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보검
안녕하십니까. 끄새입니다. 한국에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제주도 자연유산을 제외하고 모두 13건이 있는데 이중 경주역사지구는 매우 특별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1995년 석굴암 ·불국사가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록되더니 2000년에는 아예 경주 거의 전부 경주역사유적지구로 등재되었습니다. 유네스코는 초창기 특정 시설물들을 대상으로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했으나 경주와 같은 경우 도시 곳곳에 유네스코급 세계유산이 있으므로 아예 도시의 유산 전체를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한 것입니다.
프랑스 파리, 멕시코의 멕시코시티, 영국 런던 등을 비롯한 세계적인 도시들이 역사지구란 이름으로 등록되었는데 경주가 이에 포함된 것은 그만큼 경주가 세계적으로 중요한 무엇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경주역사지구는 대단히 큰 지역을 포함하는데 대릉원지구, 남산지구, 황룡사지구, 월성지구, 명월산성지구 등 5개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중 대릉원지구는 그야말로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는 세계유산의 정수라 볼 수 있습니다.
외국인과 대릉원 지구를 답사해보면 한마디로 놀랍다며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시내 곳곳에 동산만 한 무덤들이 있는데 세계적으로 도시 내에 무덤이 있는 곳은 많이 있지만 경주같이 평지에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습니다..
대릉원은 반월성 북쪽부터 노서동에 이르는 동서 약 1킬로미터, 남북 약 1.5킬로미터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데 이들 대형무덤을 적석목곽분이라 부릅니다. 적석목곽분이란 땅을 파고 안에 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고 시체와 부장품들을 안치한 후 위로 상당히 많은 돌로 둘레를 쌓은 후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대형은 커다란 동산처럼 보이죠. 그런데 이들 무덤은 가야와 신라에서만 보이며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중국, 일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1973년 대릉원지구 안의 사적 제175 신라 미추왕릉지구 안의 계림로 14호분에서 그야말로 세계사를 놀라게 하는 부장품이 발견되었습니다.
계림로 14호분은 봉분이 흔적 없이 깎였고 그 위에 민가가 들어서 있었는데 도로공사하기 위해 배수로를 파다가 우연히 적석목관분을 의미하는 돌들이 발견되어 본격적인 조사가 실시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모두 270여 점이 발견되었는데 발굴단들을 놀라게 한 것은 보물 제635호인 황금보검을 비롯하여 금과 은으로 용무늬를 입사(入絲)한 말안장꾸미개(鞍橋), 유리로 장식한 금동 말띠드리개(杏葉),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화살통(盛矢具) 등이 출토된 것입니다.
무덤은 사진처럼 두 남자가 합장되어 있었는데 한 남자가 은제 허리띠에 세계적으로 희귀하면서도 유명한 황금보검을 차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긴 칼(大刀)를 차고 있는데 신장은 150~160cm, 나이는 20에서 39세의 성인으로 진골 계급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비단조각이 함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왕이 아닌 진골 귀족의 무덤으로 인식합니다.
두 남자가 무덤 한 곳에 함께 묻히게 된 이유로 ‘전쟁이나 전염병에 의한 사망’을 들었습니다.
이 중에서 학자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황금보검입니다. 5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보검은 길이 36cm, 최대 폭 9.3cm로 그다지 크지 않으며 황금으로 장식된 칼집 안에 날 길이 18센티미터의 철검이 들어있었습니다.
철검은 양쪽에 날이 있는데 신라의 대도는 한쪽 면에만 날이 있으므로
신라에서는 출토된 적이 없는 생소한 기법으로 만들어 진 겁니다. 전체 모양은 칼자루 끝장식이 반타원형이고, 칼자루의 폭은 반타원형 장식의 지름보다
좁습니다. 칼집 입구는 역사다리꼴이며, 그 옆은 허리띠에 차도록 만든 고리를 붙인 산 모양으로 세계의 검 중에서 극소수에만 있는 특수한 형태입니다.
칼집은 끝이 넓으며, 칼집 위에 반원형 장식 금구로 구성된 단검으로 표면에 석류석, 청색 유리 등의 귀금속과 누금세공 투각으로 전체가 장식되어 화려함을 더하여 한마디로 최소한 1500여 년 전에 외국에서 제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는 세계의 검 중에서 매우 희귀하여 현재 실물로는 카자흐스탄
보로웨에서 출토되어 러시아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과 이탈리아 랑고 바르드 묘에서 발견된 것이 전부이며 이란과 중국 신장의 키질의 69호 동굴 벽화에서 흔적이 보입니다.
누금세공 기법이란 금 입자와 금 세선을 사용하여 금제품의 표면을 장식하는 것으로 기원전 2500년경 우르왕조에서 시작되어 그리스 등지에서 발달했습니다.
누금세공의 기본 원리는 금 입자를 바탕금 또는 다른 금입자와 최소한의 접합면을 갖도록 서로 접합하는 것입니다. 또한 황금보검에 사용된 나선무늬는 그리스 소용돌이무늬라 불리는 전형적인 그리스․로마 시대의 테두리무늬로 그리스의 항아리 그림 등의 연속 번개무늬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합니다. 즉 번개무늬가 점점 간략해져서 나선무늬로 변했고 누금세공 등의 테두리무늬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로만로렐은 로마시대에 유행했던 무늬로 그리스 소용돌이무늬와 함께 테두리무늬의 기본적인 모티브입니다. 주로 금은제 그릇의 테두리와 보석장식은 물론 금, 은, 청동기 등 여러 공예작품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표면에 석류석, 청색 유리 등의 귀금속을 사용하고 누금세공 기법으로 만들었는데 이 칼에 사용된 기법의 진원지가 놀랍게도 신라에서 거의 7, 8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동유럽의 트라키아 지역입니다. 지금의 체코․폴란드․러시아 지방으로 도나우강 유역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중심의 동부 유럽 즉 로마에는 켈트인이 주로 거주했습니다.
그런데 황금보검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5세기 유럽은 훈족(Hun)이 패자로 유럽을 호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최남단인 신라에서 황금보검 등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신라와 훈족이 어떤 면으로든 연계가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이죠.
한국인들이 놀라는 것은 이 외국에서 만든 황금보검이 한국사를 다시 쓰게 만들 수 있는 폭발력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황금보검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5세기 유럽은 한국의 신라가야와 친연성을 갖고 있는 훈족(Hun)이 유럽을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한반도의 최남단인 신라에서 황금보검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신라와 훈족이 어떤 면으로든 연계가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황금보검이 보통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류의 칼은 영화 ‘벤허’에 나옵니다. 벤허가 누명을 쓰고 갤리아선의 노꾼으로 고생하다 로마 사령관을 구해주어 양자가 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벤허는 어릴적부터 친구로 그를 배신한 메살라에게 선물로 칼을 주는데
메살라는 이렇게 귀한 칼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선물하다니 놀랍다고 합니다.
메살라가 벤허가 살았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인데 여하튼 황금보검과 같은 칼은 당대에 최상급 보검임을 알려줍니다.
사실 황금보검에 대해서는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보검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특이한데다 연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선사·고대관 신라실에서 <계림로 14호 무덤-황금보검을 해부하다>란 테마로 황금보검 특별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1973년에 출토된 황금보검 등 주요 출토물 106점의 과학적 분석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황금보검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을 제시했는데 주제는 ‘황금보검의 주인은 누구인가?’입니다.
또한 KBS-TV 역사스페셜 제26회에서 ‘계림로 14호분 황금보검의 비밀’로
황금보검의 비밀을 집중적으로 취재하여 방영했습니다.
박물관 측은 황금보검이 제작된 장소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유행한 단검 형태에 동로마제국 및 5세기 유럽 각지의 훈족 등에 퍼져나간 금세공기술인 클로아조네(cloisonne) 기법이 결합된 것으로 보아 동유럽의 금세공기술자들이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또한 황금보검의 검집 속에 숨어 있던 철검이 확인되어 황금보검의 내부구조가 밝혀졌고, 보검을 장식하고 있던 보석은 그동안 알려진 ‘마노’가 아니라 ‘석류석’과 ‘유리’로 확인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또한 석류석 중에서도 특별한 광석인 노덜라이트를 사용했는데 황금보검에서 사용된 3캐럿 이상 큰 것은 매우 희귀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켈트파로 알려진 태극무늬가 있는데 이는 황금보검을 주문한 사람이 태극무늬의 의미를 잘 알고 황금보검에 이 문양을 넣어달라고 주문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황금보검이 어떤 연유로 유럽의 트라키아지역에서 신라로 들어왔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자들은 황금보검이 신라에서 발견된 이유의 실마리를 경주박물관 안에 있는 문무대왕비석에서 발견했습니다.
