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아킬레스건, 지구의 나이>
다윈의 진화론이 인정받은데 가장 큰 걸림돌은 지구의 나이다.
지구의 나이는 화석의 불완정성과 연계되어 진화론의 반대측이 다윈을 공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는데 사실 전투의 발단은 다윈이 열었다. 그는 영국 남부 지역인 켄트, 서리, 서식스 등의 지질학적 변화가 무려 306,662,400년에 걸쳐서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다.
다윈의 주장 진화론이 너무나도 당시의 통념과 어긋나는 것은 물론 지구의 나이가 너무나 구체적이라 학계에서 곧바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라이엘이 지구의 나이를 5억 년 정도로 추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한 지구의 나이가 너무 오래된 것도 시비 거리지만 다윈이 지구의 나이를 3억 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306,662,400년이라고 정확한 숫자로 제시한 것은 사실 누구라도 의문을 제기할 소양이 있었다. 한마디로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숫자를 계산할 수 있느냐이다. 사실 이 숫자는 다윈이 철저함과 엄밀성을 기반으로 제시한 것이지만 너무 정확한 숫자를 제시한 것이 탈이었다.
다윈은 자신의 주장이 극심한 논란이 되자 『종의 기원』 제3판에서는 그 부분을 삭제했지만 일단 발표된 내용이므로 다윈의 정적들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당대인들이 철썩같이 믿고 있던 지구의 나이는 1650년대에 영국 성공회의 대주교 제임스 어셔(James Ussher)가 성경에 대한 그의 해석을 토대로 계산한 기원전 4004년이었다.
프랑스의 박물학자 조르주 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Georges louis Leclerc de Buffon)은 지질을 감안할 때 어셔 주교보다는 오래된 지구의 나이를 무려 75,000년에서 168,000년 사이가 될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지구는 35,000년 전에 냉각되고, 생물은 약 15,000년 전에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제임스 허튼은 지구의 역사를 수백 만 년 전으로 소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캄브리아기(Cambrian)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암석의 나이를 5억 년이라고 추정했다. 프랑스 베누아 드 마이예(De Maillet)는 해수면의 하강 관찰에 바탕하여 지구 나이를 계산했는데 놀랍게도 20억 년이라는 계산 결과를 얻었다.
지구의 나이를 과학적인 지식으로 계산할 수 있는 단초는 아이작 뉴턴의 친구인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가 당대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제시했다. 그는 바다의 염도를 측정한 다음 소금이 매년 바다에 추가되는 비율을 찾으면 지구의 나이를 계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다 염분의 진짜 이유라면 대양 자체도 같은 이유에서 소금물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바다 속 염분의 추가량을 관찰하여 만물의 존속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방법으로 계산하면 지구의 나이가 턱없이 낮아진다는 점이다. 추후의 일이지만 1899년 아일랜드 물리학자 존 졸리(John Joly)는 실제로 바다의 염도를 계산한 결과 지구의 나이는 9,700만 년이었다. 나트륨은 현재 매 년 6x107톤의 비율로 추가된다고 알려지는데 이 경우 바다의 나이는 2억5천만 년이다. 이와 같이 낮은 지구의 나이는 염수분무나 암염 퇴적물 등으로 땅에 돌아가는 소금의 손실량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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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당대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볼 때 지구의 나이는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우선 어셔 주교가 주장한 기원전 4004년보다 오래되었을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당대에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 한 명인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이 다윈이 제시한 지구의 나이를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점이다.
다윈을 그야말로 곤경으로 몰아넣은 톰슨은 절대온도를 밝혀낸 켈빈 경으로 더 잘 알려진 물리학자의 슈퍼스타 중 슈퍼스타이다. 켈빈은 19세기에 가장 훌륭한 사람 중에 한 명으로 거론된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이자 전기공학자로 인정받았고 5회 연속으로 왕립학회회장을 연임하기도 했으며 1892년 작위를 받아 켈빈 경이 되었다.
유명한 『과학전기사전』에서는 그를 ‘독일의 헬름홀츠와 함께 그 당시의 물리학을 1900년의 물리학으로 변화시키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라고 적었다.
그와 함께 물리학의 태두로 당대의 유명한 과학자인 독일의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w)는 그를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켈빈 경이 가장 훌륭하고 명석하며 유연한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멍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폰 헬름홀츠도 만만치 않은 사람인데 그가 이처럼 극찬할 정도로 각계각층으로부터 존경과 학식을 인정을 받고 있던 대학자였다.
켈빈이 과학계에 미친 영향은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는 측정 즉 실험의 엄밀성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과학자라면 다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신은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가? 그것의 모형을 만들 수 있는가? 이것들을 할 수 없다면 당신의 이론은 지식보다는 상상에 기초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이런 과학적 사고로 매사를 처리했으므로 응용과학(applied science)이라는 분야에서 톰슨을 그 선조로 간주한다. 그가 선박용 나침의, 선박용 수심측량계, 조석 예보기, 그리고 여러 가지 민감한 측정 도구의 개선을 포함하여 수많은 발명을 실용화하여 말하자면 톰슨은 당대에 거대한 산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문제는 다윈과 켈빈이 맞붙었다는 점이다.
