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2) 석굴암(12)

Que sais 2021. 12. 15. 12:08

https://youtu.be/NTmgJK3JzX4

석굴암은 여러 번 반전에 반전을 일으키고 있는데 2017 또 다시 전실 유무 문제로 학계를 들썩거리게 했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1891년 석굴암 중수 공사상량문 석굴암 석굴 중수상동문(重修上棟文) 연구에서 석굴암 원래 모습엔 지금의 목조 전실 없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석굴암 중수 공사를 기록한 상량문을 정밀하게 분석한 것으로 그는 상량문을 볼 때 중수 공사 전에는 목조전실(木造前室) 등 목구조물이 없었다는 내용이다.

그동안 목조전실의 유무석굴암 원형 논쟁의 핵심인데 다시금 목조건물이 없었다는 자료를 제시한 것이다.

최교수석굴암 목조 전실은 원래 없었음에도 1891년 중수 때 새로 덮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당시 중수 공사에서 목구조물이 없던 석굴암의 외양목조 전각으로 이뤄진 보통 절과 같은 모습으로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공사 주체유가적(儒家的)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동양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위 마룻대와 아래 서까래를 뜻하는 상동하우(上棟下宇)를 고집하며 돔 부분에 기와를 얹고 팔부중상이 있는 부분을 목조로 장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 교수가 주장하는 것은 상량문의 재해석이다.

석굴암 전실

성낙주 박사상량문이 이전의 목조 전각이 허물어진 것을 재건한 사실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최교수는 그동안의 상량문 번역에서 몇 가지를 지적했다. 최교수신규(新規), 초창(草創)과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불사가 중수 이전의 형태와 다르다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존 번역에서 신규(新規) 새로운 규모로 해석했다. ‘()규모라고 본 것이다. 또한 구관(舊貫)을 과거에는 옛 모습에 비길 만하다라고 해석했는데 최 교수 구관(舊貫) 옛 모습이 아니라 옛 관례를 따랐다고 해석했다.

다소 어려운 내용이지만 그는 1891년 중수 공사의 목적으로 용궁(龍宮)의 제도가 거의 복구되었다.’라는 상량문 구절이 있음도 지적했다. 최 교수는 용궁의 제도중국문화권의 전통적 사원 건축 양식 상동하우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현재 석굴암은 그동안 수없는 논쟁을 야기한 내용으로 1960년대 보수 공사에서 입구에 목조 전실을 새로 세우고, 팔부중상이 있는 전정(前庭)부 상단목구조로 덮었다. 최교수의 상량문 해석에 의하면 19세기 말의 원형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지적이 나오게 된 연유도 설명했다.

그동안 상량문의 번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9남천우 박사상량문의 내용이 너무 추상적인 표현이고,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1960년대 석굴암 공사를 총괄한 황수영 교수상량문 전문을 해석했지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최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석굴암의 상량문이 주목받지 못한 건 변려문(騈儷文)이라는 고급 문체로 쓰여 번역이 어려운 특성 때문이다.’

 

그는 1891년 중수 공사에서 본존불이 있는 주실의 돔 위쪽기와를 새로 덮었다는 것도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상량문에서 보이는 견보(牽補) 견라보옥(牽蘿補屋)의 준말로 담쟁이덩굴을 끌어다가 새는 지붕을 덮는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당시 공사에서 기와를 덮었다는 표현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석굴암 공사를 주관한 황수영 교수도 이부분에 관한 한 앞으로 계속 보완해야 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여하튼 그동안 석굴암 전실 문제는 계속 논쟁의 대상이었다. 목조 전실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목조 전각이 그려진 골굴석굴도 등을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반대 측에서는 이 그림이 인근의 천연 석굴 사원골굴사를 그린 것이라고 반박했다.

정선 '골굴석굴도'

특히 이 부분에 관해 최 교수는 지금까지 발견된 상량문 이전의 고문헌석굴암목구조물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강조했다. 1708년의 불국사사적에도 석불사를 창건하였는데, 토목 공사와는 무관하게 순전히 다듬은 돌을 가지고 짜서 석조감실(石龕)을 만들었다라고만 돼있다고 설명했다.

18세기 중엽의 경주부 지도

석굴암의 원형에 대한 중요 정보를 담고 있는 석굴암 석굴 중수상동문 일제강점기 보수공사 도중발견됐지만 이후 종적을 감췄다가 1963년 보수공사 도중 석굴암 경내의 간이 화장실 문짝에 붙어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최영성 교수본문은 617인데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 잘려나가는 등 확인할 수 없는 글자가 160이지만 일본인 학자가 공개한 내용을 볼 때 문리상 판독에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상량문이 기록한 공사는 석굴암이 아니라 인근 암자의 중수였다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까지 현재인 석굴암 석굴인근 암자인 석굴암를 분명히 구분했다. 상량문석굴 중수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한편 강희정 서강대 교수 일제가 석굴암을 과거와 달리 변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석굴암 보수공사를 통해 조선의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키면서 문명화된 일본조선의 옛 영화를 되찾아 줬음을 과시했다.’

