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보다 170년 빠른 세계 최초의 과학영농온실
조선 세종 때 세계 최초로 온실을 만들었다고하면 곧바로 국수주의적인 주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한국인들이 자주 써먹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훈민정음, 금속활자, 측우기 등은 물론 비거(飛車)와 로켓 등을 만들어 세계인을 감탄하게 한 우리 민족의 지혜가 농업 분야에도 반영됐을 수 있다는 생각한다면 다소 생각을 달리할 지 모른다. 그런데 이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알려진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1990년대 말 <우리문화가꾸기회>의 이훈석 선생은 청계천 고서점에서 『산가요록(山家要錄)』이라는 헌 책을 구입했다. 고서수집이 취미인 그는 워낙 오래된 책 같아서 무조건 사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선생도 자신이 산 헌 책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팽개쳐 두었다가 우연히 그 속에서 동절양채(冬節養菜)와 온돌을 뜻하는 단어를 발견하고 책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2001년 10월 한복려(궁중음식), 김영진(농업사), 안덕균(본초학), 김용원(원예조경) 등 각계의 권위자들에게 자문한 결과 이선생이 구입한 헌 책은 『산가요록』원본이며 책에 적힌 온실에 관한 내용은 한국이 세계 최초로 과학영농을 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는 통보를 받았다.
18센티미터x26센티미터 크기의 한문 묵서로 된 이 책은 앞뒤부분이 심하게 손상돼 있지만 책의 끝 부분에 ‘산가요록 마침’이라는 기록이 있고 ‘전순의 찬 최유준 초’라고 적혀있어 전순의(全循義)가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전순의는 조선 초 세종-세조 때의 의관으로 의관 노중례, 최윤, 김유지와 함께 한의학의 3대 저술 중 하나인 『의방유취』를 공동 편찬했고, 음식을 통한 질병치료 방법을 적은 한국 최고의 식이요법서 『식료찬요』를 저술 했다. 또한 『산가요록』은 세종 때인 1450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우리 민족은 쌀 위주의 식생활에 채소를 즐겨 먹었다. 그것은 <농촌경제연구원>이 발표한 2000년 식품 분석표로서도 알 수 있다. 한국인의 채소류 1인당 연간 공급량은 187.6kg으로 이탈리아(178.9kg), 미국(134.2kg), 프랑스(125.2kg)보다 많다. 그러나 삼한사온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기후는 계절 변화가 뚜렷하여 겨울에는 채소 생산이 불가능하다. 이를 보완하는 방법으로 ‘동절모듬야채’인 김치를 개발했지만 겨울철에 싱싱한 야채를 직접 먹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지 않을 수 없다.
겨울철에도 채소를 먹기 위해서는 새로운 영농기법이 필요한데 방법은 단순하다. 겨울철에도 채소가 자랄 수 있는 온실을 만드는 것이다.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적힌 동절양채(冬節養菜)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제일 먼저 임의의 크기로 온실을 짓되, 삼면을 막고(蔽)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塗紙油之). 남쪽면도 살창을 달고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 구들을 놓되 연기가 나지 않게 잘 처리하고 온돌 위에 한자 반 높이의 흙을 쌓고 봄채소를 심는다. 건조한 저녁에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되, 날씨가 아주 추우면 반드시 두꺼운 날개(飛介: 오늘날의 멍석과 같은 농사용 도구)를 덮어주고 날씨가 풀리면 즉시 철거한다. 날마다 물을 뿌려주어 방안에 항상 이슬이 맺혀 흙이 마르지 않게 한다. 담밖에 솥을 걸고 둥글고 긴 통을 만들어 그 솥과 연결시켜 저녁으로 불을 때서 솥의 수증기로 방을 훈훈하게 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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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통해 겨울철에 꽃과 채소를 재배하여 궁중에 진상했다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기록들에 대한 의문점이 모두 해소되었으며 온실의 모형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 민족이 갖고 있었던 선진 제지 기술인 한지와 온돌을 십분 활용하였고 습기를 조절할 수 있도록 가마솥으로 물을 끓여 수증기를 공급했다. 560년 전에 현대 온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과학적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 전문가들이 놀란 것이다.
