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래?(한국불가사의)/황금보검

황금보검이 알려주는 신라와 훈족

Que sais 2020. 8. 31. 18:05

 

끄새-TV의 끄새에게 신라의 고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출토품 두 가지를 꼽으라면 금관과 황금보검(장식보검)을 든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꼽으라면 국보도 아닌 황금보검(보물 635)을 이야기하곤 했다.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금관보다 황금보검을 선정한 이유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어떤 이유로 황금보검을 제일 처음으로 꼽느냐고 다시금 질문한다. 이에 대한 답을 신라에 조예가 깊은 요시미츠 츠네오의 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보로워에(현 카자흐스탄)의 귀금속 상감검의 장식은 얼핏 보면 신라의 황금보검 장식과 전혀 무관해 보일 정도로 디자인이 다르다. 그러나 제작 기법은 모두 공통적으로 복스 세팅법에 의한 귀금속 상감법이고 상감한 귀금속 주위에 금알갱이를 장식하는 누금세공 기법도 동일하다. (중략) 그러나 신라의 황금보검에 비하면 보로워에 귀금속 상감검의 디자인이나 제작 기술은 훨씬 뒤떨어진 것이다.’

 

한 마디로 황금보검은 현존하는 보검 중에서 세계 최고의 디자인과 제작 기술을 갖고 만들었다는 뜻이다. 황금보검은 전체 길이 36센티미터, 최대 폭 9.3센티미터이다. 전체 모양은 칼자루 끝장식이 반타원형이고, 칼자루의 폭은 반타원형 장식의 지름보다 좁다. 칼집 입구는 역사다리꼴이며, 그 옆은 허리띠에 차도록 만든 고리를 붙였기 때문에 산모양이다. 칼집은 끝이 넓으며, 칼집 위에 반원형 장식 금구로 구성된 단검으로 표면에 석류석 등의 귀금속과 누금세공 투각으로 전체가 장식되었다. 칼몸은 철제이지만 의례용 패도로 만들어 진 것으로 뒤쪽에는 장식이 없다. 황금보검의 표면에 보이는 나선무늬를 이루는 각 부분의 전체 바깥둘레에 금알갱이를 장식하고 메달의 틀과 공백 부분에 금알갱이를 장식했는데 이들은 모두 그리스로마 기법이다. 그런데 5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보검이 출토된 곳은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으로 현재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태극무늬의 의미를 잘 아는 장인이 제작>

신라고분에서 어김없이 금귀걸이, 목걸이, 팔찌나 반지 등 금은제품들이 출토된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 등의 디자인, 기법, 기술은 로마 세계에서 비롯된 누금세공 기법이다. 금사슬 기술도 특징적이다. 사슬은 원래 그리스시대에 발달하여 로마 시대에 장신구용으로 대유행했는데 사슬은 금은제의 가는 선을 어떻게 꼬았느냐에 따라 여러 방식이 있다. 즉 사슬을 만들려면 금은제 가는 선과 그것을 꼬아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축적되어야 하는데 신라에서 출토된 두 갈래로부터 여섯 갈래 사슬을 이용한 장신구는 그것을 만드는 기술이 신라에 전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가는 선이나 금알갱이를 만드는 것은 매우 특수한 기술로서 단지 아이디어 차원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는 줄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주조된 금이나 은막대를 두 점의 석판이나 브론즈판 사이에 기워 압력을 가해 굴리면서 조금씩 가늘게 늘인다. 일정한 굵기가 되면 끝을 가늘게 만들어 마노나 브론즈 덩어리의 구멍에 집어넣어 천천히 당긴다.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하여 가는 금줄이나 은줄을 만든다.

금알갱이를 만드는 방법을 금속공예명장인 경주민속공예촌 삼선방 김진배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는 금은줄을 지름과 비슷한 길이로 잘라, 탄가루에 늘어놓고 다시 그 위에 탄가루를 덮는다. 탄가루 위에 다시 잘라낸 금은조각을 늘어놓고 그 위에 또 탄가루를 뿌린다. 이런 공정을 몇 번 반복하고 이것을 가열하여 금은줄 조각이 융해될 때까지 열을 가한다. 융해된 금조각은 표면장력에 의해 작은 알갱이가 된다. 이것을 세정하여 다시 석판 등을 겹친 사이에 끼우고 연마 처리해 금알갱이를 완성한다.

