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나이가 진화론의 핵심이 되자 1869년 다시 진화론이 공개토론에 나선다. 2차 공개토론 자체는 제1차 세기의 대결의 경우처럼 일반인들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문제는 지구의 나이에 관한 한 과학계와 대중들이 다윈보다 톰슨을 보다 지지했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다윈의 첫째 대결에서 진화론의 대변인으로 나섰던 헉슬리가 나왔는데 이의 반대측 인사가 톰슨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또한 논쟁의 장소도 <영국지질학회>였다.
다윈의 진화론으로 벌어진 두 번째 혈투는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다.
논쟁의 주제가 지구의 나이에서 지구상의 생명의 기원에 관한 논쟁으로 비화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현재도 논란의 대상인데 놀랍게도 헉슬리는 큰 틀에서 지구의 무생물로부터 살아있는 원형질이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톰슨은 이 발언을 물고 늘어져 진화론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데 이용했다. 그는 자연발생 가설을 반박할 수 있는 수많은 자료를 갖고 있다며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씨를 품고 있는 유성들이 우주 공간에 수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다며 그중 일부가 지구에 떨어져 생명의 시작에 필요한 것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소위 외계 유입설인데 이 문제에 관한 한 오늘날에도 이들의 논쟁은 아직 계속되므로 별도의 장에서 설명한다.
톰슨의 주장 즉 지구의 나이가 턱없이 작다는 주장을 완벽하게 방어하지 못한 진화론자들의 좌절은 충분히 상상이 가는 일이다.
물론 19세기가 끝날 무렵 과학계는 계속 발전하여 지구의 나이가 점점 늘어가는 추세였다. 그런데 1894년 켈빈경(1892년 작위를 받은 후 톰슨보다는 주로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음)도 지구의 나이가 40억 년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자신의 주장을 변경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명성 때문에 그가 밝힌 수치가 틀린다 해도 문제가 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지구의 년대 문제로 다소 켈빈이 다소 주춤하고 있을 때 그에게 구원군이 나타나 그를 구원해준 것도 그가 죽을 때까지 지구의 나이를 양보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다. 바로 존 졸리로 그는 1899년 에드먼드 핼리가 제시한 바닷물의 소금 농도를 원용하여 약 9,700만 년이라고 주장했다.
여하튼 존 졸리의 지구 나이는 켈빈경보다 10여배 높았지만 이 역시 다윈이 제시한 3억년에 비하면 작은 숫자이므로 켈빈이 굳이 지구의 나이를 재론할 필요는 없었다.
<지구의 나이 충분>
다윈이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 켈빈은 다윈이 사망한 후에도 계속 지구의 나이를 물고 늘어져 진화론에 치명상을 안겼다. 현재는 켈빈 경의 이론이 틀린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다.
켈빈의 실수는 지구 자체에 열원이 없다고 정의했기 때문이지만 켈빈 경이 몰랐던 열원이 지구 속에 숨어 있었다. 다윈이 사망한 후 14년 후인 1896년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에서, 그로부터 7년 후 마리 큐리가 라듐이 열을 낸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켈빈 경의 지구 나이 계산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했다.
특히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는 방사능을 이용해서 지구가 오래되었다는 사실은 물론 얼마나 오래되었는가를 측정할 수 있음도 발견했다. 러더퍼드는 1904년에 방사성 원소인 토륨이 어떻게 정해진 비율로 붕괴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련의 다른 원소들로 바뀌고 결국 납 형태로 안정화되는지를 설명했다. 이것이 '반감기'로 러더퍼드는 방사능 물질을 통해 지구의 나이를 측정할 수 있다고 <런던왕립과학연구소>에서 발표했다.
이때 글래스고 대학의 총장이 된 80세의 켈빈경 역시 참석했는데 러더퍼드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나는 어둑어둑한 방에 들어가자마자 청중석에 앉아 있는 켈빈 경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지구의 나이를 다루는 연설 뒷부분에서 곤경에 처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켈빈 경은 깊이 잠들었는데 중요한 부분에 이르자 그 신사가 똑바로 앉아 눈을 뜨고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때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고 나는 “켈빈경이 새로운 열 발생원을 발견하지 못한 조건에서 지구의 나이에 제한을 가했습니다. 단 새로운 열원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았지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예언적인 발언은 오늘밤 지금 우리가 고려하는 것을 가르킵니다. 바로 라듐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은 내게 환한 미소를 보냈다.’
켈빈은 러더퍼드의 설명에 납득하지 못했고 여전히 지구의 나이가 약 2,000만 년 가량이라고 생각한 채 1907년 사망했다. 한마디로 다윈의 진화론을 결코 인정치 않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할 때만해도 지구의 나이는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다. 1905년에 미국의 B. 볼트우드는 방사성을 사용하는 측정법을 개발하여 지구의 나이는 적어도 22억 년, 태양계의 나이는 50억 년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럼에도 켈빈은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한마디로 다윈의 진화론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숫자가 인정받은 것은 단 10년도 지나지 않아서이다.
