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 노벨상이 만든 세상/백열전등과 형광등

퇴출되는 에디슨의 백열전등과 형광등(1)

Que sais 2020. 10. 9.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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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만든 마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밤을 낮으로 만든 것이다. 요즈음도 벼락천재지변에 의해 갑자기 정전이라도 되면 온통 암흑천지가 되며 수많은 문제점이 생긴다. 집안에 있는 모든 가전 제품의 사용이 중단되는 것은 물론 비상 전원 시설이 없는 공장에서는 기계 가동이 중단되어 생산에 차질을 초래한다. 정전 시간이 길어지면 암흑을 틈탄 각종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갑자기 정전이 일어나면 수많은 상점들이 폭도들에 의해 피해를 본다는 것은 관례가 될 정도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전기가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고대 사람들은 해가 진 후 장작불, 횃불, 기름 등잔 또는 촛불로 어둠을 극복했다. 이런 방식으로 불을 켜면 불편한 일이 많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화재의 위험성이 항상 따랐으므로 이보다 편리한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안으로 나온 것이 대도시의 거리에 등장한 고래 기름을 사용하는 등이다. 고래 기름을 사용한 등은 급속히 보급되어 가로등은 물론 가정에서도 사용되었다. 자연스럽게 등에 사용하는 연료인 고래 기름에 대한 수요가 급등했고 고래를 잡기 위해 포경선이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허만 메일백경이라는 소설은 바로 이 가로등으로 소비되는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출어한 포경선과 모비딕이라는 흰 고래의 싸움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고래 기름 역시 문제점은 있었다. 소 기름에 비해 빛 효율이 훨씬 뛰어났고 냄새가 적었지만 기름이 엎질러져 화재가 발생할 위험은 여전했다. 런던의 대화재도 그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1666년 9월 4일 화요일 저녁에서  세인트캐서린 부두를 배경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무명의 화가의 작품

<길거리를 밝힌 가스등>

18세기 초반스코틀랜드의 발명가 머독가스등을 고안했다.

어려부터 발명가 자질을 갖고 있던 머독은 어느 날 토탄토기에 넣고 가열하다가 주둥이에서 나오는 연기 같은 가스에 불을 붙였더니 노란 불꽃을 내며 타는 것을 발견했다. 그 후 머독주전자 주둥이구멍을 뚫은 골무를 끼우고 을 붙이면 불빛이 밝아진다는 것을 알아내 버너발명했다.

머독이 얻은 석탄가스메탄과 수소 기체가 주성분이다. 머독1802년 영국과 프랑스평화조약을 맺어 이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을 때 자기가 일하는 공장 건물 가스 조명으로 찬란하게 장식했다. 이때 밤을 밝힌 머독의 아이디어는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고 곧바로 런던 거리 가스등이 설치되는 계기가 된다.

가스등은 곧바로 가로등, 공장, 가정을 파고들면서 고래 기름 등을 대체했다. 대도시의 밤이 가스등으로 밝혀지자 범죄율이 감소하고 시민들의 안전이 증대되는 등 획기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조명장치화재의 위험성이 따르므로 보다 안전한 조명 장치의 개발이 필요했다. 1802영국의 데이비(Sir Humphry Davy)볼타(Count Alessandro Volta)가 개발한 전지를 실험하다가 2가닥의 철심 끝에 각각 목탄 조각을 붙인 후 서로 가까이 대면서 전기를 계속적으로 흐르게 하면 방전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전선을 타고 흐르던 전자들이 탄소라는 소재를 거치면서 저항 때문에 빛과 열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는 1806유리관을 씌운 아크 전등을 발명했고 2년 뒤가로등으로 만들어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바로 아크등의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전극의 양쪽에 붙여 놓은 탄소가 열 때문에 곧 타버려 매일 전극을 갈아주어야 했고 불빛도 너무 강렬한데다 전기의 가격이 비싸 실용화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이다.

토머스 에디슨(1847~1931) 출처:위키백과

여기에서 인류 사상 최고의 발명가라는 에디슨이 등장한다. 에디슨84에 눈을 감을 때까지 무려 1,100여 개의 발명을 했다. 4중 전신기, 전화기, 축음기, 활동사진기 등을 발명하여 사실상 20세기의 문을 연 장본인으로도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의 최대의 발명은 아무래도 전기 시대의 도래를 알린 백열전등이다. 그는 유리관진공 상태의 원형으로 만들어 주면 필라멘트산화되지 않고 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무려 9,000여 개의 물질을 실험한 끝에 그의 집념은 성공을 거두어 필라멘트로 사용될 수 있는 물질을 찾았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불에 그을린 무명실이었다. 필라멘트를 사용한 전등은 처음에 45시간 동안 계속 켤 수 있었다.