이 비석은 정조20년(1796년) 경주 농부가 발견했는데 아쉽게도 빨랫판으로 사용하여 현재 글씨가 전혀없습니다. 그러나 비석을 탁본으로 떠 논 것이 있으므로 이를 해석할 수 있는데 능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영원(靈源, 투후가 된 김일제가 받은 땅이라는 해석도 있음)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융성하였다. 종(宗)과 지(枝)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秺侯)는 하늘에 제사 지낼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 거기서 출자(出自)한바다.’
화관지후는 중국이 자랑하는 4천 여 년 전의 순임금을 뜻하므로 순임금이 투후인 김일제에 이어 신라의 시조로 인식되는 김알지로 이어졌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투후란 지금의 중국 하남성 일대인 ‘투’지방을 다스리는 제후라는 뜻으로 투후가 관장하는 곳은 현 중국의 약 1/5에 달하는 엄청난 지역입니다.
투후는 한나라 무제의 제2인자로 당대 흉노 휴저왕(休屠王)의 아들인 김일제(金日磾 또는 金日, 기원전 134~86)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글에 의하면 김일제의 7대손 김수로가 가야를 세우며 김알지가 신라를 세우는데 문무왕은 김알지의 15대 손이 됩니다. 신라와 가야의 시조가 북방에서 내려온 흉노계임을 의미하는데 이 의문은 고대 중국의 역사 즉 흉노와 중국의 혈투를 살펴보면 풀어갈 수 있습니다.
중국과 흉노의 혈투
구석기를 지나 신석기 시대가 되자 기본적으로 유목민과 농경민으로 나뉘는데 이는 지구촌의 기후 때문입니다. 농경생활과 유목생활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한데 한마디로 돼지를 키울 수 있는 곳은 농경지대입니다. 돼지는 인간과 다름없이 먹고 살기 때문으로 즉 물을 기본으로 합니다.
반면에 유목민들은 물이 많지 않은 곳에서 살아야 하므로 농경이 거의 불가능
합니다. 그러므로 양과 염소 등을 기본으로 목초를 따라 이동하면서 사는데 양과 염소들을 광대한 목초지에서 관리해야 하므로 유목민들은 기동력있는 말을 생활화합니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생필품을 모두 자급자족할 수 없으므로 생존에 절대 필요한 식량 등을 외부로부터 공급 받아야 하는데 이것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10년 주기로 초원지대에 재해가 일어나 생필품이 부족해지는데 한마디로 유목민이 많은 재산으로 외부로부터 필수품을 구입하면 불화가 없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므로 유목민은 기동력이 있는 기마부대를 편성하여 정기적으로 외부를 공격하여 식량 등을 약탈해갔습니다. 농경민과 유목민의 혈투가 필연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역사시대로 들어와 동아시아로 한정한다면 이들 광대한 지역은 남쪽 중국의 농경생활, 기마부대를 운용하는 북방의 흉노가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북방의 유목민은 철기시대에 들어서 기동력 있는 기마무대를 운용하여 보다 막강한 기마민족 흉노로 성장합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먼저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흉노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다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흉노란 말 차체가 국어사전에 의할 경우 ‘흉악무도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흉노는 기원전 3세기부터 동아시아를 중국과 함께 호령하던 제국으로 당시 흉노는 중국보다 3배나 큰 거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흉노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 즉 거대한 나라의 명칭입니다.
또한 흉노라는 말의 뜻 자체가 ‘사랑스럽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흉노 제국에서도 자신들이 흉노라고 자랑스럽게 썼는데 추후에 흉노와 혈투를 벌인 중국이 흉노를 비하하여 흉악한 사람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또한 유목민과 농경민이 전투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근래의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기원전 1,000년 경 유목민의 유물에서 전쟁무기가 발견되지 않고 채색항아리, 제사용 기구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유목민들이 전투와 약탈로만 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동이족이 기후 변화로 기원전 1500년 경 홍산지역 즉 고조선 지역에서 중원으로 내려와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건설한 은나라는 순장용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 인근 지역을 부단히 침공 오히려 유목민들을 괴롭였읍니다. 유목민이 오히려 정주민으로부터 공격과 약탈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시간이 지나 후대로 가면서 흉노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중국을
줄기차게 공격하자 중국으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므로 이들이 침투하는 길목을 대상으로 장성을 쌓았는데 유명한 것이 진시황제의 만리장성입니다.
그러나 장성은 진시황제 때 처음 쌓은 것이 아니라 기원전 1,000년 전부터 전국시대에 인근 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쌓았는데 연장성, 조장성, 초장성 등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중국 중원에 건설되어 있는 장성들은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만리장성을 쌓는데 이는 당대에 강성해진 흉노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국시대에 수많은 국가들이 인근국가와의 전투를 하느라 북방에 신경을 쓸 수 없으므로 흉노가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진나라 자체가 기본적으로 북방계열이므로 진시황제는 북방의 흉노가 신생 진나라에 강력한 장애물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진시황제가 급히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인데 진시황제의 생각은 매우 간단합니다. 만리장성 밖은 흉노 땅이므로 장성 밖의 일은 흉노가 마음대로 해도 좋지만 만리장성을 넘어오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즉 장성만 흉노가 넘어오지 않으면 평화가 유지된다는 뜻인데 문제는 흉노에게 필요한 절대 물품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진시황제는 국경 부군에 흉노에 반드시 필요한 문물거래를 할 수 있는 특별 교역장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진시황제는 그야말로 엄청난 국력을 들여 황해의 산해관 노령두로부터 신장의 가욕관 또는 양관까지 장성을 쌓는데 최소한 5,000킬로미터가 됩니다.
이곳에서는 만리장성에 대해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간략하게 만리장성에 대해서만 설명하겠습니다.
만리장성을 건설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은 해발고도 2,000-3,000미터에 달하는 산지를 돌면서 산성을 건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시황제는 만리장성을 모두 처음부터 쌓은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기존의 장성을 보수하면서 나머지 부분을 이었습니다.
초창기 장성은 북방유목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보다 인근 나라와의 전투에 대비하는 것이므로 공격과 수비 겸용으로 건설했습니다. 그러므로 장성 쌓기에 많은 백성들이 원성만 한 것은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시황제의 장성도 장성을 쌓으면 장성 밖의 흉노의 침입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습니다. 즉 장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안전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약탈과 전쟁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시황제를 폭군의 대명사로 지칭하는데 만리장성이 꼭 등장합니다.
그가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노역에 동원하여 죽였다는
뜻입니다. 장성 쌓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은 사실이지만 만리장성 쌓기에 상당수 백성들이 지지했다는 것을 도외시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만리장성 축조를 상당이 부정적으로 설명되어 온 것은 진나라가 진시황제 이후 곧바로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 고조가 그의 뒤를 잇는데 내용은 어떻든 역성혁명을 한 유방으로서는 진나라를 멸망시켜야 할 명분을 찾아야 했는데 그 명분이 만리장성 건설, 분서 갱유, 불로초 찾기 등입니다.
근래 학자들은 진시황제야 말로 현재 중국의 틀과 대국으로의 면모를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중국에서 최고의 황제는 그동안 폭군으로 부단히 비난받던 진시황제로 인정합니다. 진시황제가 없었다면 현재의 대국 중국이 없었다는 겁니다.
만리장성이라면 달에서도 보인다는 말이 잘 알려져 있지요.
이는 1932년 미국 만화가 로버트 리플리가 만리장성이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건조물이라 말한데서 유래합니다.
그러나이는 상당히 과장된 것입니다. 만리장성이 아무리 길다해도 우주공간에서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으려면 최소각 범위에 들어올 만큼 넓어야 합니다.
머리카락이 아무리 길어도 몇 미터 떨어지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죠.
그러므로 만리장성의 최대폭이 7미터이므로 상공에서 이를 볼 수 있으려면 23.3킬로미터 이내라야 합니다. 이는 지구의 성층권으로 우주공간이 아니며 만리장성이 보이는 곳에서는 고속도로, 운하, 대형 건물도 모두 보입니다.
중국 최초의 우주인인 앙리웨이가 2003년 우주선을 타고 지구궤도를 선회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만리장성은 보이지 않는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당대에 흉노야말로 최강의 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흉노는 진시황 때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는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는 와중에 북방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흉노의 간판스타인 묵특(冒頓, 재위 기원전 209~174년)이 아버지 두만 선우를 제거하고 흉노의 선우로 등장합니다. 이 당시는 진시황제가 사망하고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혈투를 벌이고 있을 때입니다. 여기에서 흉노의 선우는 중국식으로 보면 황제와 다름없습니다.