마지막으로 땜질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녹청(동록)을 갈아서 풀과 물로 반죽 상태로 만들어 금알갱이나 가는 줄에 묻혀 기판 위에 접착한다. 섭씨 100도에서 녹청은 산화동이 되고, 섭씨 600도에서 풀은 숯이 된다. 다시 섭씨 850도까지 높이면 숯은 산화동의 산소를 빼앗아 순동 피막을 기판 위에 남기고 탄산가스가 된다. 그대로 가열하여 섭씨 850도에 달하면 피막이 된 동은 기판의 금, 금줄 등과 반응하여 합금되면서 땜질이 완성된다. 한마디로 금의 마술사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기술이다.

황금보검 중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세 개의 파무늬 즉 태극무늬이다. 일반적으로 태극무늬 안에는 다른 무늬를 새겨 넣지 않는다. 그런데 황금보검에 들어 있는 세 갈래의 태극무늬 안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들어있다. 특히 각 공간에 매우 균형 있게 능숙한 방법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제작한 사람은 태극무늬를 매우 자주 사용하였고 이 칼에 의도적으로 삽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개의 태극무늬 안에 꽃봉오리와 세 잎 무늬, 때로는 사람의 머리나 동물머리 형상을 박아 넣는 것은 동유럽 트라키아(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구권) 지역에서 살던 켈트인들이 즐겨 사용한 무늬로 일반적으로 켈트파라고 한다. 이들이 잉글랜드의 북부 즉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이주하여 켈트인이 된다.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Brave Hart)는 바로 스코틀랜드의 켈트와 잉글랜드와의 알력을 주제로 삼은 것으로 아직도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이 영국인이라는 것은 거부한다고 한다. 근간 스코틀랜드가 영국에서 분리될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다.

요시미츠 츠네오 교수는 그리스 소용돌이무늬와 로만로렐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황금보검을 제작한 금세공 기술자는 로마문화에 정통한 사람이며 황금보검을 주문한 사람은 켈트파(태극무늬)를 잘 알고 있는 트라키아라는 광대한 지역에 근거지를 가진 어떤 지배자 중에 한 명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트라키아에서 신라까지의 거리는 7,0008,000여 킬로미터로 오늘날의 교통수단을 알고 있는 현대인의 거리감각으로도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거리다. 그러면 트라키아 어떤 지배자가 최고의 의례용으로 만든 황금보검을 아시아의 최동단이라고 볼 수 있는 신라 계림로 14호분의 피장자가 어떻게 갖고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보물이 동유럽에서 신라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트라키아 지배자의 사절이 직접 신라로 가져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의 사절이 트라키아 국에 가서 왕을 알현한 후 하사받은 보물들을 갖고 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 당시의 상인들이 신라로 황금보검을 갖고 왔을 것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이러한 보물 중에 보물을 상인을 통해서 트라키아에서 신라로 전달했다고는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로마 제국의 유물들은 하나같이 신라 유적지에서만 출토되었다. 당시에는 고구려와 백제, 가야, 신라로 나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신라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은 이들 유물들의 목적지가 오직 신라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금보검이 계림로에서 발견되려면>

근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매우 흥미있는 자료를 발표했다. 경주에서 발견된 치아분석 등 최근 과학적 성과를 반영한 결과이다.

