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탑의 배치와 장엄(莊嚴)
사찰 안의 탑은 사찰의 여러 건물들과 어우러져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이때 탑과 건물이 어떤 관계로 배치되어 있는가를 ‘가람배치(伽藍配置)’라고 한다. 예를 들면 탑과 금당의 관계에 따라 1탑3금당․1탑1금당․쌍탑식 등으로 분류한다.
1탑3금당식 가람배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주로 고구려에서 그 형식을 찾아 볼 수 있다. 탑을 한 가운데 두고 북쪽으로 한 개, 동서에 한 개씩 금당이 있어 금당이 탑을 삼면에서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고구려의 금강사지, 상오리사지, 정릉사지 등은 모두 이와 같은 1탑3금당식의 가람배치다.
1탑1금당식의 가람배치는 남북축선상에 탑과 금당을 하나씩 두는 형태와 동서로 탑과 금당을 두는 형태 두 가지가 있다. 백제시대의 탑은 남북축선상에 탑과 금당을 두는 형태로 군수리사지, 정림사지, 미륵사지 등이 이런 형식을 따르고 있다. 미륵사의 경우는 탑과 금당이 각각 세 개씩 있었으나 각각의 독립된 구역을 만들어 1탑1금당식의 형식을 취했다.
쌍탑식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 사천왕사지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망덕사지․보문사지 등에서는 목탑, 감은사지․천군동사지․불국사 등에서는 석탑으로 나타나 이후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이런 쌍탑식 가람배치가 기본이 된다. 이와 같이 금당과 탑의 관계가 변모하는 이유를 강우방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통일신라시대 전의 초기 사찰에서는 중문을 통해 사찰 안으로 들어갔을 때 정면에 거대한 탑이 금당 앞에 서 있는 구조였으나 통일신라 이후 탑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자 탑이 중앙에서 비켜나 좌우로 물러나면서 탑 대신에 중앙에 금당이 있는 구조로 변한다. 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탑 신앙이 불상 신앙으로 바뀌자 불상을 모신 금당이 중요시되어 상대적으로 탑의 위상이 낮아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사찰의 건축 계획에서도 초기 사찰들은 탑의 기단폭을 사찰 평면 배치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쌍탑식 가람에서는 탑과 탑 사이의 간격을 기준으로 계획했다. 그러므로 1탑식 가람배치를 탑 중심적 가람배치라고 하고 쌍탑식 가람배치를 금당 중심적 가람배치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다. 이는 동서로 금당과 탑을 배치하는 형태는 탑과 금당을 동일시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탑과 같은 형태를 갖고 있다고 해서 모두 탑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탑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석가의 사리를 봉안하는 것이고 둘째는 상륜(相輪)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리의 봉안이 석가의 무덤임을 알리는 실질적인 내용이라면, 상륜은 인도 스투파를 축소시킨 상징적인 형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모든 탑에는 상륜이 있다. 목탑이나 전탑에서는 주로 금속으로 만들었고 석탑은 돌로 저마다의 형태를 조각하여 올려놓았다. 물론 불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건립되는 모든 탑에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실 수가 없으므로 후대에는 다른 승려들의 사리나 불경, 작은 금동불 등 공경물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탑 안에 모셨다. 그래서 사찰에 들어가면 부처를 모신 법당 안에 있는 탑에 합장하여 예배하거나 탑돌이를 하며 기원하는 것이다.
세계 각국이 현지 상황에 맞는 여러 가지 형태의 상륜을 만들었는데 우리나라 역시 독특한 형태의 상륜을 만들었다. 상륜을 세우기 위해서 찰주가 필요하다. 석탑은 주로 쇠로 만든 찰주에 하나하나의 돌로 된 부재들을 끼우도록 되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상륜은 탑 위에 또 다른 탑이 서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상륜이 스투파의 완벽한 축소형이지만 중국의 상륜과 전혀 다른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상륜부가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륜부의 모습은 통일신라시대 탑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탑의 장엄(莊嚴) 즉 탑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도 인도와는 크게 다르다.
우리나라 석탑의 기본 형식은 평면 4면의 구조에 2중의 기단을 가진 형태이다. 그러므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생긴 면석(面石)이 8~12면에 나타난다. 이들 공간에 다양한 종류와 형태를 달리하는 조각이 화려하게 설치된다.
1층탑신에 목탑의 형식을 모방한 문이 조각되어 있으면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등장한다. 문이 조각되어 있지 않으면 사천왕상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불국토를 지키는 신장상(神將像)들이다. 또한 상층기단과 하층기단에는 팔부중상이나 십이지상들이 조각된다. 특히 팔부중상은 상층기단이 8면의 공간으로 구획되어 있어 조각이 가능했다. 이는 우리나라 탑 만이 갖는 독특한 특징이다.
지붕돌 처마 모서리 양쪽에는 소형구멍을 만들어 이곳에 금속으로 제작된 풍탁을 매달아 걸었다. 처마에 달린 풍경과 상륜을 잇는 체인에 달린 풍탁은 작은 바람에도 살랑살랑 흔들려 제각각의 빛과 소리를 내었다. 말하자면 시각적인 장엄뿐 아니라 청각적인 장엄도 고려한 것이다.