묵특에게는 많은 전설이 따라다니는데 우선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명적과 효시라는 말이 태어나게 한 장본인입니다.
묵특의 아버지 두만 선우의 왕비 즉 계모 즉 알지는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묵특을 월지로 보낸 후 급습하도록 합니다. 인질이 있는 상태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인질을 처형하는 것이 기본인데 묵특은 알지의 기대와는 달리 월지에서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두만은 묵특을 제거하려다 자신의 아들이 비범한 것을 알고 만인대로 구성된 기병대의 지휘권을 줍니다.
이후 묵특은 명적 즉 ‘소리나는 화살’을 만들어 병사들을 일사분란하게 훈련시킨 후 자신이 명적을 쏘면 모두 그곳을 향해 쏘도록 했습니다. 훈련 강도롤 높여 자신의 후궁과 애마를 향해 화살을 쏘라고 명령했을 때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장병들을 모두 처형합니다. 자신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이죠.
이후 어느날 아버지 두만이 야외에 있을 때 아버지가 있는 곳에 명적을 쏘았습니다. 그의 신호에 따라 부하들이 아버지 있는 쪽으로 화살을 쏘아 아버지를 살해하고 선우로 오릅니다. 이는 자신의 명령에 따라 아버지를 모든 장병이 시해하는데 참여했다는 것으로 한마디로 그의 부하 모두 공범자라는 유대감을 갖도록 한 것입니다.
이후 전쟁터에서 공격 명령을 내릴 때 명적 한 발을 공중으로 발사하는데 전투 개시를 의미하는 이 소리 나는 화살을 ‘효시’라고 합니다.
묵특은 한국인에게 큰 관련이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고조선으로 알려지는 동호와의 관련입니다.
당시 흉노의 우측에 있는 동호가 강성하여 묵특을 공격할 빌미를 찾기 위해 천리마와 왕비인 연지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부하들이 동호가 무례하다고 말하자 묵특은 인접한 국가인데 말 한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느냐며 순순이 자신의 왕비인 연지와 말을 동호에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동호가 추가로 흉노와 접하는 땅 1,000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부하들이 쓸모없는 땅이니 주어도 된다고 하자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곧바로 동호를 급습하여 동호를 격파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동호를 고조선으로 인식하며 이를 계기로 흉노가 한반도 북부까지 장악했다고 추정합니다. 한마디로 고조선이 흉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흉노와 중국의 본격적인 전투는 진시황제가 기원전 210년에 사망한 후 202년 유방이 초나라의 항우를 격파하고 통일 한나라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벌어집니다. 유방은 한나라를 세웠지만 북방의 흉노가 자신의 행보에 문제가 될 것을 간파하고 적어도 흉노가 흉노를 넘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와 한나라는 근본이 달랐습니다.
진나라는 북방족으로 강력한 기마군단을 육성하고 만리장성을 건설하여 흉노를 견제했는데 유방은 만리장성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만리장성은 전투할 때 시간을 잠시 벌어주는 것이므로 흉노와 접한 연나라 왕으로 노관을 임명하여 대치토록 하는데 노관이 기원전 201년 흉노에 항복합니다.
흉노로부터 일격을 당한 유방은 기원전 200년 3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묵특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유방의 공격은 곧바로 패착이 되어 유방의 공격은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으킵니다. 유방의 군사 10여 만 명이 강추위로 동상이 걸려 전력에서 이탈하자 묵특은 자신의 군대가 허약한 것처럼 위장하여 유방을 유인합니다. 유방이 미끼를 덥석 물어 대패하고 유명한 백등산에서 일주일간 포위됩니다.
천하를 통일한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유방이지만 패배에 직면하자 자존심을 꺾고 흉노와 협상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유방이 전멸되기 직전 묵특의 왕비인 연지에게 사람을 보내 포위를 풀지 않으면 중국의 미인들을 묵특에게 보내 묵특과 연지와 떼어놓겠다고 위협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묵특이 여자를 좋아하므로 묵특이 한나라를 멸망시키면 연지가 선우에서 눈이 멀어진다는 설명인데 여하튼 흉노와 한나라는 다음과 같은 협약을 맺습니다.
이 당시 맺은 중국과 흉노의 협정은 그야말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첫째는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는 조항입니다.
이 관례는 기원전 150년 경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고조의 신하들이 서명을 반대하자 유경(劉敬)이 이를 허락해야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공주를 보내 선우의 아이를 낳으면 결국 선우가 사위가 된다는 것이죠.
둘째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마지막으로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항입니다..
한마디로 한나라가 형이라는 명분은 얻었지만 특기할 사실은 양국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고 한나라에 흉노에 보내는 조공의 양도 증가되어 기원전 192년부터 기원전 135년까지 9번에 걸쳐 한이 흉노에게 조공을 바쳐 중국은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근래의 많은 자료에 의하면 가야의 김수로와 신라의 김알지가 한나라 무제 때 흉노 좌현왕의 황태자인 김일제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한무제, 김일제를 둘러싼 당대의 정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죠.
한무제(기원전 156년~ 기원전87년)가 기원전 141년 16세로 등극하자마자 흉노와의 조공 외교를 근본적으로
차단코자 합니다. 한나라가 형인데 동생인 흉노에게 조공한다는 것이 말이되느냐입니다.
이에는 흉노와의 평화가 60년이나 유지되어 중국의 전력 및 재정이호전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중국에
얼마나 자금이 많았던지 황실 창고의 동전을 꿰는 끈이 삭아 끊어질 정도라고했습니다.
더불어 한나라는 우수한 철제무기를 자체 제작할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흉노의 전통적인 기병 전술(파르티아 기사법)과 군대 편제도 상당히 습득한데다 군사의 숫자가 월등히 많으므로 흉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133년 무제가 정병 30만 명을 동원하여 흉노를 공격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있던 중 엄청난 정보가 들어옵니다.
흉노가 좌측에 위치한 같은 기마민족 월지를 공격하여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으로 쫓아내었는데 월지가 이를 복수하기 위해 흉노를 함께 공격할 동맹국을 찾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무제는 월지와 동맹을 맺기 위해 장건을 파견합니다. 장건(?~기원전114년)은 기원전 139년 즉 25살에 사절단 등 100여 명과 함께 월지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의 임무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 국경 밖은 흉노의 세력권이므로 흉노가 장건을 순순히 통과시킬 리 없기 때문이죠. 예상대로 모두 흉노에게 포로로 잡히는데 부하들은 장건의 임무를 볼 때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장건을 살려보낸다면 그가 보고 들은 정보 특히 흉노 본영과 군진 등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어 한나라가 공격해 올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흉노의 군신 선우는 흉노가 한나라로부터 조공받는 ‘어른’인데다 한나라 포로라 할지라도 인재이므로 그를 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며 살려줍니다. 장건이 포로로 흉노의 본영에 머무르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이것이 흉노의 결정적인 패착이 됩니다.
장건은 포로라 해도 상당한 자유를 갖는 손님 대접을 받았고 흉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는데 감시가 소월한 틈을 타 아내와 부하들과 함께 탈출하여 월지에 도착합니다.
장건이 한나라를 출발한지 10년이 되는 기원전 129년입니다.
그런데 막상 대월지에 도착하니 대월지의 상황이 바뀌었다는거죠. 대월지는 흉노에 쫓기면서 들어간 대하국을 복속시키고 비옥한 땅을 발판으로 인구 40여 만 명의 거대한 유목국가를 이루면서 잘 살고 있으므로 굳이 한나라와 연합하여 막강한 흉노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장건이 연합에 실패하고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때 또 다시 흉노의 포로가 됩니다. 그러나 마침 그를 잘 보았던 군신 선우가 사망하여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생기자 탈출하여 기원전 126년 장안으로 돌아옵니다.
장건의 정보는 그야말로 귀중하여 한무제는 장건의 정보를 토대로 기원전 123년부터 그동안 별로 성공하지 못한 흉노 공격에 앞장 섭니다.
