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씨 왕릉>
구정동 방형분에서 우회전해 경주 시내로 간다. 구정동 방형분부터 경주까지 계속 김씨 왕들의 왕릉이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남산 서편 비탈이 박씨 왕들의 안식처인데 반해 이곳에서부터 반월성까지는 줄곧 김씨 왕들이 편안히 누워 있으니, 신라 당대에 각 성씨들이 지역을 달리해 거주하고 묘소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정동 방형분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기본적으로 경주의 간판스타인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들어가는데 이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별도로 지정되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한국 최초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이들이 그만큼 중요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경주역사유적지구’ 틀 안의 답사가 아닌 별도의 일정을 잡으므로 구정동 방형분에서 우회전해 경주 시내로 간다. 구정동 방형분에서 얼마가지 않아 곧바로 신라 32대 효소왕릉(재위 692〜702, 사적 184호)과 33대 성덕왕릉(재위 702〜737, 사적 28호)을 만난다. 두 왕은 무열왕의 증손자이자 문무왕의 손자이고, 신문왕의 아들로 효소왕이 형인데 형제 사이인 효소왕과 성덕왕이 죽은 뒤에도 나란히 누워 우애를 나누는 것이 아름답지 아닐 수 없다.
효소왕의 재위시기는 신라가 3국을 통일한 후, 안정과 번영으로 향하던 때여서 비록 특기할 만한 치적이 없다 하더라도 의학(醫學)을 두었고, 송악(松嶽)ㆍ우잠(牛岑)의 두 성을 쌓았으며 서시전(西市典)ㆍ남시전(南市典)을 두는 등 시장을 개설하여 경제력을 확충하고 당나라와 일본과 문물을 교류하는 등 국력을 키우는데 열성을 다했다.
효소왕의 능은 밑둘레 57미터, 지름 15.5미터 높이 4.3미터로 원형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보호석인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몇 개만 보여 일반인들의 묘보다 규모가 조금 크게 보일 뿐 아무런 장식물이 없는 일반적인 형태의 무덤이다. 능묘제도의 발달과정으로 보아 선대인 신문왕릉보다는 발달되어야 하는데 이 왕릉은 초기의 형식이다.
일부 학자들은 무덤 앞에 있는 혼유석(魂遊石)이 빈약하고 무덤의 규모도 작아 통일신라기의 왕릉으로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효소왕릉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즉, 기록에는 효소왕을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적혀 있는데 지금의 효소왕릉은 현재의 망덕사터의 남남동 방향 약 8㎞ 거리에 해당하므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망덕사터에서 동으로 약 200m 거리에 인접해 있는 신문왕릉이 효소왕릉이며 대신 신문왕릉은 경주 남산에 있는 황복사지 3층석탑(皇福寺址三層石塔)에서 동편으로 약 250m 거리에 있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성덕왕도 신문왕의 둘째아들로 형인 효소왕이 후손이 없이 사망하여 왕이 되었는데 36년이나 되는 재위기간 동안 당나라와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통일 후 자신감을 가진 시기에 조성된 것인지 효소왕릉과는 급이 다르게 성대하게 만들었다. 능은 밑둘레 46m 높이5m인데 높이 90㎝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지만 심하게 파손되어 단 한 기를 제외하고 모두 목이 사라졌다. 성덕왕릉에서 돌사자와 문인석이 있는데 이들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지만 십이지신상이 판석에 새겨져 있지 않아 후대에 조성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성덕왕릉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龜跌)가 있다.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이 귀부(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96호)는 비록 비석과 이수가 없어졌으나 6각 거북등무늬나 기타 당초문(唐草紋)을 통해서 6세기부터 8세기 전반의 신라 왕릉에 사용된 귀부 제작양식을 알 수 있는 좋은 유물로 평가된다.
경주의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경주박물관 맞은편까지 이어지는 나지막한 우측 언덕을 신라 사람들은 낭산(狼山)이라 불렀다. 높이는 104m에 지나지 않지만 둘레 지형이 구불구불하여 마치 짐승처럼 여겨졌던 모양이지만 실제로는 신유림(神遊林) 즉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앙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구름이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아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실성왕이 낭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나무 한 점 베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사적 제163호인 낭산에는 신문왕릉(재위 681〜692, 사적 제181호), 선덕여왕릉(재위 632〜647호, 사적 제182호), 망덕사터(사적 제7호), 사천왕사터(사적 제8호), 능지탑(경북기념물 제34호), 중생사, 황복사터가 있다.