② 목탑부터 출발
신라에 탑이 전래된 것은 불교가 공인되던 6세기 경의 일이다. 불상이 중국과 고구려, 백제를 거쳐 전래된 것처럼 탑 역시 같은 경로를 통해 전해졌다. 중국에 탑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2세기 경이었는데 중국의 탑은 봉분 형태로 만들어진 인도의 산치탑과는 달리 여러 층의 누각 형태로 조성되었다. 중국인들은 탑을 부처와 보살이 사는 집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그들은 사람이 사는 집처럼 목재나 벽돌을 사용하여 탑을 만들었다. 누각식 중국탑은 4세기 경 고구려와 백제가 불교를 수용하자 이들을 모방하여 6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동안 목탑이 주를 이룬다. 이들의 예는 황룡사9층탑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현재 사라진 상태로 실물로는 보은 법주사에 있는 팔상전이 있다. 18세기에 건설된 쌍봉사 대웅전은 목탑의 고유한 기울기를 그대로 간직하여 3층목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녔으나, 불에 타 그 자리에 새로 복원된 건물이 있지만 원래의 고아한 맛을 잃어버렸음은 사실이다. 이들 탑을 보면 꼭 건물처럼 생겼으므로 법당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팔상전은 엄연히 목탑이다. 탑과 법당이 다른 것은 탑에는 붓다의 사리를 모셨고 법당에는 불상을 모신다는 점이다.
목탑은 목재로 만든 일반 궁궐 건물 등과는 매우 다르다. 굵은 원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기와로 지붕을 얹는 등 목조건물에 사용되는 재료는 다른 건물과 차이가 나지 않지만 여러 층으로 건물을 높이 올리기 때문이다. 목재로 고층 건물을 만든다는 것은 간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으므로 목조 건축을 짓기 위한 나무의 공급이 원활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연중 기온의 변화가 심하여 커다란 목탑을 세울 만큼 질 좋은 목재의 생산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의 신앙심을 따라갈 목탑을 계속 건립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건축 구조상의 문제점들은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한정된 목재 공급으로는 필요한 목탑을 건설할 수는 없는 일이다. 목탑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을 강구해야 했다.
목탑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창안된 것이 전탑이다. 돌을 벽돌처럼 깎아 만든 모전석탑이나 돌을 나무처럼 다듬어 세운 목탑 형식의 석탑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분황사의 모전석탑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네 면에 화강암 석재를 끼워 넣어 순수 벽돌로만 탑을 조성했던 중국 전탑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삼국통일 무렵 모전석탑은 목탑계 석탑의 양식을 절충하는 형태가 나타난다. 구운 벽돌로 만드는 전탑도 문제점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벽돌을 만들 수 있는 진흙이 많아야 했는데 이 역시 중국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한반도는 전탑을 만들 수 있는 진흙이 풍부하지 않은 반면에 곳곳에 화강암이 있었다. 당연히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있는 재료 즉 돌을 이용하자는 생각을 낸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석탑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성을 갖게 만든 요인이다.
이러한 변화는 경주에 사탑이 많이 세워지면서 석탑을 조성하기 위해 동원되는 인력과 경제력을 줄여야 했기 때문에 나타난다. 모전석탑은 바위를 일일이 작은 벽돌로 쪼개어 다듬어야 했지만 목탑계 석탑은 돌의 크기를 좀 더 크게 하여 부재의 수효를 줄이고 모양을 단순하게 하여 쌓는 아이디어를 도출했는데 의성 탑리의 오층석탑이 그것이다. 이런 탑들은 몸돌에서 한 단계씩 점점 넓혀가며 쌓다가 가장 넓은 면에서 다시 한 단계씩 좁혀가며 쌓는 식으로 옆에서 보면 한 층의 모양이 마름모꼴을 이룬다.
석탑의 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곳은 백제다. 백제는 돌 자체의 성질을 살려 목탑의 부재를 돌로 대체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익산의 미륵사탑(국보 제11호)이 그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서탑의 경우 1층 기둥 모양의 틀에 목재를 다듬듯이 배흘림을 주었고 기둥 위에도 목조 건축의 가구 수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두공과 방(榜) 등을 두었으며 넓은 판석을 다듬은 지붕돌의 처마 부분도 기와집의 지붕처럼 처마선이 약간 들리도록 했다.
문제는 석재로 이렇게 만들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돌의 성질에 맞게 세부를 단순하게 해서 다듬었는데 이렇게 만든 탑이 부여 정림사터에 있는 오층석(국보 제9호)탑이다. 익산의 미륵사탑보다는 훨씬 간결해졌는데 그래도 미륵사탑에서 보는 것과 같은 목조 건축의 느낌을 보여준다.
뒤를 이어 몇 개의 큰 돌만 깎아 세우는 방식을 채용한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덕동호 댐 건설로 수몰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된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 등이 등장한다. 이들 탑은 백제와 신라에서 각기 계통을 달리하며 발전했던 석탑 양식이 신라통일과 함께 하나로 융합되어 새로운 양식을 형성한 것이다. 곧 신라 석탑은 백제와 고구려,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으로 정립되기 시작한다. 이후 석재의 수를 극히 간소화하면서 구조도 함께 변화되어 갔는데 대표적인 탑이 나원리 오층석탑과 구황리 삼층석탑이다. 이들 탑은 감은사지⋅고선사지 석탑의 양식에서 기단부와 탑신부의 구조가 상당히 변화한 탑으로 신라 석탑 양식이 확립된 8세기 초반을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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