이때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들로 불리는 위청, 이광, 곽거병 등이 선봉으로 비로소 한나라가 흉노를 제압하기 시작합니다. 무제의 도박은 성공하여 그동안 흉노가 장악하고 있던 하서주랑을 확보하고 이어서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합니다. 이는 한나라의 대흉노정책이 대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으로 이런 전공은 장건이 결정적인 길잡이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장건의 서역 여행이 갖고 온 또 다른 기여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며 피땀을 흘린다는 한혈마 즉 천마(天馬)를 한나라가 확보토록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마는 용마라고도 불리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초능력을 지닌 말로 용과 암말 사이에 태어나 강물에서 솟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한혈마를 투르크만 (Turkmann) 종으로 추정합니다.
여하튼 장건이 무제에게 대완 즉 페르가나라는 지역에서 천마가 있다는이야기 하자 무제는 천마 확보에 총력을 명령합니다.
흉노의 기마술에 번번이 당하던 무제는 천마야말로 흉노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또한 무제는 불로장생을 갈망했으므로 무제가 승천하는 데 용마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당시는 흉노가 하서주랑을 통제하여 대완과 연계할 수는 없었으므로 무제는 곽거병 장군 등으로 하여금 하서주랑을 점령하게 한 후 곧바로 대완으로부터 천리마를 갖고 오도록 명령합니다.
한마디로 대완에서 천마를 빼앗아오라는 것인데 기원전 104년 이광리 장군을 파견하였지만 오히려 대완군에게 격파 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천마를 얻으려는 원정이 실패했지만 무제는 단념하지 않고 기원전 101년, 또 다시 이광리로 하여금 정병 24만 명을 동원하여 대완을 정복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대완도 만만치 않았죠. 한나라 원정군의 목적이 천마 확보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만약 한나라 군이 공격한다면 천마를 모두 죽이고 자폭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광리는 수십 필의 최상급 준마와 3,000마리의 종마를 받고 한나라에 조공한다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이 궁금한 것은 천마로 거론되는 한혈마가 어떤 종류이냐 입니다.
이들 천마는 현재 멸종된 투르크만 (Turkmann) 종으로 추정하지만 한나라와 당나라 때 수많은 예술가들이 작품 속에 묘사하여 그 원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며 유명한 천마 청동작품이 난주박물관에 있습니다.
이 천마는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선물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일부 한국 학자들은 신라 천마총의 천마가 이들을 묘사하였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신라김씨 김알지, 가야김씨 김수로의 선조 투후 김일제의 등장
이제 본격적으로 신라의 김알지, 가야의 김수로가 한나라의 투후로 봉해지는 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기원전 86년)의 후손으로 흉노 지역에서 한반도로 동천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에서 투후는 한나라의 3분의 1에 달하는 거대한 ‘투’지방을 통치하던 황제 다음의 실권자를 의미합니다.
김일제는 기원전 134년 흉노 좌현왕인 휴저왕의 황태자로 태어났는데 흉노는 선우를 정점으로 좌현왕, 우현왕이 거대한 제국을 통치했습니다. 김일제가 흉노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는 것은 좌현왕의 황태자인데다 흉노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제천금인’을 보관하는 사람으로 한마디로 흉노의 선우가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주재하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무제의 공격으로 흉노가 대패하자 흉노 선우가 좌현왕과 우현왕을 소환합니다. 흉노 선우의 소환은 패전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이므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현왕이 좌현왕 즉 김일제의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자고 하는데 좌현왕이 처음에 동조하다가 주저하자 우현왕이 좌현왕을 살해합니다. 이런 와중에 한나라의 곽거병 장군이 언지산에 있는 좌현왕 진영을 급습하여 14살인 황태자 김일제와 어머니롤 포로로 잡습니다.
여기에서 언지산은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곳인데 한국의 대표 화장품인 연지곤지를 만드는 언지목이 이곳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수나라의 황제인 수양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방문하였는데 현재 관광지로 대대적으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포로가 된 김일제롤 한무제는 마감 즉 말 감독관으로 임명합니다. 한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던 흉노 좌현왕의 황태자가 말지기가 되니 정말 인생이 파란만장한 것을 알 수 있지만 여하튼 김일제가 흉노이므로 말을 잘 관리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상상치 못할 일이 일어납니다. 김일제가 한무제의 지방 순행에 호위병로 참여했는데 어느 날 몸이 아파 휴식시설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한 자객이 단도를 들고 무제의 침소로 침입했는데 마침 김일제가 화장실을 가다가 자객을 발견하고 이를 체포하여 무제는 암살에서 벗어납니다.
무제는 곧바로 김일제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하여 신하들이 흉노 출신인 김일제를 너무 총애하면 안 된다고 건의해도 무제는 줄 곳 옆에 두었고 김일제가 사망하기 직전 한무제를 이은 소제(기원전94년~기원전74년)는 김일제가 사망하기 직전 투후로 봉합니다. 더불어 한무제 릉 옆에 곽거병 장군과 함께 배총되었고 후손들은 대대로 투후를 계승했습니다.
김일제는 매우 체구가 커서 현대로 치면 거의 2미터가 될 정도의 거구로 알려지는데 그의 생애 중 특이사항은 한무제로부터 김씨성을 사성받았다는 점입니다. 김일제를 전세계 김씨의 선조로 인식하는 이유입니다.
김씨는 중국 성씨 중 67번째인데 중국인들은 북한의 김일성, 한국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도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약 5천 만 명이 김씨로 알려지는데 매년 전세계 김씨들이 김일제 묘 앞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김일제는 중국과 흉노의 혈투에서 중국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중국에서 매우 높은 대우를 받고 많은 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무위시의 경우 광장 중앙에 김일제의 내력이 적혀있으며 잘 알려진 산동성의 무씨사당의 사당 자체는 김일제가 탄생하기 직전 즉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되었는데 이 안의 화상석에 김일제에 대한 일화와 단군 신화가 적혀 있어 김일제가 당대에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한국에서 단군이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고 하지만 단군이야기가 동이족의 근거인 무씨사당 화상석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때 단군이야기가 매우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투후로 한나라를 대표하는 가문인 김일제의 후손인 김알지와 김수로가 한반도 남쪽인 신라와 가야로 동천하게
된 것은 중국에서 한나라 말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김일제는 큰아들 김상과 동생 김건이 있었는데 김건의 손자인 김당의 어머니 남과 한나라(전한) 말 신나라를 건설하는
왕망(기원전 45년~기원23년)의 부인 공현군은 자매였습니다.
즉 왕망이 김당의 이모부가 되는데 왕망은 추후에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창업합니다.
그러므로 왕망이 신나라를 만드는데 김씨 일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실세가 됩니다.
문제는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현실을 잘 파악치 못하고 개혁 위주의 새로운 정책만 고수하려다 15년만에 후한의 광무제 유수에게 멸망합니다. 광무제가 전한을 멸망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김일제 후손을 철저하게 제거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볼 수 있습니다.
원래 김일제는 북방 흉노였으므로 그의 후손들 대부분 자신의 본거지인 휴도국으로 도주하는데 도주하는 김씨 일가가 모두 휴도국으로 간 것이 아니라 7대 후손인 김알지는 신라, 김수로는 가야로 동천했으며 또 다른 일파가 서천하였고 이후 흉노가 4차에 걸쳐 서천하는데 이들 중 주력부대가 김일제의 후손으로 추정하며 그들 중에서 훈족 즉 아틸라가 태어났다고 추정합니다.
이를 증빙하는 자료로 한반도 서북지역, 김해 지역, 제주지역에서 왕망 시대에 사용된 화폐 오수전이 많이 출토되는데 이것은 김씨 일가들이 국외로 도피할때 가져갔기 때문으로 추정합니다
놀라운 것은 근래 휴도국의 휴저성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평지에 건설된 거대한 성으로 흉노가 이동형 텐트에서만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김일제의 후손이 중국에서 철퇴를 맞고 각지로 분파되어 각지에서 근거지를 확보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김일제의 후손으로 막강했던 김알지와 김수로가 왜 한반도의 가야와 신라로 동천했느냐입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좋은 방법은 타임머신을 타고가 직접 김알지와 김수로를 만나 가야와 신라로 동천하는 이유를 질문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불행하게도 타임머신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는 있습니다. 가야와 신라가 유명한 철산지라는 것입니다.
원래 기마민족은 말, 무기, 마구가 필수이므로 철의 확보가 가장 중요한데 한반도 남부는 과거부터 철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진수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다음과 같은 글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나라(변진)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漢·예濊 ·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가져간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는 철로 이루어져서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이 철은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도 공급한다.’
김알지와 김수로가 기마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질 좋은 철이 다량으로 생산되는 한반도 남부를 택했다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한반도 남부에 재기할 수 있는 자원이 충분히 있었다는 뜻입니다.