성종 2년(1471) 11월 21일 『성종실록』 제13권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왕의 전교(傳敎)도 과학영농온실이 조선조 초기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장원서(掌苑署)에서 영산홍(暎山紅) 한 분(盆)을 올리니, 전교(傳敎)하기를, "겨울 달에 꽃이 핀 것은 인위(人爲)에서 나온 것이고 내가 꽃을 좋아하지 않으니, 금후로는 올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장원서(掌苑署)는 궁궐에 쓰이는 꽃을 키우는 기관으로 이곳에서 철쭉과의 일종인 영산홍(暎山紅) 한 분(盆)을 왕에게 올리자, 성종이 ‘초목의 꽃과 열매는 천지의 기운을 받는 것으로 각각 그 시기가 있는데, 제때에 핀 것이 아닌 꽃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바치지 말라’는 뜻이다. 철쭉꽃이 피지 않는 겨울철에 인위적으로 영산홍을 피웠다는 뜻은 현대로 보면 상당한 과학기술의 소산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세종조의 온실이 세계 최초의 영농온실인 것을 확인하려면 온실의 역사를 정확하게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온실의 역사를 규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과거의 기준으로 채소가 자라지 못하는 겨울에 채소를 기른다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겨울에 햇빛을 받지 않고 방 윗목에 놓아 둔 콩나물이 자라는 것도 온실재배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겨울에 방안에서 자라는 꽃이나 나무들도 온실에서 자란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모순에 빠진다.
반면에 현대의 온실은 대체로 빨리 수확하고 연중 신선한 채소 공급이 가능하며 기르는 기간을 연장할 수 있어야하며 밖의 기온에서 싹트기 어려운 씨를 발아시킬 수 있어야한다. 이러한 현대적인 온실 개념을 과거의 온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 사회적 여건이 과거와 현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1619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난로를 설치한 온실을 세계 최초로 인정하는데 이 기준에 의하더라도 세종조의 온실은 독일보다 무려 170여년을 앞선다.
세계최초의 온실을 우리들의 조상이 건설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전문가들은 철저한 고증을 거친 후 2002년 경기도 남양주시 <서울종합촬영소>에서 온실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복원된 온실은 실내 넓이가 약8평이며 정남향의 가장 낮은 쪽의 높이 50센티미터, 정북향의 가장 높은 쪽의 높이 3미터인 경사 지붕으로 햇볕이 최대한 들어올 수 있다. 태양을 보다 많이 받아야 한다는 현대적 개념이 도입되어 다소 지붕의 형태가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기름을 칠한 한지를 바른 창호로 마감했고 눈 오는 날이나 밤의 보온을 위해 짚으로 만든 차양막이 창호를 보호하도록 설치됐다. 60여 톤의 황토 흙으로 만든 온실 벽은 40센티미터 두께이며, 내벽에는 역시 기름을 바른 한지로 도배해 햇볕이 실내에 골고루 반사되게 만들었다.
온실 바닥은 온돌을 먼저 깔고 그 위에 45센티미터 두께의 흙을 쌓았다. 온실 외벽에 설치한 2개의 아궁이로 불을 때어 온돌을 덥히며 아궁이 위에 놓인 솥에 물을 계속 부어 솥과 연결된 둥근 통을 통해 수증기가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복원된 온실의 또 다른 특징은 현재 사용되는 철물을 비롯한 건축자재들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고대에 사용된 건축 방식대로 시공했다는 점이다.
온실이 완성된 후 2002년 3월 무, 상추, 배추, 달래, 시금치, 근대 등 6종을 파종하였고 김용원 교수가 3월3일부터 3월23일까지 20일간 온실의 온도 및 습도를 조사했다. 온실부위별 온도의 변화를 06시, 13시, 18시, 22시 4회에 걸쳐 측정한 결과 구들 위 베드의 지중 온도는 섭씨 20도 이상이 유지되는 지속적 보온효과를 냈고 실내 온도도 섭씨 10도 이상으로 유지되었다. 이는 밖의 기온보다 평균 10도 이상 높은 수치이다. 특히 온실 밖의 외기온도보다 온실 내 지중온도의 편차는 야간에 25도 이상이나 되어 온실 효과를 충분히 얻을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식물 재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습도의 경우 한낮에 해당하는 13시에는 40%정도였지만 나머지 시간대의 습도는 생장온도에 적합한 70%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겨울에 난방을 하면 실내 습도가 30% 이하까지 내려감으로 실내 습도를 올려 줄 필요가 있다. 상대습도가 낮으면 식물이 손실된 수분을 보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증발시킴으로 식물이 시들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식물 생장은 일반적으로 상대습도 50~80%에서 일어난다.
