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이휘소

교통사고가 막은 노벨 물리학상, 이휘소 박사(3)

Que sais 2020. 10. 10.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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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의 기초가 된 이휘소>

이휘소 박사노벨상 이야기는 추후에도 계속 등장하므로 이휘소의 업적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한다. 현재 물리학자들은 자연계를 구성하는데 4가지 힘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중력, 전자기력, 약력과 강력이다. 학자들은 이들 4가지 힘을 하나로 엮는 통일장 이론에 매진하고 있다. 1967 스티븐 와인버그 박사전자기력과 약력식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발표했다. 이것을 줄여서 전약 이론이라 부르는데 이 이론을 발전시킨 것이 게이지 이론이다. 전자기적 힘을 실어 나르는 입자를 게이지 입자라고 하는데 빛의 알갱이광자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게이지 입자의 행동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게이지 이론이다.

게이지 이론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계산의 기본 틀은 맞는데도 불구하고 계산한 결과가 실험값과 달랐다. 과학에서 실험치와 이론치가 일치하지 않으면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갖고 있더라도 이론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휘소가 도전하여 성공한 것은 이론과 실험값같아지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것을 재규격화라고 부르며 오늘날 가장 중요한 소립자 물리 이론이 되었다.

1977이휘소스티븐 와인버그와 함께 무거운 뉴트리노 질량의 우주론적 최소 경계치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들은 초기 우주 팽창의 흔적으로 쌍소멸을 통해 이윽고 다른 입자로 바뀌는, 충분히 무거우며 또한 안정적인 입자가 남아있다면 그들의 상호작용의 세기는 최소한 2GeV일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여기에서 이들이 다룬 입자는 윔프(wimps, Weakly Interacting Massive Particles). 윔프의 질량이 작아질수록 그 쌍소멸 반응 단면적의 크기도 작아져야 하는데, 이는 대략 m^2/M^4이다. 여기서 m윔프의 질량이며, MZ보존의 질량이다. 이것은 초기 우주에서 풍부하게 생산된 윔프들 중 가벼운 윔프무거운 윔프보다 보다 일찍 상호작용을 그만둔, 즉 우주의 온도가 보다 더 높았을 때에 상호작용그만둔 윔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휘소와 스티븐 와인버그의 계산에 의하면, 윔프의 질량2 GeV보다도 가볍다면 그 흔적의 밀도는 우주의 스케일을 뛰어넘는, 즉 있을 수 없는 값을 갖게 된다. 윔프의 질량이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이 경계를 -와인버그 경계라고 한다.

 

와인버그와 이휘소 박사

이 논문은 <피지컬 리뷰 레터>1977513일에 접수하였고, 197772539권의 네 번째 호에 실었다. 그러나 이휘소는 그해 616교통사고로 숨져 있었기 때문에 이 논문의 출판을 볼 수 없었고 이 논문은 사실상 그의 유작이다. 이와 같은 인연은 스티븐 와인버그크리스 퀵과 함께 직접 <피직스 투데이>이휘소의 부고 논문을 쓰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됐다. 크리스 퀵이휘소의 뒤를 이어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 물리학 부장이 되었다.

이 당시 이휘소 박사의 연구가 얼마나 돋보이는가는 두 업적 모두 노벨상을 받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747, 이휘소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17회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의 연사초청되어 전약 이론을 정리하여 발표했다. 이 무렵 와인버그의 전약 이론은 일반적으로 와인버그 이론이라고 불렸지만, 이휘소전약 이론에 대한 압두스 살람의 공헌을 인정하고 이 이론을 와인버그-살람 이론이라 불렀다. 이 덕에 압두스 살람스티븐 와인버그, 셸던 글래쇼와 함께 1979년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한다.

한편,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카르제스 여름학교의 이휘소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마르티뉘스 펠트만과 함께 -밀스 이론의 재규격화성공하였고, 이를 1972년 여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입자물리학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하였다. 하지만 당시 이들의 설명은 일반적인 경우에 모두 적용되지 않는 것은 물론 당시 물리학자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휘소가 이를 알기 쉽게 풀어주어 비로소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엇호프트지도교수 펠트만은 이러한 공적이 인정돼 1999년 노벨 물리학상수상했고 그로쓰, 윌첵, 폴리처 등이 2004년 노벨상을 수상한다. 벨트만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공동 수상엇호프트 역시 수상 소감에서 이휘소 박사를 만났던 것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었다언급하며 고마워했다.

데이비드 폴리처2004년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이휘소전약 이론에 대한 엇호프트의 연구결과재해석하여 알기 쉽게 풀어 쓴 덕분에 당시 학자들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폴리처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휘소뉴욕 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1972년 가을학기에 강의했던 내용을 대학원생 어네스트 에이버스와 함께 정리해서 <피직스 리포트>에 단행본 형식으로 발표한 게이지 이론이라는 논문이다.

여하튼 적어도 2004까지 이휘소가 살아 있었더라면 어느 해든 노벨상을 수상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 2004이라야 그의 나이 70여 세에 불과하므로 어려운 나이가 아니다.

참고적으로 현재까지 최고령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201997의 나이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존 굿이너프(John B. Goodenough) 박사. 그는 1990년대 이후 리튬이온 배터리를 개발하여 전기차, 노트북 등을 실용화하는데 기여했다.