유럽에 훈족의 등장
세계 3대 정복자로 알려진 훈족의 아틸라가 한민족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곧바로 소설을 쓰느냐고 반문합니다.
아틸라라는 이름이 그 동안 우리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뿐더러 아틸라가 살았던 시대가 5세기 초로 무려 1500년이 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양의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아틸라가 한국과 연계되리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유럽의 틀이 잡혀가는 중요한 시기이므로 서양인들은 훈족과 아틸라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근래에 한국 학자들도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그야말로 놀라운 사실들을 속속 밝혀내고 있습니다.
훈족 즉 아틸라가 유럽에 등장하기 전 로마와 게르만민족을 포함한 야만족의 정황을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중국과 500여 년 동안 혈투를 벌인 흉노는 큰 틀에서 4차에 걸쳐 서천합니다. 한마디로 중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여건이 좋지 않게 되자 근거지인 초원지대를 떠나 유럽 지역으로 진출하여 370년까지 볼가강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볼가강을 경계로 좌측은 고트족, 우측은 훈족이 오랫동안 가깝게 살았지만 몇 백 년 동안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동쪽에 있는 훈족은 서쪽으로 습지가 많아 진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만화와 같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느 날 훈족이 기르던 어린 암소 한 마리가 쇠파리에 쏘여 놀라 늪지대를 가로질러 해변으로 달려 달려갔는데 그곳은 전설로 알려진 스키타이 땅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습지 너머 완전히 다른 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서방으로 이동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강을 건너기 위한 선박도 없으므로 무리하여 건널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상 최고의 한파가 일어나 모든 강이 얼자 그들은 새로운 땅으로 이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동은 과거에 스키타이에 살고 있던 알란족과 마주치는데 이들 역시 훈족과 마찬가지로 기마민족입니다. 그러나 370년 전투에서 훈족이 승리하고 374년 알란 족은 훈족에 포함되어 훈족의 세계 제패에 크게 기여합니다.
훈족이 서진하는데 부닥친 또 다른 민족은 사르마타이로 이들은 전설의 기마민족 스키타이를 물리친 민족입니다.
사르마타이는 인도유럽어족으로 알란족과 유사한데 이들을 격파한 훈족은 계속하여 스키리족, 게피다이족, 콰디족을 흡수합니다.
여기서 스키리족은 남부 러시아에 살던 민족으로 훈족의 주력 세력입니다. 러시아에서 많은 동양계 얼굴이 보이는 것은 이때의 영향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집고 넘어갈 것은 훈족의 구성원으로 훈족이란 흉노계의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연합단체라는 점입니다. 현재 발굴되는 훈족의 유골을 보더라도 4분의 1만 순수한 아시아계로 알려집니다.
그러므로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을 거론할 때도 훈족 전체를 한민족과 동일한 민족과 같다는 뜻이 아니라 아틸라 등 핵심 지배 집단이 한민족과 친연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훈족이 여러 기마민족을 흡수하여 진출한 우크라이나 땅에는 게르만족인 동코트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발트 해 연안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현재 독일의 거의 대부분과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리보니아, 프러시아, 폴란드를 포함합니다.
당시 동코트를 포함한 게르만민족은 말을 사육했지만 운송 수단으로만 이용하고 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또한 로마군처럼 무거운 갑옷을 입고 창을 던지며 육박전에는 익숙했지만 훈족의 기마병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대부분 훈족에 병합되었지만 상당수의 동코트인들이 트라키아 지방으로 들어가 그들과 같은 게르만민족인 서고트로 들어가 합류했습니다. 한마디로 동코트인들이 무단으로 서고트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훈족이 곧바로 375년 서고트 영역으로 진격하자 서고트의 왕인 아타나리크(? ~ 381)는 로마 제국인 도나우강 남쪽의 로마 영토로 들어가 트라키아 지방에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당시 서고트의 이동은 과거 로마 제국의 변경에서 일어났던 이전의 부분적이고 우발적인 이주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발렌스 황제(재위 364년 - 378년) 는 그들의 이주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였습니다.
382년 로마는 결국 서고트족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로마 군단의 번병이 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로마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1세 (재위 379~395) 는 야만족의 공격에 큰 관심을 두지않고 종교문제에 집중하여 392년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했고 395년 사망하면서 로마제국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토록 명령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고 로마가 동서로마로 나뉘자 401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 (재위 395∼410)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그동안 로마에 핍박받던 다른 게르만족도 반란군에 합류합니다. 당시까지 게르만족은 여러 지역에 산재하여 살고 있는데다 개성이 강하여 어떤 연합체에도 합류하지 않았으나 알라리크의 반란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란은 로마의 장군인 스틸리코 (365~ 408)에 의해 대패하고 서로마의 호노리우스 (재위 393∼423)황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천혜의 요새로 알려진 라벤나로 이전합니다. 그러나 알라리크가 전력을 정비하여 다시 갈리아지방 즉 현 프랑스지역에 진출하자서로마는 알라리크와 엄청난 자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합니다.
알라리크와 평화협정으로 위험이 해소되었다고 생각한 서로마는 스틸리코에 누명을 씌워 살해했는데 문제는 서로마가 서고트의 알라리크에게 제때에 보상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알라리크는 곧바로 서로마를 공격하여 로마를 포위한 후 410년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합니다. 로마가 점령된 최초의 일인데 알라리크는 서로마를 직접 통치하지 않고 철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부족의 연합체이므로 각 부족들이
서로마의 이베리아 반도는 물론 프랑스지역, 아프리카, 지중해의 코르시카,시실리섬, 사르데나 섬으로 진출합니다.
이들의 중요성은 당시 게르만민족 대이동으로 촉발되어 여러 부족들이 각지로분파되어 정착했는데 이 당시의 국경이 현재 유럽의 국경이 된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현재의 유럽은 훈족의 서유럽 진출로 인해 재편되었다는 뜻으로 유럽인들이 훈족과 아틸라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입니다.
학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훈족이 전통의 강호인 로마를 비롯하여 수많은 부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비결 즉 수많은 전투에서 백전백승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입니다.
제일먼저 제시된 것은 전형적인 흉노말을 사용한 기마군단이라는 점입니다.
훈족의 말은 현대의 말보다 작지만 스피드와 지구력이 뛰어나 하루 10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동력이 당대의 어떤 민족보다 앞섰는데 이들은 평소에 5마리에서 7마리를 갖고 교대로 전투에 참여하므로 말들이 지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무기는 나무 안장입니다. 훈족의 안장은 로마군의 안장과 달리 앞이 높고 뒷받침이 있어 그만큼 뒷부분을 잘 받쳐주기 때문에 기수에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더불어 등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훈족은 유럽에 알려지지 않는 등자를 사용해 장시간 말을 탈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훈족이 유럽에서 사라졌을 때도 등자를 도입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로마는 전통적으로 보병을 신뢰했고 특히 유명한 귀갑형으로 기병에 대항할 수 있는 전술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병과 보병간의 전투에서 로마의 귀갑병은 천하무적이었고 관리유지에 자금이 많이 드는 기병은
용병으로 처리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입니다.(로마의 귀갑병)
넷째는 훈족의 자랑 복각궁과 특수하게 제작된 화살을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활에는 만궁과 직궁이 있는데 훈족은 만궁을 사용했습니다. 만궁은 활줄을 걸지 않으면 보통 활이 휘는 방향과 반대로 뒤집힙니다. 한국의 활은 만궁 중에서 휘는 정도가 가장 심한데 한민족과의 친연성을 거론할 때 반드시 등장하므로 뒤에서 한민족의 친연성을 거론할 때 다시 설명한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마전술을 활용한 전투 방법입니다. 훈족은 500명에서1,000명 인원으로 300미터 거리에서 불화살을 날리며 공격을 개시합니다. 그런 다음 물러나는 척하다 다시 지그재그로 달려들어 계속 적군이 지리멸렬할 때까지 공격했습니다. 물론 로마인들도 이들에 대한 대비책으로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었지만 거추장스러워 오히려 전투력을 떨어뜨렸습니다.
훈족의 특이 체질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훈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좋은 시력과 청력을 갖고 있다고 알려지는데 현재의 몽골인들의 시력이 5.0일 정도로 매우 좋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시력이 좋으므로 먼 곳을 잘 볼 수 있고 초원에서 움직이는 어떤 동물도 감별할 수 있으며 청각이 특별히 좋다고 알려집니다.