신문왕은 매우 행복한 왕이라 볼 수 있다. 아버지 문무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에 왕이 되었으므로 전쟁보다는 넓어진 국토와 늘어난 주민들을 어떻게 지배하는가가 급선무였다. 신문왕은 격변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 우선 귀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데 이 와중에서 왕비를 궁궐에서 축출하기도 했다. 명분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데 있지만 실제로는 왕비의 아버지인 김흠돌이 반란사건에 연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문왕은 문무 관료들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귀족들의 녹읍을 폐지하여 해마다 곡식을 지급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또한 국학(國學)을 창설, 학문을 장려해 설총(薛聰), 강수(强首) 등의 대학자가 배출되었다. 신문왕이 적병을 물리치고 파도를 가라앉게 하는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설화도 삼국통일 전쟁의 여세를 몰아 강력한 왕권, 안정된 지배체제를 이룩한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문왕릉은 무열왕릉보다 한층 발달된 기법으로 축조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무덤 주변에 자연석으로 호석을 배치하였으나 통일 이후에는 돌을 다듬어 쌓았다. 메주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호석을 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었다. 이 석축을 지탱하기 위해 가공된 삼각형의 받침돌 44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여 돌이 흘러내는 것을 방지했는데 이러한 형식은 왕릉에 12지신상을 두르기 직전의 모습이다. 이 삼각형 둘레돌 가운데 남쪽을 향한 한 돌에는 ‘문(門)’자를 음각하였는데, 그 뜻은 알려지지 않았다. 봉토의 동쪽에 상돌(石床)이 있지만 성덕왕릉의 것에 비하면 얕고 석재도 고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원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능이 망덕사(望德寺)의 바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제32대 효소왕릉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그 근거로 1943년 황복사 3층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사리를 넣었던 금동함 뚜껑의 기록을 보면, 신문왕이 692년 7월에 죽자 왕후와 왕위를 계승할 효소왕이 건립하였고, 뒤에 효소왕이 승하하자 성덕왕 5년(706)이 불사리(佛舍利)ㆍ아미타상(阿彌陀像)ㆍ다라니경(陀羅尼經)을 넣어 죽은 신문왕ㆍ신목왕후ㆍ효소왕의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문제는 학자들이 엄밀히 검토하여 확정될 것으로 생각된다.
신문왕릉 바로 옆에 사천왕사터가 있다. 사천왕사는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 중 하나인데 이곳은 신라인들이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 세계에 존재한 7군데 사찰 터 가운데 하나라고 믿었던 신유림(神遊林)이란 숲이 있던 장소다. 674년 김인문이 당나라군의 침입이 곧 있을 것을 의상에게 말하자 그는 즉시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사실을 알렸다. 이때 문무왕은 밀교승 명랑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물었더니 명랑은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 것을 권했다. 부처의 도움을 받으면 당나라를 물리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천왕사가 완성되기도 전에 당나라가 침략하자 명랑은 채색비단으로 사찰을 짓고 풀로서 오방(五方)의 신상을 만들어 밀교의 비법을 썼다. 그러자 당나라와 신라군이 접전하기도 전에 풍랑이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했다고 한다. 그 뒤 5년 만에 사찰이 완성되었는데 신유림이라는 명칭으로 보아 원래 토속적인 신앙의례를 치르던 곳이 호국사찰로 바뀌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폐사(廢寺)되어 금당(金堂)·강당(講堂)의 초석, 머리가 잘린 잘생긴 모습을 간직한 귀부 2기가 있다. 이 비는 문무대왕의 비로 추정되기도 한다. 육각 모양이 뚜렷한 거북이 등과 당초문, 커튼 모양의 주름 등이 보인다. 금당터 뒤로 목탑 자리 두 곳이 있다. 신라 사찰은 금당 앞에 삼층석탑이나 오층탑을 하나만 세운 일탑가람이 대부분인데 삼국통일 후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에 각각 탑을 세우는 쌍탑가람 양식으로 변한다. 목탑으로 쌍탑을 세우는 형식은 사천왕사에서 처음 보이며 석탑으로 쌍탑의 모습을 처음 보인 사찰은 감은사다. 당간지주도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이 화려한 장식을 갖고 있는 것과는 달리 별다른 장식이 없다. 유명한 예술가 양지(良志)가 천왕상과 탑의 팔부신장을 새겼다고 알려진다.
918년 사천왕사 벽화의 개가 울므로 3일단 불경을 강설하여 그치게 했고 920년에는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 나왔다 다시 벽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로 보아 사천왕사에 벽화와 소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천왕사는 「제망매가」와 「도솔가」를 지은 월명사 스님이 살았던 절로 유명하다. 그래서 사천왕사 앞길은 월명로, 마을 이름은 월명리다.
사천왕은 석가모니가 탄생하기 오래 전부터 있어 이 세계를 수호하는 신으로 불교 미술이 성립되는 서기 1세기 무렵 사방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처음 사천왕은 인도에서는 귀인(貴人)의 모습이었지만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복잡하고 화려한 갑옷을 입고 분노하는 모습의 무인상으로 변한다. 부처가 한가운데 정좌하는 수미산 아래 동서남북의 4주(州)를 지배하면서 불법을 수호하며 중생을 바른 길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불교 세계의 축소판이라도 볼 수 있는 이런 중요한 역할로 인해 사천왕은 질병과 재난을 없애고 적군의 침입을 물리쳐 국토를 수호하는 존재로 믿어졌다. 사천왕상의 특징은 어느 나라 작품이건 반드시 바람에 흩날리는 천의(天衣)를 두르고 있어 하늘의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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