 

<한국의 과학에 대한 우려>

1971 여름에 이휘소는 당시 한국과학기술원의 정근모 부원장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물리학 여름학교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런데 1972년 대통령 박정희유신헌법선포하여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국회해산되고 신문과 방송은 정부 검열을 받아야 했고 독재를 반대하는 민주 인사들은 체포되거나 집에 감금되었다.

이휘소는 한국의 이런 상황을 접하자 기자 회견을 열고 유신 헌법은 명백히 위헌이며 앞으로 일어날 불행한 사태를 대단히 우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성명이 나오자 <재미과학자협회>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치인이 아닌 과학자가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사람은 이휘소처음이었다.

이 사태는 이휘소와 한국 간에 상당히 껄끄러운 문제를 초래한다. 이휘소3공화국이 독재체제로 강화되는 것에 큰 우려를 표하면서 1972년 초 정근모 박사에게 그동안 진전되었던 것들을 모두 없었던 일로 하자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 중인 여름학교 사업재고하게 됩니다. (중략) 여름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 편으로는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실망되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엉뚱한 짓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유신헌법에 강력히 반대하는 세계적인 물리학자 이휘소유신정부로 볼 때 반드시 포섭해야 할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학술회의나 학계 심포지엄에서 연사로 초청하고자 했으나 그 때마다 박정희가 독재를 계속하고 있는 한 이에 동조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하곤 했다.

또한 박정희는 자주 국방을 내세우며 해외 유치과학자들을 국내로 불러들이면서 이휘소에게도 여러 차례 제안했지만 그는 과학을 전쟁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는 결코 찬성하지 않은 것은 물론 유신 독재를 반대했기에 응하지 않았다. 이휘소대표적인 제자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는 어느 날 핵무기에 관해 서로 이야기했는데 그때 이휘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피력하였다고 설명했다.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이휘소독재정권을 위해서가 아닌 차원에서 한국의 과학기술을 높이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1974년 이휘소20여년 만에 일시 귀국하는데 미국 국제개발청 차관에 의한 서울대학교 원조 계획의 일환미국 국무부자료 평가위원 자격이다. 당시 그는 미국국적을 취득한 상태로 한국인 이휘소가 아니라 미국인 벤자민 리(Benjamin W. Lee)라는 이름이었다. 평가위원들의 원조 타당성 조사 사업물리학, 수학, 생물학, 화학 네 개 분야에 각각 한 명씩 미국인 과학자가 분담하여 91일부터 102일까지 한 달 동안 진행됐다.

박정희의 독재 정권이 계속되는 한 결단코 대한민국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던 이휘소가 어떻게 해서 USAID의 평가위원 위촉을 수락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한민국 측에서 추천하였다는 이유로 미 국무부설득했을 수도 있고, 박정희를 싫어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한국의 과학 교육 만큼은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위 동료들의 권유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당시 이휘소박정희의 유신정권을 강력히 반대했으므로 그의 입국은 상당한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있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는 구소련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물리학자로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 박사1918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 대학교를 졸업하고 1930대에 대영제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

 

정근모 박사

자연스럽게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수한 인재인 그가 모국에서 연구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소련에 억류될 것을 염려한 카피차신변 보장이 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며 거절했는데 스탈린은 이에 직접 신변 보장 각서를 써주면서까지 모국 방문을 종용했다.

그러므로 카피차는 매년 여름 스탈린의 각서를 받고서 소련을 방문하게 됐는데 어느 해에는 카피차의 여름 방문 시기가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신변 보장 각서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사관 관리는 행정 처리가 늦어지고 있는 것일 뿐이니 걱정 말고 우선 소련으로 출발하라고 재촉하였다. 이미 여러 번 소련을 왕래한 바 있는 카피차별 의심 없이 귀국길에 올랐지만 그 길로 결국 소련에 억류되어 꼼짝없이 평생을 그가 극구 부정하던 소련에서 지내면서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휘소 박사는 이런 사건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박정희 독재정권 하의 대한민국 방문에 대해 더더욱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74년 방문은 개인 자격이 아니라 미국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박정희스탈린카피차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음대로 이휘소에게 손을 뻗지는 못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휘소는 만전을 기하여 신변 보장이 확실한 주한미군 용산기지 옆의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에서 묶었으며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자신이 대한민국을 방문하는 동안 만에 하나 박정희가 자신에게 손을 댈 경우 반드시 즉시 도움을 요청해야 할 곳들의 연락처를 미국의 비서에게 알려주었다. 조사를 마친 이휘소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에 훌륭한 과학 인력과 넘치는 의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시설이나 연구비가 불충분한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장기적 차원에서 기초 과학 연구가 중요합니다. 두뇌 유출에 대한 우려가 있읍니다만 이 문제는 한국의 산업이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입니다. 저는 유능한 과학자들이 해외에서 마음껏 연구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조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두뇌 유출 문제세계적인 화두인데 과거와는 달리 현재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움직이는 과학자들을 강제적 수단으로 자국에 묶어두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추세다. 한마디로 국경이 그다지 큰 장벽이 될 수 없다는 설명이다. 현재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컴퓨터 산업을 뒷받침하는 인력 중 상당수인도나 중국 과학 기술자라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휘소의 기본 생각은 두뇌 유출 문제는 자국의 과학 환경 수준을 끌어 올리면 해결된다는 뜻이다.

여하튼 이휘소 등 평가위원들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미국 정부한국에 800만 달러를 지원했는데 이는 당대 기준으로 엄청난 액수였다. 그는 1976에 다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회원으로 초청됐으며, 또한 이 해에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