현대인으로는 다소 놀라운 일이지만 훈족은 그동안 알려진 전투수칙을 참고로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훈족은 포로를 잡지 않았고 대항하는 자는 모두 죽였습니다. 반면에 전쟁 초반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사람은 ‘준훈족’으로 살려주었으므로 훈족의 진격로에 있는 부족들 대부분 사전에 투항했습니다.
그런데 훈족은 투항한 사람들에게 매우 관대하여 관직을 주어 계속 자신의 부족을 통치하게 했으므로 훈족의 인원이 많지 않음에도 45개나 되는 부족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했습니다.
한마디로 4, 5세기에 훈족을 능가하는 전투력을 가진 곳은 없었다는 설명입니다.
세계 3대 정복자, 아틸라 등장
세계 3대 정복자 중 한 명으로 한민족과 친연성이 있다고 추정되는 아틸라는395년에 태어났습니다. 395년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태어난 375년에서 20년 후의 일입니다.
아틸라가 태어날 때 훈족도 어느 정도 유럽 세계에 눈을 뜬 상태였습니다.
이 당시 울딘이 훈족을 통일하는데 그는 ‘도나우 강 밖 모든 야만족의 왕’이라 불리면서 훈족을 로마 제국과 대등한 위치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훈족을 서로마는 우호적인 관계로 대우해주었지만 동로마는 훈족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408년 울딘은 대군을 이끌고 동로마제국을 공격하여 엄청난 전리품을 획득하지만 본영으로 돌아오던 중 살해되었고 몇몇 훈족 수장이 등장하지만 옥타르가 새로운 강자로 올라섭니다.
그는 라인 강변의 부르군트족을 공격하는데 학자들은 이를 통일 훈족의 첫 유럽 중앙부 진출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옥타르는 부르군트의 기습으로 사망하고이어서 아틸라의 삼촌인 루가가 훈족의 왕이 됩니다.
루가는 훈족의 왕이 되기 전인 422년과 426년에 동로마 지역인 트라키아와마케도니아 지역을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여 훈족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아 왕이 된 것이죠.
당시 동로마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기독교에 심취되어 외부의 침입에 아무런 대치를 할 수 없으므로 루가와 협의하여 매년 황금 350파운드를 주는 조건으로 훈족으로부터 동로마를 공격치 않으며 동로마가 요청하면 군대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루가에 의해 훈족이 훈제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이때부터 로마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세력은 훈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편 아틸라를 이야기하려면 로마의 아에티우스(396~454)장군과 갈라 플라키디아(389?-450)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이들 3명이 서로마의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죠.
플라키디아는 아틸라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직전에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재위 425∼455)를 대신해 섭정한 여장부입니다. 당시 로마 내정은 매우 복잡하여 황제의 아들이라고 무조건 황제로 추대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플라키디아는 당시의 정황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6살인 아들을 발렌티아누스 3세로 옹립하고 실권을 거머쥐었지요.
반면 아에티우스는 게르만 혈통으로 아버지를 이어 황제의 근위병으로 복무했는데 당대의 로마 정책의 일환으로 아에티우스는 훈족, 아틸라는 410년 경부터 로마 궁정에서 볼모로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언어와 기마술을 익혔고 아틸라는 10여 년 동안 라틴어는 물론 그리스어도 배우는 등 상당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러므로 훈족은 아에티우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로마도 아틸라를 지지했으며 두 명은 서로 친구 사이로 잘 어울렸습니다.
아에티우스가 갈리아 사령관으로 승승장구하자 위협을 느낀 플라키디아는 아에티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갑자기 사령관 직에서 해임하고 모든 권한을 박탈했다.
그러나 이는 플라키디아의 실책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에티우스가 훈족의 왕인 루가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그는 대군을 동원하여 아에티우스와 함께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는 그들을 저지할 능력이 없으므로 플라키디아는 아에티우스를 서로마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학자들은 당시 아에티우스가 로마 황제위를 요청해도 받아드려졌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하튼 아에티우스가 황제위를 요구하지 않아 플라키디아로서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곧바로 루가에게 판노니아 지역을 주었는데 판노니아는 현재의 헝가리 부다페스트 지역으로 훈족이 로마와 대등한 위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훈족이 영구적인 정착지를 얻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에티우스와 아틸라는 로마 제국의 운명을 놓고 451년 세계 15대 전투 중 하나인 살롱전투를 벌이는데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아틸라가 세계사적으로 큰 명성을 갖고 있는 것은 세계 3대 정복자 중 한 명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연대순으로 보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훈족의 아틸라, 몽골의 칭기스칸입니다.
이 중 흥미로운 것은 알렉산더와 아틸라는 상당한 교육을 받았지만 칭기스칸은 글을 모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간판스타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가르쳤으며 아틸라는 훈족임에도 로마의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반면 칭기스칸은 상당히 후대 사람으로 사상 최고의 영토를 확보한 정복자가 되었는데 학자들은 이를 실예로 지식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다룰 수 있는 지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예로 자주 거론됩니다.
그런데 아틸라가 남다른 것은 아시아인으로 유럽 중심부까지 점령한 정복자라는 점입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아시아인이 유럽에 진출한 적이 있지만 유럽의 중심부까지는 진출하지 못했다고 설명됩니다.
크게 말하여 3명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진출했는데 가장 먼저 현재의 유럽 땅에 발을 디딘 사람은 유명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1세 대왕(기원전550~기원전 486)과 칭기스칸(1162 ~ 1227)그리고 아틸라입니다.
신의 징벌, 아틸라 등장
훈족의 왕인 루가가 434년 사망하자 훈족의 전통에 따라 형인 블레다와 아틸라가 공동 통치합니다.
당대의 제국은 거의 모두 공동통치 즉 왕이 2명이었는데 로마, 이집트 등도 이 제도를 채택했습니다. 이는 한 명이 갑자기 사망하더라도 정상에 공백이 없게 하기 위한 것으로 잘 알려진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동생과 공통 파라오가 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하튼 두 명이 훈족의 동부와 서부를 다스렸는데 형인 블레다는 전형적인 훈족으로 무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인 반면 아틸라는 로마에서 410년부터 약 10년간 교육을 받았으므로 신중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습니다.
두 사람은 짝이 잘 맞아 루가가 사망하자 로마의 공물 제출이 늦어지자 다음해인 435년 동로마제국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하자 동로마는 훈족의 요구대로 마구르스 협정을 맺습니다. 이 협정에 의하면 동부유럽과 중부 유럽 모두 훈족의
지배를 받으며 서고트의 경찰권을 훈족이 갖는다는 것으로 훈족이 명실공히 당대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당시 훈족의 영토는 도나우 강에서 라인강으로 확대되어 훈족의 영토는 로마제국보다 더 넓었습니다.
아틸라의 시대는 443년에 열리는데 이는 공통 왕인 블레다 형이 사망하여 단독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블레다가 갑자기 사망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지만 이 당시 아틸라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설 중 하나를 만듭니다.
바로 엑스칼리버입니다.
전설에는 아틸라가 군신 마르스의 신성한 검을 찾아내자 모두들 아틸라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이후 아틸라가 제국을 통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틸라와 거의 동시대 또는 후대에 살았다고 살았다는 영국 아더왕의 엑스칼리버 전설도 아틸라의 전설에서 차용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틸라는 집권하자마자 두 가지 혁신을 취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참모들을 대부분 외국인으로 구성했는데 아틸라는 외국인들이 훈족보다 발전된 곳에서 살았으므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로마 를 멸망시킨 오도아케르의 아버지 에데코는 아틸라의 참모였습니다.
둘째는 훈족의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로 바꾼 것으로 이는 아틸라가 로마제국을 궁극적으로 점령하여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틸라는 이 당시 남 발칸반도, 북 발트 해안, 동 우랄산맥, 서 프랑스 등 45종족 지배했으므로 로마 정복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틸라가 집권이후 훈제국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는데 서로마에서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450년 플라키디아의 딸로 서로마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406 ~453)가 친위병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그녀는 곤경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 최선은 아이 아버지가 황제가 되는 것이라며 동생을 퇴위시키려는 공작을 벌이다가 어머니인 플라키디아에게 발각됩니다. 플라키디아는 친위병을 처형하고 호노리아를 동로마제국의 수녀원으로 보냈죠.
문제는 호노리아입니다. 호노리아는 동로마 수녀원에서 평생을 보낼 생각이 없었으므로 아틸라가 로마 궁정에 있을 때부터 잘 알고 있는 아틸라에게 비밀리에 결혼반지를 보냈는데 자신과 결혼하면 서로마제국의 절반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상당한 근거가 있는데 당대의 관례로 로마는 두 명의 황제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발렌티아니우스 3세이고 또 한 명은 호노리아입니다.