 

피장자는 남성 2명으로 이들이 묻힌 시기는 6세기 초임을 밝혔다. 신장은 150160센티미터로 추정되고 두 남성이 함께 묻히게 된 이유로는 전쟁이나 전염병에 의한 사망이다. 황금보검은 유럽 고고학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물로 제작 시기는 5세기경이다. 또한 황금보검은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유행한 단검 형태로 동로마제국 및 5세기 유럽 각지의 이민족 사이에 퍼져 나가던 금세공기술(클로아조네(cloisonné) 기법)이 결합한 것으로 중앙아시아의 집단이 동유럽 즉 트라키아의 금세공 기술자에게 주문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발표에 의하면 5세기경 중앙아시아의 누군가 트라키아지방에 제작을 의뢰하였고 이것이 어떤 경위로든 신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신라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로마의 유물들을 감안하면 트라키아 지역에 있던 누군가가 직접 중앙아시아식의 단검을 제작 의뢰했고 이것이 8,0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신라로 보내졌다고 추정하는 것도 무리한 일이 아니다.

학자들이 황금보검의 발견으로 놀라지만 이러한 보물이 동유럽에서 신라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하나는 트라키아 지배자의 사절이 직접 신라로 가져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의 사절이 트라키아에 가서 지배자를 알현한 후 하사받은 보물들을 갖고 오는 것이다. 상인이 구입하여 경주의 지배자에게 판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황금보검 정도의 세계 최상급 보검은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정도의 제품이라면 최고의 의례적인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황금보검이 제작된 5세기는 훈족이 트라키아 지역에서 명실상부한 로마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훈족의 지배민족이 신라와 친연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로마제국과 혈투를 벌리던 훈족의 지배자가 신라 왕가에 선물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 점은 로마제국 쇠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의 다음과 같은 글로도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아틸라의 지배권이 어디까지 미쳤는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볼가 강변까지 확보했다.

훈족의 왕은 전사(戰士)로서 뿐만 아니라 마술사로서도 두렵게 여겨졌다.

무서운 유연(柔然)도 아틸라가 공격해 격파했다.

중국의 제국과 대등하게 동맹 관계를 맺고자 사절을 파견했다.

 

로마를 제패했다고 생각한 아틸라가 중국과 동맹관계를 맺기 위해 사절을 파견했다는 사실은 아틸라가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한 결과 실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훈족은 중국과의 혈투에 패배하여 4번에 걸쳐 서천(西遷)한 이후 인근을 제압하면서 흥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훈족이 중국을 생각할 때 남다른 콤플렉스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틸라가 유럽에 들어와 로마를 제압한 후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중국과 새로운 위치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든가 그렇지 않다면 중국과 소통해야 할 남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대사건을 기획하려면 상당한 준비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고 생각한 훈족의 아틸라가 공식적으로 사절단을 보낼 정도라면 소위 사전 정지 작업을 위해 여러 번의 사신을 보냈음직하다. 이때마다 적정 규모의 선물 즉 재보를 보냈을 것이며 보다 큰 규모의 공식 사절을 보낼 때는 엄청난 재보를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중국이라는 제국을 상대로 하려면 더욱 많은 재보를 보냈음이 틀림없다.

당시 중국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를 이어 남북조시대가 등장하는 그야말로 혼란의 시기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로마의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거리다. 신라에서 엄청나게 많은 로마 유물들이 발견되는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중국에서 신라보다 많은 로마유물이 발견되는 것이 정상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외국 사신의 입출입을 철저하게 기록하는데 이 당시 로마로부터의 사신이 도착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무리 당대가 매우 혼란된 시기라고는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로마의 사신이 도착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실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에드워드 기번이 아틸라가 사신을 중국으로 보냈다고 적었지만 실제로는 신라일 가능성이 보다 높다는 뜻이다. 흉노가 중국과의 혈투 와중에서 훈족과 가야신라로 갈라졌는데 추후 자신들의 분파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연계를 맺으려고 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볼 수 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황금보검의 삼태극 문양이다. 학자들은 신라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에 삼태극 문양이 있다는 것은 이들 물건의 최종 목적지가 신라이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사절단이 최상의 예물을 선물할 때 상대국에 알맞는 디자인이나 문양을 넣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로마유리 중에서도 최상급 제품이 신라에서 다량으로 발견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러 가지 개연성을 종합하면 신라의 여러 적석목곽분에서 로마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되는 것은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당대에 훈족의 여러 사절단이 신라의 알려지지 않은 집권자에게 선물했다고 하더라도 집권자가 많은 선물을 자신들의 식솔이나 지배층에게 분배해주었을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이들 유물들이 수많은 적석목곽분에서 산재되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적석목곽분은 당대의 집권층이 아니면 건설될 수 있는 성질의 무덤이 아니다.