다윈은 자연선택에 의한 점진적 변화로 인해 생명체가 달라질 만큼 시간이 충분하다고 설명했는데 켈빈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진화론이 성립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켈빈이 다윈에게 한 수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다윈으로서는 물론 과학의 발전에도 그의 반격은 불행한 일이라고 볼 수 있지만 켈빈이 다윈에게 한 수 가르켜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물리적 원리에 바탕하여 지구의 나이를 2000만 년에서 4억 년 사이로 넓게 발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켈빈은 비교적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켈빈 자신은 독실한 신자이지만 그렇다고 지구가 수천 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산에서 땅을 파 내려갈수록 더워진다는 것을 켈빈을 알고 있었다. 켈빈은 땅속으로 갈수록 더워지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지구는 조그만 행성들의 충돌로 생겨났고 충돌시의 에너지로 녹은 바위들이 한 덩어리로 되었다. 일단 충돌이 끝나자 새로 열을 얻을 수 없으므로 지구는 서서히 식어갔다. 표면은 빨리 식었지만 내부는 지각이 열을 차단하므로 뜨거운 상태로 남아있다.’
켈빈의 설명에 따르면 훗날 언젠가는 지구의 중심도 표면처럼 차가워진다는 뜻이다.
켈빈은 자신의 이론을 토대로 냉각을 설명하는 정확한 방정식을 만들어냈다. 켈빈은 지각의 응고가 2천만 년 미만 또는 4억 년 이상으로 처음에 계산했는데 이를 보정했다. 즉 자신이 지구의 나이를 너무 높게 계산했다며 아마도 1천 8백만 년과 2억 년 사이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그러면서도 9,800만 년 즉 1억년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계산은 당대에 유명한 자연과학자인 헬름홀츠의 가설을 보완한 것이다.
헬름홀츠는 위대한 사상가로 알려진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와 프랑스의 천문학자 피에르 시몽 드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 1749~1827)가 태양과 행성, 혜성들은 원시태양계를 이루고 있던 기체와 먼지구름으로부터 생겨났다는 성운설을 근거로 이런 과정이 지금도 태양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태양은 지속적으로 수축되고 있으며 태양을 이루고 있는 작은 물질들이 계속 서로 충돌하면서 그 과정에서 태양에너지가 생성되고 있다는 논리였다. 그에 따르면 태양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기간인 동시에 지구상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최대한 2,500만 년이라고 제시했다.
켈빈은 최초의 지구가 태양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뜨거운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지구가 오늘날 같이 식는데 걸리는 시간 즉 지구가 태양에서 분리된 시점이 앞에서 말한 약 1억 년 전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자신이 계산한 지구의 나이가 틀림없다고 자부하는 켈빈에게 다윈이 계산한 지구의 나이 3억 년은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도전이었다. 더욱이 켈빈은 다윈이 화석 등을 다루는 학자임은 틀림없지만 지구의 나이 등을 계산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물리학자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다윈은 지구의 나이와 같은 물리 분야에 문외한인데도 불구하고 전문가인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다윈의 무지로 밖에 볼 수 없다고 비난하며 진화론의 모순을 물고 늘어졌다.
켈빈이 워낙 유명한 과학자이므로 다윈에게 그의 주장은 치명상을 안겨주었다.
더욱이 켈빈 경은 지구의 온도에 관한 자료를 계속 수집하여 자신의 이론을 계속 보정해나갔는데 처음에 4억 년까지 추산했던 숫자에서 1억 년, 다시 5,000만 년으로 줄더니 1897년에는 2,400만 년이라고 확정지으면서 다윈의 이론이 요구하는 엄청난 시간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해서 말했다.
켈빈의 주장에 많은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열의 일당량을 밝힌 제임스 프레스콧 줄(James Prescott Joule)도 그의 연대에 동의했다. 1861년 그는 톰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당신이 최근에 대중에게 던져진 일부 쓰레기를 폭로하기로 했다는 데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윈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완성된 이론을 발표할 의사가 없다고 내가 믿어서가 아니라, 풀어야 할 어려운 문제를 지적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오늘날 대중은 아주 놀라운 것이 아니면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이 원숭이나 고릴라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철학자들보다 그들을 더 즐겁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중략)일부 위대한 과학자들이 지질학의 증거들을 신중하게 해독한 결과 세상은 엄청나게 오래 되었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그들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켈빈 경은 세상이 그들의 생각만큼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켈빈 경은 현재 살아 있는 과학계의 인물들 중에서 최고의 권위자이므로 우리는 그에게 양보하여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윈은 과거에 진화의 속도가 더 빨랐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지만 켈빈 경의 선언은 다윈에게 치명타였다.
다윈은 『종의 기원』 5판을 발행할 무렵, 톰슨의 계산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6판과 마지막 판(1872년)에서 다윈은 톰슨이 제기한 반론이 ‘지금까지 제시된 것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다윈도 보통사람은 아니다. 톰슨이 여러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계속 다윈을 공격했지만 다윈은 켈빈의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나는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첫째, 종이 년 단위로 얼마나 빠른 속도로 변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며 둘째 많은 철학자들은 과거에 흐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우주의 구성과 지구의 내부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는 아직 인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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