실권은 동생인 발렌티아니우스 3세에게 있지만 명목상 즉 공식적으로는 호노리아도 여황제 타이틀이 있으므로 상속권이 있었습니다. 호노리아의 금화가 발행된 이유입니다.
호노리아의 제안을 받고 아틸라는 자신에게 수많은 부인이 있다고 했지만 당대에 수녀원에 유폐되면 살아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호노리아가 그런건 상관없고 아틸라는 이에 흔쾌히 호노리아와 결혼하겠다고 승락합니다.
당시 동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 408~450) 는 두 명의 결혼한다면 서로마와 훈족간에 권력다툼으로 대충돌이 일어나 것이므로 동로마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며 호노리아를 수녀원에서 빼내어 서로마로 보냈습니다.
사건이 확대된 것은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로 보아 공동 황제인 호노리아와 아틸라의 결혼은 서로마의 절반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단호히 이들 결혼을 반대하고 호노리아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켰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사건이 묘하게 흘러갑니다.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자신과 공동 황제인 호노리아와 아틸라가 결혼한다면 서로마의 절반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단호히 이들 결혼을 반대하고 호노리아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켰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결혼 즉 훈족의 왕과 명목상 로마제국의 여황제인 호노리아의 사건은 예술가들의 상상을 자극하여 수많은 작품들이 태어나는데 실제로 아틸라를 다룬 많은 작품들이 이들의 일생을 주제로 담고 있습니다.
헐리우드의 영화배우 안소니퀸과 소피아로렌 주연의 “아틸라’ 에서도 소피아로렌은 호노리아 역으로 나옵니다.
아틸라와 아에티우스와의 대결
로마에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451년 근거지인 판노니아에서 출발하여 대대적으로 서로마제국을 공격합니다.
이 공격에서 서로마는 초토화되는데 현재의 독일 트리어, 쾰른, 벨기에, 프랑스 메츠, 스트라스부르그, 랑스, 오레앙 등 갈리아 지역의 로마군을 모두 격파했습니다. 특히 아틸라는 자신이 진군하는데 반항하는 메츠는 본보기로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아틸라가 프랑스 북부인 랑스를 거쳐 현재 샤토의 중심부라는 르노아 강의 오레앙까지 진군하자 플라키디아는 아에티우스를 구원투수로 등장시킵니다.
플라키디아로 볼 때 아에티우스가 그녀의 아킬레스건이지만 아틸라를 잘 알고 있으므로 서로마의 대항마로는 그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세계 15대 전투로 알려진 살롱 전투의 배경으로 훈족의 아틸라와 로마제국의 아에티우스 간에 로마의 운명을 걸고 프랑스 중서부 트로아에서 대결전이 벌어집니다.
로마군 총사령관이 된 아에티우스는 아틸라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서고트, 부르군트, 켈트 족 등과 연합군을 형성했습니다. 아에티우스가 이들을 합류시킨 것은 이들 모두 훈족에게 원한이 있는 부족으로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병력은 30만 명입니다.
이 전투에서 아틸라도 동코트 등 30만 명을 동원했으므로 아에티우스와 병력은 거의 동일했습니다.
이 당시 동원된 훈족 1만여 명 정도였인데 놀라운 것은 전사자가 15만-30만 명으로 포로는 전혀 없었고 부상자만 소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투가 철저한 살육전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런던 대학 크리지 교수는 살롱전투를 세계 15대 전투 중 하나로 포함시켰습니다. 또한 아틸라보다 약간 후대인 역사학자 요르다네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고금 사상 이만한 전투 없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못 본 사람은 후회했을 것이다.’
전투는 프랑스 우변 중부의 트로아 지역 마우리아쿰에서 벌어졌는데 로마군과 아틸라군은 진지 구축없이 곧바로 전투에 들어갑니다. 살롱 전투 현장의 유물이 거의 없는 이유입니다.
또한 아틸라는 아에티우스가 훈족을 잘 알고 있으므로 훈족의 전투 방법을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했고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이 서로 맞붙게 했습니다.
살롱 전투 결과는 서양 문명에 매우 다행한 일이었지요. 양측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있었지만 결론은 무승부였습니다.
그런데 쌍방에서 수십만 명이 살상된 대규모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이 전투에 상당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우선 아틸라가 끝장올 보지 않고 철수했기 때문입니다. 승패에 철저한 훈족이 결과를 보지 않고 철수한 것인데 더욱 이상한 것은 전투 중 서로마제국의 주력인 서고트의 왕 테오도리크가 전사하여 서고트가 전열에서 이탈했음에도 총공격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틸라가 서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근거지인 판노니아로 철수한 것은 서로마가 멸망하면 힘의 균형이 무너져 게르만 족이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으로 추정합니다.
둘째 의문점은 아에티우스도 굳이 철수하는 아틸라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틸라가 철수하면서도 나름대로 로마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으므로 섣불리 공격했다가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에티우스도 야만족 간의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야만족끼리 싸우면 로마는 그만큼 안정해진다는 뜻으로 한마디로 아틸라를 완전히 격멸시키면 추후 칼이 로마로 돌아올 것임을 잘 알고 타협 아닌 타협을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살롱 전투를 로마 즉 아에티우스의 승리로 설명합니다.
로마가 막강한 훈족에 결정적인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서로마가 훈족에 패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신화를 만든 것이죠.
문제는 로마 상층부의 생각입니다. 로마는 아틸라가 퇴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에티우스가 아틸라를 추격하지 않았다는 것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아에티우스가 로마측이 아니라 아틸라 측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총사령관인 아에티우스를 공격한 것은 한마디로 훈족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철수했으므로 로마는 안정을 찾았고 아에티우스의 임무는 끝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때 현 프랑스 파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틸라가 프랑스 중부의 르노아 강 유역으로 진군하려면 파리를 거쳐야 합니다. 아틸라가 진군한다고 하자 파리 시민들은 아틸라에 항복하자고 했습니다. 아틸라는 전투전에 항복하는 사람은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이때 처녀인 즈느비에브(419/422? ~502/512?)가 나타나 신이 자신에게 나타나 항복하면 안 되며 철저하게 싸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녀는 17-18살의 목동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곧바로 프랑스의 처녀 목동 잔다르크를 떠올릴 것입니다. 여하튼 파리 시민들이 항복하자는 말에 처녀는 파리 시민 모두 떠나더라도 자신은 혼자 남아 신의 명령대로 아틸라에 대항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아틸라가 진군 중에 있는 파리를 공격하지 않고 우회하여 르와르 강으로 진군한 것입니다.
파리가 극적으로 살아났는데 이 일화는 프랑스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되어 처녀 즈느비에브는 구국의 여신이 됩니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전투에 참여하기 전 장병들이 즈느비에브를 외치며 승전을 다짐하는데 제1차, 2차 세계대전에도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구국의 영웅인 즈네비에브의 일화는 아틸라와 함께 프랑스 프랑스 영웅을 기리는 판테온안에 있는 대형 벽화의 주인공이 됩니다. 또한 그녀의 기념비는 프랑스 노트르담 사원 후면에서 가까운 세느강 안에 있는데 사실 노트르담 사원은 후면에서 볼 때 가장 아름다우므로 반드시 찾아보기 바랍니다.
로마 정복을 선언한 아틸라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전투 중 하나인 살롱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아틸라는 근거지인 판노니아로 들어가 철저한 정비를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의 전술과 로마의 무기 체계를 도입한 후 그야말로 세계를 놀라게 한 역습을 가합니다.
살롱전투가 벌어진 451년에 이어 다음해인 452년 상당한 피해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틸라가 또 다시 서로마를 공격한 것입니다. 서로마는 아틸라가 큰 피해를 보아 당분간 재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틸라가 다시 침공한 것이죠.
특히 아틸라는 아에티우스와의 전투 경험을 토대로 신속히 로마와 같은 편제와 전투장비로 무장한 후 전통적으로 훈족이 공격한 갈리아 지역이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를 직접 공격했습니다.
문제는 로마가 아틸라를 방어할 여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아에티우스를 의심하여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가 로마제국을 초토화시키면서 진군하는데도 그를 활용하지 않았지요.