백열 전등

에디슨전등을 발명하여 태양이 아닌 새로운 빛으로 밤을 낮으로 바꾸어 주었다. 전등의 탄생으로 비로소 인간의 눈은 보다 새로운 환경24시간을 모두 낮과 같이 사용하는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 전기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 없는 악몽이 된 것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인간의 삶을 원천적으로 바꾸게 한 에디슨이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문명의 이기를 갖다 주었으며 세계를 바꾼 사람이라고 칭해도 별 무리가 없다. 그에게 발명왕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도 인류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 중에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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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고집 에디슨>

에디슨에게 특히 흥미를 불러일으킨 책은 자연실험철학이었다.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골머리 아프게 생각하겠지만 이 책은 전기분해열전도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실험을 다루고 구체적으로 실험에 관한 삽화가 있는 등 현재로 보면 참고서였다.

에디슨의 장점이자 단점은 자신에게 제기되는 아이디어의 모든 가능성을 두고 수없는 실험을 직접하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려서부터이다.

그는 집의 지하실 구석실험실을 차리고 전기나 화학에 관계되는 실험에 몰두했다. 물론 실험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돈이 필요하므로 12살 때부터 그랜드 트랭크 철도의 기차 안에서 신문팔이를 시작했다. 에디슨은 단 3개월초등학교를 다니고 더 이상 다니지 않았으므로 시간은 충분했다.

15이 되자 기차 안에 들여놓은 인쇄기그랜드 트랭크 헤럴드(주간)직접 발행했다. 이 신문은 세계 최초의 차내 신문이었다. 물론 철도회사신문을 발행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회사의 허가를 얻었다. 신문 판매가 순조로워 어느 정도 자금이 모이자 화물차의 빈 공간화학실험실까지 만들었다.

기차 안에 실험실을 차린 것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어느 날 운 나쁘게도 열차가 급커브를 돌 때 생긴 원심력으로 인해 실험 장치가 엎어지면서 불이 나고 말았다. 열차는 급정지했고 다행히 불을 끌 수 있었지만 달리는 열차에서 실험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던 승무원이 에디슨의 귀중한 실험 도구를 모두 열차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때 승무원으로부터 주먹으로 오른쪽 귀를 맞아 고막이 파열되어 난청이 되었다고 알려진다. 실제로는 중이염 등 병 때문으로 추측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에디슨은 후에 중요한 모임에서는 난청인 귀를 안 보이게 하려고 반대쪽 귀를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고 한다.

그의 모든 실험기자재가 사라져 그가 원하는 실험은 불가능했는데 그야말로 그에게 놀라운 기회가 찾아왔다. 철로 위를 걸어가던 마운트클레멘스 역의 역장맥킨지 두 살 난 아들을 달려오는 열차로부터 구해낸 것이다.

이 당시에 가장 각광받는 분야 전신 기술이었다.

철로망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전신망도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전신 기술은 누가 보다 빠른 정보를 얻느냐로 금전적 희비가 엇갈려 정보가 늦은 회사를 순식간에 파국으로 몰아가기도 하고 극적으로 회생시키는 등 마법의 기술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나 전신기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전문직이므로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통 서부극 영화에서 모르스 부호를 치고 있는 전신기사들이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으로 전신기사들이 서부극에서 항상 깨끗하게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하튼 아들의 구출에 감명 받은 맥킨지에디슨에게 전신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초등학교3개월에 중퇴에디슨이 놀랍게도 전신기사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가 많은 전문가들을 제치고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침 숙련된 많은 전신 기사들이 남북 전쟁소집된 이유도 있지만 그는 남보다 빨리 전신 내용을 보낼 수 있는 기계를 이미 고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제일의 전신기사 타이틀에디슨의 신화가 일어날 서막을 알려주는 징조에 불과했다.

 

<에디슨의 발명 비결>

에디슨전신기사로 근무할 때, 당시로 보면 첨단 전문서적으로 분류될 수 있는 영국의 물리학자마이클 패러데이가 저술한 전기학의 실험적 연구를 읽었다. 이 책은 그에게 가장 약점으로 작용하는 수학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책에 나오는 실험을 거의 전부 직접 실험해 본다.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 출처:위키백과

그러나 끊임없이 상상력이 발동되는 에디슨 같은 사람에게 전신 기사 일은 따분하기만 했다. 발명에 타고난 재능을 보인 그는 좀 더 넓은 활동 분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바로 발명에 투신한 것이다.

그가 첫 번째 특허를 얻은 것은 1869전기투표 기록기이다. 투표기 자체는 우수했지만 의회에서 투표가 빨리 이루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므로 그의 최초의 특허실패로 끝났다.