현재 최고의 보물로 간주하는 황금보검이 비교적 규모가 작은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황금보검을 반드시 왕이 갖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신라에 유입된 황금보검이 한 개가 아닐 가능성도 있으며 황금보검만이 보물로 취급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당대에 로마에서 로마유리의 가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는데 그중에서도 신라에서 발견되는 로마유리는 최상의 보물급이라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신라에서도 유리를 최고의 귀중품으로 여겼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사실 이 부분은 타임머신을 타고 현장을 확인하지 않는 한 가상의 시나리오일 수 있다. 신라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아틸라라는 걸출한 위인의 작품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대의 패자인 훈족의 지배자 집단이 어떤 방법으로든 신라와 연계하려고 생각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자신들과 친연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지구 어디엔가 살고 있으며 그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처럼 환상적인 아이디어는 없다. 현재도 자신의 조상이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서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장면을 자주 보곤한다. 한무제의 릉 옆에 배장된 김일제의 묘 앞에서 전세계에 산재한 김씨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로마 유물이 고구려,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원래 인간이 사용하는 문물은 이동이 기본이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혈투를 벌이고 있었으므로 특정한 용도의 유용한 물건들이나 아이디어가 있었다면 삼국에 고루 퍼져야함이 옳다. 불교가 고구려에 처음 도입되었지만 이후 삼국의 정신세계로 자리 잡았음도 한 예이다. 그런데 신라에서 발견되는 로마 유물들이 고구려백제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은 이들 유물들이 무역품으로 한반도에 상륙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역품이라면 상인들이 오로지 신라에만 팔겠는가? 한마디로 로마유물은 오로지 로마에서 신라로의 일방통행이었고 이 일방통행이 추후에도 철저하게 지켜졌다는 것을 뜻한다.

훈족과 신라의 연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훈족이 신라에 사절단을 보냈든 신라 사절단이 훈족에게로 갔든 한국에서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의 역사로 생각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이들 기록이 단 한 줄이라도 있어야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이 질문 역시 정답을 구하기는 어려운 상태임이 분명하다. 삼국사기자체가 삼국에 대한 내용을 기본으로 했으므로 훈족의 사신들이 설사 왔더라도 서역에 대한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삽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신라와 서역과의 교역이 수없이 많았다는 것이 여러 정황상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삼국유사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이 서역인이라는 것을 가정하여 서역과의 교류가 있다는 것을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를 작성할 때 사전에 수많은 자료를 확보한 후 이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확인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에드워드 기번이 아틸라가 동양으로 사절단을 보냈다고 기록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에 대한 보다 명확한 자료들이 언젠가 발견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이란 단어는 20세기부터 일본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된다. 특히 미국의 백인 이주 후손인 크리올료(creole)들이 유럽 본토인과 다른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발명된 민족주의에 의해 민족이란 말이 정의되면서 유럽과 제삼세계로 퍼져나갔다는 분석이다.

이와 같은 민족에 대한 근대적 해석은 국내의 일부 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져 탈()민족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즉 민족이란 과거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발전과 함께 만들어진 근대적 가치이자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21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세계가 일일 생활권으로 변모한 현재 케케묵은 민족의 기원을 찾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대답하기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 세계를 통 털어 20세기 최대 사건 중의 하나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공산정권인 들어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련 즉 소비에트 정권의 등장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된 공산주의자들이 봉기하여 니콜라이 2세의 전제군주 체제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했다. 소련은 그 후 70여 년간 서방 자본주의 진영과 각축하며 세계를 양분한 공산진영의 영주로 군림했다.

