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1) 석굴암(11)

Que sais 2021. 12. 14. 16:04

https://youtu.be/NTmgJK3JzX4

석굴암 전면목조건물의 설치가 최선은 아니어도 최악은 아니라는 설명은 전실이 존재하지 않은 즉 개방구조일 때의 피해를 생각해보라고 반문한다. 주실 벽면에 있는 감실(龕室)은 올빼미나 쥐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치기에 알맞은 구조인 것을 감안하면 신라시대에 적어도 전실의 지붕과 전면에 문은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일제강점기 때 주실 위부터 통째로 시멘트 1미터 이상 발라놓은 상태에서 목조존실과 돔 등은 당시 학계의 연구 수준과 기술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 것으로 이전보다는 석굴 내부가 훨씬 안정적이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팔부신중절곡형이냐 전개형이냐도 철저하게 반박한다.

한마디로 절곡형석굴암 본래의 건축적 구성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전개형이라는 설명이다. 석굴암의 중심축 위에는 오직 주인공인 본존불과 그 화신인 11면관음보살상이 있고 나머지 조상들은 완벽한 좌우 대칭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팔부신중의 경우에도 네 구씩 두 편으로 나누어 서로 마주 보도록 배열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설명이다.

광창의 경우도 논리를 들어 반박한다. 특히 광창목조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제거된 비운의 구조라는데 더욱 주목을 받았다. 목조 건물 때문에 광창이 제거되어 주실어두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법당이 꼭 밝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론을 펼친다. 신영훈이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석굴암은 지금처럼 관람의 대상으로 조영된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종교사원으로 건설되었다. 사원 조영불법(佛法)의 규범에 따라 건설된다. 광창이 없어도 좋은 것은 석굴암이 불상의 진열소가 아니고 유현한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법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 알맞은 분위기를 갖춘 공간이 필요하다. 세계 모든 사원이 노천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일정한 폐쇄된 공간으로 구성된 것은 그러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토함산 석굴암도 그런 성격을 가진 곳이다. 더구나 비보의 의도가 있으므로 그것이 노천에 드러날 수는 없다.’

 

이 어두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광창이 있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특히 석굴암광창이 설치될 경우 비바람은 물론 겨울의 몇 달 동안 석굴 내부방한(防寒) 상태가 되는 것도 문제다. 광창이 갖고 오는 빛의 효보다 광창으로 인한 피해가 그만큼 많다는 설명으로 적어도 광창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석굴암 앞에 목조건물이 있었느냐 아니냐는 1910년 이전의 사진으로 판정났다. 결론을 먼저 만든다면 목조 전실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성규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12년의 석굴암과 보수후의 석굴암

1910년 이전사진에서 전실 왼쪽 들머리 즉 들어가는 첫머리 부분은 석굴암이 일제에 의해 보수되기 전 석굴암 전실 세부를 찍은 최초의 촬영 자료이다. 그런데 전실 왼쪽의 들머리를 이루는 첫 번재상은 다른 세 신중들과 일렬이 아니라 금강역사상을 마주보며 90 꺾여있다. 1960년대의 공사로 현재는 신중들이 4구씩 일렬로 서서 마주보고 있다. 새로이 발견된 사진에는 현재의 배치처럼 첫째 신장상인 아수라가 놓여야 할 자리가 보이지 않고 단지 돌로 가지런히 쌓은 기단만 보인다. 이는 곧 아수라상매몰됐다 해도 원래는 서쪽으로 금강역사상을 마주보며 배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맨 앞의 양족의 아수라상과 가루라상은 다른 신장들에 직각으로 서 있었으니 결국 전실의 원형은 전실의 들머리 양 가장자리가 닫혀있는 절곡형(折曲形)이었다. 이와 같이 들머리가 직각으로 되어 있다면 필연적으로 전실이 목조건물 없이 자체적으로 하나의 독립공간을 형성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더불어 석굴암이 전체적으로 수학적인 비례를 가지기 위해서는 전실의 들머리 석상 두 구는 90로 꺾여 있어야한다.