새로운 세대의 과학자들이 지구의 나이로 인한 멍에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진화론자들도 켈빈의 영향력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은 C14와 같은 방사성 동위원소에 의해 절대 연령을 측정하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탄소에는 6개의 양성자와 6개의 중성자가 있다. 이러한 탄소를 C12라고 부른다. 그런데 미량이지만 C13과 C14가 존재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원소들을 동위원소라고 부르는데 이들을 이용해서 지질학적 시간을 알아낼 수 있으며 이런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개발한 사람은 1960년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리비(Willard Frank Libby)이다.
그런데 리비의 방사선측정법으로는 C14의 반감기가 단기(5700년)이므로 대체로 500년에서부터 35,000년 정도의 년대 측정에 효율적이다. 그러므로 지구의 연령 등 보다 오랜 것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반감기가 훨씬 장기간인 것을 사용한다. 반감기가 48억 8천만 년이나 되는 Rb-Sr 연령 측정법, 반감기가 13억 년이 되는 K-Ar 연령 측정법은 물론 Ar-Ar 연령 측정법, Th-Pb 연령 측정법, Sm-Nd 연령 측정법이 각 시료에 따라 사용되는데 이를 '어미원소와 딸원소의 비율에 의한 측정 방법‘이라고도 한다.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진정한 나이를 알기 위해 외계에서 날라 온 운석을 분석했다. 1940년대 학자들은 운석 속에 들어있는 납의 동위원소를 연구했다. 대부분의 운석은 태양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남겨진 우주의 쓰레기 조각들이다. 1953년 캘리포니아 공대의 클레어 패터슨(Calaire Patterson)은 직경이 1.2킬로미터에 달하는 유명한 애리조나의 대운석공을 만들어낸 운석 속의 납과 우라늄을 측정했다. 이 속에 우라늄은 거의 없었고 모든 원자가 납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운석은 태양계가 생겨날 때 만들어져 계속 태양의 주위를 돌다가 지구로 끌려들었다는 얘기다.
패터슨은 지구 속의 우라늄과 납 동위원소의 양을 운석과 비교하여 지구의 나이가 45억 5천만 년이라고 추정했고 이것이 현재 인정되는 지구의 나이이다. 진화론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걸림돌이었지만 새로운 지구의 나이는 다윈의 진화론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나이였다.
더구나 지구의 나이를 증명해 줄 증거도 발견되었다. 1984년 호주에서 발견된 손톱 크기의 지르콘 조각을 2001년 분석한 결과 44억 년 전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투명한 광물인 지르콘은 주로 보석으로 쓰이는데 지르콘의 연대가 44억 년이나 되었다는 것은 지구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생명체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지 모른다는 추정도 제시했다.
위스콘신매디슨 대학 지질학ㆍ지구물리학과 존 밸리 교수는 초창기 지구가 마그마 바다가 아닌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는 충분한 대양과 대륙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지르콘 조각이 발견되기 전 과학자들은 38억 년 전 생성된 것으로 믿어지는 한 바윗덩어리를 토대로 38억 년 전에 비로소 지구에 물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해 왔다.
다윈이 켈빈 경처럼 ‘경(Sir)’을 받지 못한 요인 중에 하나로 켈빈 경이 제시한 구체적인 지구 나이에 다윈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이야기이다. 영국 정부는 사실 『종의 기원』이 발간되기 직전 기사 작위를 수여하자는 건의에 찬성했고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은 이미 그 건의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종의 기원』이 발간되자 빅토리아 여왕에게 자문 역할을 하는 교회 측 인사들(월버포스 주교를 포함)은 그 건의에 반대 의견을 나타내자 결국 다윈에 대한 작위 수여는 부결되었다. 이 당시 『종의 기원』의 과학적 오류를 가장 강력하게 지적한 사람이 켈빈 경이었으므로 그는 다윈의 작위를 수여받지 못하게 하는데 적어도 음(陰)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07년 켈빈이 사망하자 그도 다윈과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성당의 안치되었다. 뉴턴 옆자리인데 바로 그의 숙적이었던 다윈의 무덤 옆이다.
참고문헌 :
「44억년 전 지구 最古 광물 `지르콘' 전시」, 이봉준, 연합뉴스, 2005.04.10.
『오류와 우연의 역사』, 페터 크뢰닝, 이마고, 2005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까치, 2005
『과학사 속의 대논쟁 10』, 핼 헬먼, 가람기획, 2007
『100 디스커버리』, 피터 메시니스. 생각의날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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