한데 1990년에 이르러 소련체제가 무너지면서 많은 독립 국가들이 탄생했는데 이들 독립국가의 기반이 바로 민족이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각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고 더욱이 민족의 개념을 억압하고 말살하려는 전체주의 소련체제 하에서도 민족성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국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복기대 박사는 지적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유태인들은 2천 년 전에 나라를 잃고 조국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져 떠돌면서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결코 유태민족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잊지 않고 견뎌냈다. 바로 이런 기질과 근성 때문에 불과 몇 백만 명에 불과한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옛 땅으로 돌아가 이스라엘이라는 새 나라를 세웠고 10억 명이 넘는 아랍세계와 당당히 맞서 싸우면서 버티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이란 여전히 어디에서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한민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공통분모와 응집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 있을지 아무도 정확히 상상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중국 주변의 동아시아사를 보더라고 수많은 민족들이 부침과 흥망을 거듭했다. 이런 속에서 대부분의 민족들은 전쟁과 각축 끝에 중국 한족에 동화되거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민족도 있다. 만주족도 중국 본토를 장악하고 청나라란 대 제국을 건설했었지만 결국 중국에 매몰되어 그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한민족도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무수한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만주와 한반도를 근거로 비록 제2차 세계대전 후 국토의 양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정신과 일체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리 민족이 중국과 일본등 주변국과의 무수한 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항쟁할 수 있었던 것도 한민족이란 정체성과 자부심 및 응집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조선에서는 민족이란 단어 대신에 민족을 뜻하는 단어로 아족류(我族類)’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때의 아족류는 우리 민족또는 우리 겨레의 뜻을 지니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용되는 아족류는 일본인이나 여진인 등 이민족과 구분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이에 비해 일가친척을 뜻하는 말은 ()’ 또는 족인(族人)’으로 표기했다.

과거사를 정확히 알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올라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시대의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타임머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현재까지의 사료와 유물들을 참조하여 한민족에 관련된 연관성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끄새는 한민족의 뿌리 찾기에서 가야신라의 원류는 북방기마민족이며 이들 중 일부가 서천한 흉노 중에서 375년에 서유럽을 공격했던 훈족임을 밝혔다. 또한 고구려신라백제가야의 원류도 흉노와 다름 아님을 밝혔다.

원래 흉노는 선우라는 수장 중의 수장이 이끌면서 중국인과 당당하게 대항하던 제국이다. 그러나 흉노라는 국가가 워낙 넓은 영토를 확보하면서 수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아시아 동북방에 위치한 고구려는 흉노 속에서 점점 세력을 키워나간 후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한다.

흉노가 여러 국가 또는 부족으로 갈라지자 고구려는 이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중국과 당당히 맛서 싸우거나 또는 평화를 유지하면서 제국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이러한 고구려의 위상은 중국의 삼국시대 위··오의 주역인 오나라의 천자 손권이 고구려의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인 선우로 인정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한민족이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점은 거의 없고, 중국 등으로부터 수혜만 받아왔다는 스몰 콤플렉스(Small complex)’를 가지고 있다. 훈족과 아틸라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아틸라가 우리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만큼 더욱 그의 리더십은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45세기경, 서양에서는 훈족이 로마제국을 유린했으며, 동양에서는 고구려가 아세아 동북방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물론 훈족은 고구려보다는 가야(변한) 및 신라(진한)와 더 가까운 관계로 추정되지만, 이들이 모두 한민족이다. 아틸라가 한민족과 친연성을 갖는 선조라고 간주할 때 우리는 45세기경 각각 서양과 동양에서 패자로 군림한 당당한 두 선조, 아틸라와 광개토대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 로마 문화 왕국, 신라, 요시미츠 츠네오,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2002

한국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예담, 2007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 이종호, 백산자료원, 2005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Edward Gibbon, Penguin Classics, 1994

Attila le Fleau de Dieu, Maurice Bouvier-Ajam, Tallandier, 1982

로마제국쇠망사, 에드워드기번, 이종호 편역, 지만지, 2011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6, 2003

기마 흉노국가 신라연구, 조갑제, 월간조선, 20043월호

북방 기마민족의 가야신라로 동천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70, 2004

흉노의 휴저왕 태자 김일제(김일)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88

부여족과 불가리아, 신용하, 동아일보, 2007.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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