 

석굴암 문제는 그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주도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물답게 국제적 차원에서의 공감대도 형성할 필요가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과학적인 평가를 기초로 하여야 함은 물론 주위 자연 환경과의 조화도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한편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고 원형대로 재축하는 것에도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석벽콘크리트로 싸서 발랐기 때문에 콘크리트를 떼어내는 공사가 어렵다고 주장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본래의 석재에서 콘크리트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검증되지 않은 방법을 적용해 복원할 수 없으므로 현재 상태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현재까지의 석굴암 복원에 대한 정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석굴암을 복원한다면 남아 있는 원본이 또다시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다.

 

한마디로 당분간 복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석굴암에 석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석굴암에는 보물 제911높이 3.03m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 기단 위에 방형의 3층탑신(塔身)이 놓여 있는 특이한 형태의 삼층석탑이 있다. 지대석은 높고 큼직한 원형으로 입면을 사선으로 처리하여 원통형식을 이루고 있는데 형태가 독특하여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각형과 몰딩의 2단굄이 원형으로 다듬어졌는데 이를 받침으로 하여 면석(面石) 8으로 구성되었다. 각 모서리에는 기둥이 표시되었으나 각 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위는 바로 갑석으로 갑석부연과 함께 2단의 둥근 판석을 이루고 있으며, 이 하층기단 위에 좀더 작은 상층기단이 있는데 형태나 수법은 동일하다. 상층갑석 위에는 사각형의 각형굄 2으로 표현되었고, 이 위에 1층탑신이 놓여 있다.

석굴암 삼층석탑(보물제911호)

탑신 2·3층탑신에 비하여 훨씬 크고 높직하다. 1층옥개석은 평평하고 얇은 형태인데 옥개받침 3이어서 시대적인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2·3층옥개와 옥신석(屋身石)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어서 크고 높직한 1층탑신을 중심으로 둥근 대좌와 잘 대비되고 있다. 특히 직선적인 처마, 얇은 낙수면은 단아하게 느껴지며 전체적으로 원과 사각 팔각이 조화를 이루고 기단부와 탑신부 상하가 균형을 이루어 아름다운 신라석탑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9세기 석탑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특징과 진전사승탑에서 보이는 조화미도 나타나고 있어서 9세기 전기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석탑 가운데 단연 가장 뛰어난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진전사승탑(보물제439호)

신라 때에는 현대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국제적인 물물교류가 활발했으므로 불교가 지배하는 신라에서 석굴사원을 세우려는 열망이 대단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대규모로 석굴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암이나 석회암으로 된 큰 돌산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화강암이 대부분이어서 암벽을 뚫고 석굴사원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기서 번뜩이는 신라인들의 기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천혜의 장소를 더 이상 찾기 어려워지자 조각품을 조립하여 석굴처럼 만든 것이다.

신라인들은 이처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던 것이다. 석굴암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될 당시의 심사위원들이 석굴암을 직접 보고 나서 극찬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이제야 이해할 것이다. 석굴암이야말로 질과 양을 따지는 현대에 있어서 양보다는 질로서 승부를 걸어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외국에서 본 거대한 건축물과 정교한 조각품들을 보고 지레 겁을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 문화유산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석굴암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자랑스러운 유물임을 알게 되었으니 선조들의 예술에 대한 안목에 절로 머리가 숙여질 것이다. 시인 고은석굴암에 관해 이렇게 썼다.

 

자연석을 쓰지 않고 석굴암 전체화강석으로 된 인조 석굴이다. 바닥과 벽, 그리고 천공 모양둥근 천장을 쌓아 올렸다. (중략) 이 장엄하고 정교를 극한 석굴암은 이 나라가 자랑하는 신라 예술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는 예술이다. 구조와 설계, 전체와 부분의 조화, 율동과 선의 오붓한 아름다움, 풍염한 표현, 그것의 보존 따위는 신라 중기의 예술이 극도로 발달한 나머지의 정화인 것이다. (중략) 석굴암하나의 형용사로는 도저히 찬미할 수 없다. 차라리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마디의 형용사로써 석굴암을 찬미할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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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가 김대성의 개인사찰로 둔갑한 까닭, 최완수, 신동아 2001 1

[봉축특집3]과학의 원리로 만들었다, 김하영, 불교신문, 2004.05.21

신라 석불사의 석굴, 문중양, 뉴턴, 2004 8

비트루비우스의 균제비례를 가진 석굴암, 김형자, 과학향기 퓨전, 2004.10.20.

1912년 석굴암 주실 지붕구조 판명 의미, 김태식, 연합뉴스, 2005.1.8.

석굴암 홍예석은 원래 있었다, 김태식, 연합뉴스, 2006.1.4

석굴암 1천년 신비 수리·과학의 산물, 이재원, 파이낸셜뉴스, 200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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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일출과 석굴암 부처님, 성낙주, 성낙주의석굴암미학연구소, 2011.01.02

1200년 된 석굴암에 습기 차지 않는 이유는?, 조영선, 조선일보, 2014.05.06.

첨단공법보다 뛰어난 신라의 과학, 이성규, 사이언스타임즈, 2016.03.28.

석굴암 원래 모습엔 지금의 목조 전실 없었다, 조종엽, 동아일보, 2017.03.24

석굴암, 나무위키

http://blog.daum.net/tjddh8116/7391223

http://blog.daum.net/chakraba/61 성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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