우리 선조들도 이런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가요록』에 의거 해 온돌을 설치하면 실내공기가 따뜻해지는 효과는 있으나 습도가 너무 낮게 되는 결점이 생긴다. 그럼으로 이와 같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온실 뒤에다 가마솥을 걸고 수증기를 공급하여 습도를 조절토록 한 것이다.
특히 한지의 사용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일반적으로 온실의 경우 외기온과 온실내부의 온도 차이 때문에 채광부분에서 결로 현상이 생긴다. 결로 현상은 작물이 변색되는 원인이 되고 특히 결로 된 이슬이 식물에 떨어지면 차가운 온도 때문에 상처가 생기므로 병원균이 침투하는 등 식물생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근래에는 온실에 결로가 생기지 않도록 결로 방지 페인트를 칠하기도 하는데 복원된 온실의 경우 기름질한 창호부분에서 결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창호지의 가장 큰 장점은 현대 문명 기술이 만들어 낸 어떤 종류의 창문 재료보다 실용성이 높다는 점이다. 우선 창호지로 만든 창호는 햇볕 투과율이 45%를 넘으므로 일조량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호지는 눈에 안 보이는 무수한 구멍이 있어 방문에 발라두면 환기는 물론, 방안의 온도와 습도까지 자연적으로 조절된다. 온돌에 장판을 발라서 생활했던 우리의 주거생활은 방안에 습기가 많은 것이 문제이었으나 이 습기를 창호지를 통하여 자연적으로 배출되도록 유도하여 쾌적한 생활공간이 되도록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한지는 습기가 많으면 그것을 빨아들여 공기를 건조하게 하고, 공기가 건조하면 습기를 내뿜어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게 하는 신축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창호지를 흔히 ‘살아 있는 종이’라고 하기도 한다. 온실을 만들 때 창호지의 3대 특성 즉 통기성, 습도조절, 채광성을 적절히 이용했던 것으로 선조들의 슬기를 다시금 엿볼 수 있게 한다.
결론적으로 『산가요록』에 의한 온실이 세계최초의 과학영농온실로 부각될 수 있는 이유는 온실이 갖추어야 할 3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한국의 특징적 난방방법인 온돌을 사용하여 겨울철 난방을 도모했고 둘째는 한지에 기름을 발라 채광을 통해 실내온도를 높이고 습도의 조절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창호지만으로 습도를 조절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가마솥과 가열된 수증기를 실내로 유입하여 온도와 습도를 동시에 올려주는 복합적인 온실이 되도록 한 것이다.
세계 최초의 과학영농온실이 기록된 『산가요록』은 현재 국보 지정을 추진 중이다. 고서점에서 흘러 다니던 『산가요록』에서 세계 최초의 과학영농온실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 주위에 많은 미지의 자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쪼록 많은 사람들이 고서점을 방문하길 바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현재 남양주시 <서울종합촬영소>를 찾아가도 복원된 과학영농온실을 찾을 수 없다. 정통 온실 건설을 모토로 황토 흙으로만 만들었더니 온실 벽이 장마에 씻겨나가는 등 피해가 생겨 여러 번 수리를 했으나 관리상 문제가 제기되어 결국 철거했다는 것이다. 끝.
참고문헌 : 『신토불이 우리유산』, 이종호, 한문화, 2003
「산가요록의 분석 고찰을 통해서 본 편찬 년대와 저자」, 한복려, 조선초 과학영농온실 복원기념 학술 심포지움, 한국농업사학회 외, 2002년
「산가요록의 원예농업 및 온돌」, 이호철, 한복려, 조선초 과학영농온실 복원기념 학술 심포지움, 한국농업사학회 외, 2002년
「조선초 의학처방집 『식료찬요』발견」, 중앙일보, 2003.11.04.
「세계 최초의 온실은 바로 조선」, 이정모, 과학향기, 2005.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