전기투표기록기 (1869)

이때부터 에디슨은 발명이란 합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는발명을 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두 번째 특허주식상장 표시기였는데 남북전쟁 직후 투기의 붐을 타서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고 그 후 각가지 발명품을 팔아 1876년 뉴저지 주의 멘로파크거대한 응용과학연구소를 세웠다. 1871년 에디슨16세의 메리 스틸웰결혼했고 가정도 함께 옮긴다.

메리 스틸웰

연구소는 한마디로 발명 공장이라 볼 수 있다. 에디슨이 아이디어를 내면 세밀한 부분을 분업으로 개발했다. 이 연구소에서 에디슨의 최대 발명 중에 하나가 전술한 탄소 필라멘트 백열전등이다.

에디슨의 발명 방법뭐든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였다.

오늘날에는 사전에 방침을 정하고 그 계획에 따라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한 다음 샘플을 제작한다. 컴퓨터를 사용할 경우 시뮬레이션으로 결과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하나의 발명우연한 다른 발명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으므로 에디슨은 생각나는 대로 직접 실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효율성은 그야말로 뒷전이었다. 이런 방법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랜 시간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에디슨의 전설 중에 하나는 하루 20시간 이상 연구에 몰두했으며 잠은 많아야 4시간 정도였다는 것이다. 한 직원의 이야기는 에디슨이 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일벌레에디슨이 건강을 돌보지 않았음에도 그는 84까지나 살았음을 볼 때 그는 건강조차 특별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마치 나뭇가지와 같이 하나의 발명을 통하여 다른 발명을 계속 연구하는 종합적인 기술 개발을 원칙으로 했으므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만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는 기존의 아이디어가 자신의 종합적인 개발에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사용했다. 특허권으로 분쟁이 벌어질 때 자신이 불리하면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백열전등의 비사>

에디슨최대 역작으로 백열전등을 꼽지만 과학사를 볼 때 에디슨백열전등을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은 아니다. 그가 전등을 발명하는 데 사용한 핵심재료탄소에디슨보다 50년 전에 이미 실험용 전등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학자들은 적어도 12명의 발명가전등을 발명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디슨유일한 전등의 발명가로 인정하는 것은 발명과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방법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발명이라도 실험실이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면 쓸모없는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에디슨을 제외한 발명가들이 작동하는 전등을 생산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의 발명품실험실에서는 가능했다. 반면에 에디슨은 처음부터 전력을 생산하기 위한 발전기와 그것을 분배하고 통제하기 위한 전선과 퓨즈를 갖춘 종합시스템으로 설계했다.

에디슨전등보급하려면 수많은 부속기자재가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당연히 부족한 것이 많았는데 그는 이를 위해 수많은 발명을 유도했다. 송전을 위한 설비가 필요해지자 배전판과 적산전력계가 개발됐고 케이블, 스위치, 소켓, 안전용 퓨즈가 부산물로 탄생한 것이다.

에디슨실험실에서 처음부터 전등을 위한 전체시스템을 구상하고 자신의 전등으로 뉴욕 시를 밝히기 위해 발전소를 세웠으며 자신의 전등이 다른 발명가보다 더 탁월하다는 것을 대중이 믿도록 만드는 언론을 다룰 줄도 알았다. 에디슨의 이와 같은 처신은 그의 발명으로 모은 거대한 부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발명이 실제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어떤 시스템을 채택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탱크와 같이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

그가 과학사에 미친 중요성은 발명과 실용성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진공관의 발명백열전등발명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백열전등의 내부는 진공이다. 여기에 필라멘트하나의 전극이라 생각하고 또 하나의 전극을 추가하면 이극 진공관이 된다. 두 개를 덧붙이면 삼극 진공관이 된다.

에디슨에게 따라다니는 가장 유명한 말은 천재란 90퍼센트의 노력과 10퍼센트의 영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이다. 어떤 강연에서는 좀 더 과장하여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직관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단한 노력가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대단한 노력이란 대부분 배고픔과 피곤함이 따른다. 중도에서 포기하면 되지만 그 어려움을 넘어서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성공의 길로 들어갈 수 있다. 에디슨과 같은 사람도 노력을 일상화했다는 것을 볼 때 보통 사람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지만 일반 사람들이 90퍼센트 노력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에디슨의 실험을 해 보아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 미국이 소위 선진국이라고 볼 수 있는 유럽을 따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기술 개발에는 헛수고가 따르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헛수고를 많이 한 상태에서 새로운 신기술이 예상외로 나타날 수 있다. 에디슨도 수없는 실패를 했지만 헛다리품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천하는 의지에디슨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