 

<습도조절>

석굴 바닥의 샘물을 통한 습도 조절 문제는 계속 논쟁거리다. 내부 바닥 밑으로 찬 샘물이 흐르게 함으로써 온도 차이로 인한 벽과 천장의 결로 현상을 막았다면 바닥의 돌을 마치 구들을 놓듯 질서정연하게 시공해야 했을 텐데 1960년대보수공사 때 이러한 효과를 고려한 바닥 구조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샘물로 인한 습도 조절 문제는 단언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하튼 반론에 대한 반론이 있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현재도 석굴암의 훼손은 계속되고 있으므로 보다 현실적인 문제, 석굴암의 문제점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데는 모든 학자들이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 수많은 학자들로부터 대안이 제시되었으나 가장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방법석굴을 원형대로 다시 재축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지금과 같은 인공적인 조절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므로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옛 모습 그대로 재조립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뜻이다. 참고적으로 전 서울대 물리학교 교수남천우 박사석굴암 보존 방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석굴암 보존의 위기는 개악 수리공사 때문에 생긴 결과다. 그래서 연구 보고를 핑계로 관람객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말썽의 소지를 없애려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도 습기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즉 배후에 만든 이중돔 사이 공간의 온도를 밤중 대기온도보다 4, 5 높게 유지시켜 주고 출입문을 개방하면 결로 현상은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관람객의 출입도 가능해지며 공기 건조 장치도 필요 없고 진동과 소음도 저절로 사라진다. 굳이 수억 원을 새로 들여서 기계실을 밖으로 옮겨야 할 이유가 없다.’

 

총론적으로 이성규 박사석굴암의 문제점을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처가 필요하다고 적었다.

 

 석굴암 외벽콘크리트제거하고 다시 그 위의 콘크리트 돔철거한다.

 원래의 자갈층을 재구축한다.

 석굴암 입구 상부의 광창과 10개 감실들에 있었던 환기창복원한다.

 따돌려진 샘물 줄기가 다시 석굴암 내부 바닥관통하도록 한다.

 전실의 목조건물철거하고 동시에 들머리의 두 신중상의 각도를 다시 원형대로 90로 꺽는다.

 천개석의 바람구멍을 복원한다.

석굴암 자갈층(자료 sillae)

이성규 박사는 이상 6가지 항목에 걸친 원형복구가 이루어질 적에 석굴암은 과거처럼 공기정화장치의 도움 없이 건강한 호흡으로 인한 보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변경된 원형>

석굴암은 한국의 간판스타나 마찬가지이므로 조그마한 내용에도 대서특필되기 마련인데 2005 성낙주 박사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1912년 석굴암 주실 지붕 형태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은 석굴암이 원형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석굴암 주실 두 겹이상 기와지붕 사진

사진에 의하면 주실 지붕은 맨 위층에 기와지붕이 마치 고깔처럼 덮여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아마도 주실빗물 등이 침투하는 것을 1차로 차단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 기와층 아래로는 짙은 토석층이 두터운 층을 형성하다가 그 중간쯤에 또 다른 기와층이 드러나고 있다. 빗물 등에 대한 2차 방어선이라고 볼 수 있다.  2차 기와층 아래로는 다시 두터운 토석층이 이어지고 있으며 석재 돔과 연결되고 있다.

성낙주 2차 토석층과 돔 석재가 맞닿은 부분에도 3차 기와층을 부설한 흔적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어떻든 돔을 구성한 석재 위로는 적어도 2-3미터에 이르는 토석층과 기와층이 적어도 각각 2단 이상 번갈아 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태식 기자석굴암통일신라시대 창건 이후 퇴락과 중수반복했을 터이므로 이번 사진에 드러난 지붕 구조가 곧바로 신라시대 초창기 때의 그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아무리 새로운 자료가 공개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자료가 담고 있는 그 당시의 모습일 뿐이며, 그것을 확대해서 원형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중수가 있었다고 해도 전래의 고식(古式)을 따랐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에 이 사진에 담긴 정보가 현재로서는 가장 원형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무리한 일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여하튼 사진의 발견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건축기술자들이 석굴암 주위에 있는 많은 습기를 해결하려고 한 지혜를 다시금 보여주는 증거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또한 경주 석굴암  무지갯돌 1913년 일제의 보수공사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일제강점기 때 고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석굴암 본존불이 안치된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측에는 팔각기둥이 각각 설치돼 있고, 이 두 기둥은 홍예석이라는 아치형 돌로 연결돼 있다. 홍예석에 대해 지금까지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원래 석굴암에는 없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마구잡이로 보수를 하는 과정에서 억지로 만들어 넣은 것이므로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심지어 1913년 일제강점기 때 보수하면서 본존불 시야를 가리려는 악의에서 이런 짓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 보수를 할 때도 바로 잡지 않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근래 발견된 사진 자료에는 홍예석이 있었던 흔적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1909년 12월 석굴암 전경 사진

사진에는 정면 기준 오른쪽 돌기둥 위에서 안으로 돌출한 부분인 이른바 첨차석 측면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마침 뚫린 지붕 구멍을 통해 햇볕이 스며드는 바람에 첨자석의 구조가 확연히 보이고 있다. 첨차석 단면은 양끝이 귀처럼 뾰족하게 솟아있는데 반해 중앙 부분은 홈이 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홍예석을 얹었던 흔적이라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