어 보물 959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물전시관에 보관되고 있다.
이외에도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 보물 415)이 보관되어 있는데 건칠보살상은 연산군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건칠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종이로 입히고 그 위에 옻을 칠해 만든 것으로 이렇게 만들어진 불상은 매우 드물다. 둥글고 풍만한 얼굴을 가진 불상의 머리에는 2단 구조의 보관이 씌워져 있는데 높이는 91센티미터다. 현재는 금칠을 해놓았기 때문에 제 분위기를 찾지 못한다고 평한다. 우측 다리를 밑으로 늘어뜨린 유희좌(遊戱坐)를 취하고 있는데 이런 자세는 경주 남산의 신선암 마애보살상에서 볼 수 있다.
오백나한상을 모신 응진전(유형문화재 214호), 대적광전 뜰의 삼층석탑(유형문화재 205호), 약사전(문화재자료 252호)은 물론 대적광전 오른쪽에 버티고 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500년 수령의 보리수나무, 산신각, 칠성각 등 전각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진남루(鎭南樓)이다. 이 건물은 ‘남쪽을 진압한다’라는 뜻을 갖고 있으므로 승병활동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기림사의 인성 스님이 주변의 승려 279명을 승병으로 이끌고 궐기한 적이 있으며 의병장 이눌이 군사를 거느리고 기림사에 머문 적도 있다.
또한 기림사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모신 영당(影堂)이 있다. 본래의 영당은 현종 11년(1670) 경주부사 민주면이 김시습의 뜻을 추모하기 위해 용장사 경내에 오산사를 지었으나 고종 때 훼철되자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 중건한 것이다.
기림사에는 다섯 가지의 맛을 내는 물이 유명하다.
이를 오정수(五井水)라 하는데 대적광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옆의 장군수는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을 배출한다는 물이고 천왕문 안쪽의 오탁수는 물맛이 좋아 까마귀도 쪼았다는 물이다. 천왕문 밖 사찰 초입의 명안수는 눈이 맑아지며 후원의 화정수는 마실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북암의 감로수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 같다는 물이다. 그런데 장군수는 마시면 힘이 펄펄 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마셨는데 전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이 물을 마시고 반역을 꿈꿨다고 한다. 그래서 장군수 위에 삼층석탑을 세워 메워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장군수를 아예 마실 수 없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다섯 개의 샘물 중에서 지금도 마실 수 있는 물은 감로수와 화정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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