아틸라는 벌거숭이 로마를 마음껏 유린했습니다. 우선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아퀼레이아를 점령해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아퀼레이아는 로마제국에서 금화를 발행하는 2개 도시 중 하나일 정도로 중요한 곳인데 아틸라가 철저하게 파괴하자 아퀼레이아를 탈출한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 바로 베네티암으로 현재 베니스입니다. 베네티암은 ‘나도 살아서 이곳에 왔다’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아틸라는 파죽지세로 파두아, 베로나, 베르가모로 진격하여 북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아틸라가 밀라노를 서양세계는 그동안 보지 못한 최초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동양인인 아틸라가 밀라노 성당에서 로마의 지배자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것은 밀라노가 잠시 로마제국의
수도로 선언된 적이 있었으므로 훈족의 아틸라는 밀라노의 정복 자체로 로마 제국을 점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아틸라가 당시 밀라노 성당에서의 대관식에 앉았던 돌로 만든 옥좌는 현재 토르첼로 섬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가 아틸라에게 점령당하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에게 호노리아를 부인으로 주겠다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실제로 아틸라와 호노리아가 결혼했다는 말도 있지만 이때 아틸라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이 일어납니다.
말라리아가 아틸라군을 습격한 것입니다. 아에티우스는 아틸라 진영에 말라리아가 퍼졌다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 군대를 주면 아틸라를 공격하겠다고 했지만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야말로 놀라운 결정을 내립니다. 교황 레오 1세에게 아틸라와의 협상을 의뢰했습니다.
두 사람의 협상은 말을 타고 이루어졌는데 놀랍게도 아틸라가 철수하겠다고 선언했으며 로마는 아틸라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았습니다. 이 사건은 서양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는데 레오 1세의 협상 성공으로 가톨릭교회가 로마 문명의 수호자가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명목이지만 로마신들의 제사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는데 이플 포기하고 교황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교황은 ‘폰티프’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물론 아틸라가 공짜로 레오1세의 청을 들어 준 것이 아닙니다. 아틸라는 헝가리 판노니아로 철수하는 대신 그가 점령한 북이탈리아의 지배권을 확실하게 보장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협상 자체는 아틸라의 승리라고 평하는 이유입니다. 당대를 아틸라의 훈제국과 로마제국이 양분한다는 뜻이죠.
여하튼 아틸라가 로마로 진군해도 가능했음에도 협상에 의한 것은 말라리아의 영향도 있지만 로마를 공격하려면 공성 장비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추정합니다.
또한 로마를 언제든지 점령 가능하므로 막상 로마를 점령하더라도 로마 통치를 위한 방안을 연구해야 하므로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도 있었던 것으로 설명합니다.
훈족의 아틸라가 강력한 로마제국을 굴복시킬 수 있는 저력이 무엇이냐에 많은 연구들이 있었는데 학자들은 대체로 다음으로 설명합니다.
훈족은 전투하기 전에 훈족의 공격을 알려주고 항복 즉 훈족에 복속할 경우 준 훈족으로 우대했습니다. 준훈족이란 ‘친구 또는 동반자’를 의미하면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습니다. 정통 훈족이 단 1만 여 명에 지나지 않는데도 살롱전투에서 30만 명을 동원할 수 있었던 요인입니다.
아틸라가 제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틸라의 개인적인 카리스마와 관련됩니다. 그는 아틸라제국의 황제가 되었음에도 식사는 나무식기를 사용했으며 돌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부하들은 거의 대부분 각 부족의 왕이므로 금식기 등을 사용하는데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아틸라의 놀라운 점은 수많은 전투에서 항상 선두로 공격에 나섰고 아에티우스와의 살롱 전투에서도 선봉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선봉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사기를 올렸습니다.
더불어 아틸라는 전리품을 부하들에게 모두 공정하게 분배했습니다. 당시 용병들의 기본은 전리품의 분배인데 아틸라가 모든 재물을 공유화했으므로 수많은 부족으로 구성된 훈제국임에도 아틸라가 일사분란하게 제국을 이끌 수 있었던 요인입니다.
아틸라의 사망과 훈족의 멸망
아틸라는 레오1세와의 평화조약을 후회하고 동로마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세계사를 놀라게 할 사건이 돌발적으로 발생합니다.
453년 58세의 아틸라가 부르쿤드 공주인 일디코(힐디코)와 결혼한 당일 사망합니다. 일디코는 독일의 전설인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크림힐트로 등장합니다.
과거의 학자들은 아틸라가 권력다툼 또는 부르쿤트 공주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근래 과학자들은 아틸라의 사망 정황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결혼식에 과음으로 질식사했다고 추정합니다.
실제로 아틸라는 폭음으로 유명한데 그만 결혼식에서 흥분하여 많은 량의 술을 마셔 질식사했다는 것이죠. 영웅의 최후로는 그야말로 황당한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틸라가 갑자기 사망하자 훈족은 그야말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재빨리 와해되었습니다. 이는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의 카리스마를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453년 아틸라가 사망하자 아틸라의 정비인 붉은 머리 왕비의 아들인 엘락(권력 분할)이 집권하지만 훈족 휘하의 게피다이족이 반란을 일으켜 이들에게 패배하면서 사망합니다.
이어서 아들 덴기지크가 집권합니다만 덴기지크 역시 강력한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하여 469년 동로마 아나게스테스 장군에게 패배하여 훈족은 완전한 종말을 맞이합니다.
훈족은 워낙 거대한 제국이었으므로 상당히 광법위하게 행방이 나뉘는데 우선 훈족의 주력은 카스피해 북부로 후퇴하여 러시아 남쪽 크림 지역에서 근거지를 만들었습니다. 러시아인의 얼굴 벗기면 타타르(몽골-투르크족)인이 된다는 이유입니다. 가장 잘 알려진 내용은 마자르 인과 융합하여 헝가리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헝가리인은 현재 자신들이 아틸라의 후손이라고 자랑합니다.
트란실바니아의 세케리 족은 현재 약 70여 만 명인데 이들은 자신들이 아틸라의 정통 후손이라며 아틸라 자치정부를 요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훈족의 일원인 불가르 족은 다뉴브강과 발칸 산맥 하류에 항구적 발판을 마련했으며 에프탈인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여 공물 받았으며 결국 굽타 제국이 멸망하는 계기가 됩니다.
또한 인도 서북부에 훈족의 후예가 들어가 지배하는데 특히 라지푸트족은 힌두교로 개종하였고 잘 알려진 카스트제도의 상위층인 크샤트리아로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틸라와 아에티우스가 격투를 벌인 프랑스의 투르와 인근 쿠르티솔 등에 훈족의 후예들이 아직도 살고 있으며 스위스에도 상당수의 훈족이 남아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훈제국의 후손들이 세계곳곳에 현재도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막강한 훈제국이 갑자기 멸망하자 서로마제국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틸라가 사망하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더 이상 아에티우스는 필요없다며 454년 즉 아틸라가 사망한 다음해에 살해합니다. 그러자 455년 아에티우스 부하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살해하며 이후 455년에서 476년 즉 10년 동안 10명의 황제가 등장합니다.
서로마의 최후는 대체로 476년 아틸라 부관인 오레스테스의 아들 로물루스가 15세로 등극한 후 단 10개월로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되면서 종말을 맞이 합니다.
로물루스의 향방은 아직도 미지수인데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으로 보냈다고 알려지지만 영화 ‘마지막 군단’에서
엑스칼리버를 던진 아더왕의 아버지가 된다고 나옵니다.
한마디로 당시 가장 낙후된 지역인 영국이 로마의 후계자라는 정통성을 갖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친 훈족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는 것은 우선 훈족에 문자가 없기 때문으로 현재 알려진 자료는 훈족에 의해 점령되어 큰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이 적은 것이 일부 남아있을 뿐입니다. 이는 훈족에 대한 피해자의 일방적인 기록이므로 그대로 믿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일부 목격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매우 다른 면이 있습니다.
우선 훈족에 고정된 주거지가 없는 유목생활만 했는데 근래의 발굴에 의하면 사진처럼 기와 등 대형 건물을 건설한 흔적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 건물은 북방인처럼 목조 위주라는 점입니다.
또한 훈족은 이동을 전제로 했으므로 가볍고 가격이 많이 나가는 금은과 금속제 세공으로 만든 장신구 등을 주로 갖고 다녔습니다.
특정 종교를 신봉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곰을 토템으로 삼았고 마을 앞에 서낭당과 같은 표지를 세웠는데 대체로 말의 두개골 꽂은 장대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에게 기술자들은 없으므로 금세공, 청동그릇, 도공, 무기 제작, 피혁공, 목수 등이 모두 외부인이라고 설명했으나 훈족에 이들 전문기술자들이 당대의 어느 국가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기술자들을 우대하여 자유를 주었는데 이들은 훈족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훈족이 매우 점진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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