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에 재발견된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오랜 동안 예술가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상상을 부추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가사의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엄청나게 과장되거나 상상으로 포장되어 갔다. 인간의 속성상 잡다 놓친 물고기가 항상 크게 느껴지듯이 실물을 보지 못한 불가사의의 경우 더욱 더 과장되게 마련이다. 공중정원을 하늘에 떠 있는 대형 건물로 생각했으며 로도스 섬의 거상의 경우 두 다리 사이로 거대한 함선들이 통과하는 그림이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이런 전설들의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실 타임머신처럼 편리한 것은 없다. 과거나 미래, 어느 때로든 자신이 원하는 지점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모두 돌아보며 환상의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자. 상상의 나래는 끝없이 펼쳐진다.
우선 바빌론의 공중정원에서 맥주를 마시며 밖을 바라다보는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으며 30층이나 되는 파로스 등대의 꼭대기에서 항구로 들어오는 수많은 배를 일일이 세어 볼 수도 있다. 그뿐 아니다. 기자의 피라미드가 건설되는 장면을 직접 보면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제우스 신상을 제작하고 있는 유명한 조각가 페이디아스를 만날 수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는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만든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뽐내는 상인들도 볼 수 있고 로도스의 청동거상, 할리카르나소스의 모솔 왕의 무덤을 보면서 고대인들이 품었던 정열과 믿음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타임머신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유적이 남아있지 않고 기록조차 미비한 과거의 기념물에 대한 이해는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단편적인 정보를 나름대로 해석한 것일 수밖에 없다. 진실과는 전혀 다른 상상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기념물에 대해 인간들은 왜 동경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만들어 낸 기념물이기는 하지만, 인간들이 만들어 냈다기에는 믿기 어려운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이라크의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터키의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그리스의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과 로도스의 청동거상,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와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피라미드 하나만 빼곤 전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역사>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세계7대 불가사의가 어떻게 설정되었느냐이다. 한마디로 어떻게 7개로 한정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가 건립된 시대를 통틀어 본다면 불가사의로 선정된 기념물보다 더 거대하고 유명했던 기념물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명단이 확정되기까지에는 수많은 기념물들이 거론되었다가 제외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당대에 유명했던 유적들이 제외되고 최종적으로 7개 유적들만 선정된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 기념물들이 다른 것들과는 달리 고대인들에게 꿈과 희망, 환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환상은 계속해서 다음 세계로, 새로운 인간들에게 전해졌다. 실물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환상들이 신성화되고 부풀려지면서 불가사의는 계속 인간의 머리 속에 깊게 각인되어 전설다운 전설로 이어져 오게 된 것이다.
1633년 루이 13세가 임명한 뵈시우스 대사가 교황 우르반 8세의 허락 하에 교황청에 있는 도서관의 책들을 열람하고 있었다. 320장이나 되는 다소 두꺼운, 지리에 관한 서류를 보던 뵈시우스의 몸이 갑자기 얼어붙은 듯 뻣뻣하게 굳으며 눈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겨우 여섯 장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글인데다가 마지막 부분도 사라지고 없었지만 ‘비쟌틴의 필론(Philo of Byzantium)’이라는 저자가 쓴 『세계의 7대 불가사의 Péri tôn hépta théamatôn』라는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발견한 자료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뵈시우스는 라틴어로 번역한 후 책으로 발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출판을 미루고 있는 사이, 1640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레로 알라티우스가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책을 출간한다. 알라티우스는 당시에 교황청의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므로 뵈시우스가 발견한 불가사의에 대한 자료를 항상 접할 수 있었다. 그 점을 이용해서 재빨리 책을 내 놓은 것이다.
이로 인해 선취권에 관한 논쟁이 일어난다. 비록 알라티우스가 라틴어로 번역하여 책을 발간하긴 했지만 자료를 최초로 발견한 영예는 뵈시우스의 것이기 때문이다. 알라티우스가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선취권에 대한 논쟁이 야기될 것으로 예상하고 자신이 번역한 책을 이 분야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바르베리니 추기경에게 바쳤다. 결국 추기경의 주선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를 최초로 발간한 알라티우스에게 모든 권한을 주되 자료를 최초로 발견한 영예는 뵈시우스라고 인정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예상대로 책이 발간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상상으로만 알려졌던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대한 신드롬이 각지에서 일어나 현지를 방문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곧바로 제동에 걸리고 만다. 자료에 대한 신빙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에 보관된 모든 자료는 14세기에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엄밀하게 재조사되었는데 그 당시의 학자들에게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대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꼼꼼하기로 소문난 중세시대의 학자들이 교황청에 소장된 모든 자료를 그야말로 철저하게 조사하여 색인 목록까지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필론의 원고가 진짜임이 드러났다.
교황청에 있는 자료를 학자들이 조사할 당시에 그 원고는 교황청에 없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필론의 원고는 원래 독일 지역인 바비에르에 있는 막시밀리언 공작의 하이델베르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인 협상에 의해, 사실은 강제적인 요청에 의해서였지만, 이 자료가 1623년에 알프스를 거쳐 교황청에 도착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쉽게 종결되진 않았다. 필론의 원고가 진본이라는 것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알라티우스의 번역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 장에 무려 150개의 오류가 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계속적으로 팔려나갔고 1797년 프랑스 혁명군대가 이탈리아에 원정을 갔을 때, 이러한 인기 때문이었는지 역시 정치적인 협상으로, 교황청 도서관의 서류 일부를 인계 받으며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대한 이 서류도 인계를 받게 된다. 교황청에서 다시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파리로 돌아간 것이다.
곧바로 이 자료에 관심을 갖고 있던 F. J. 바스트에 의해 1805년에 번역본이 발간되며 알라티우스의 오역은 다소 교정된다.
그러나 유럽의 정황이 급속도로 바뀌어 나폴레옹이 1816년에 실각하자 로마의 교황 피오 7세가 임명한 대사는 파리에 도착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대한 자료를 비롯하여 프랑스가 교황청에서 갖고 간 모든 유물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독일 측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원 소유자는 자신들이므로 교황청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항의했다. 결국 수많은 협상 끝에 이 자료는 원래의 보관소였던 하이델베르그로 보내져 지금도 하이델베르그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바스트의 번역을 수정하여 1816년에야 비로소 라이프니찌의 오르리에 의해서 보다 정확한 번역본이 탄생한다.
<필론이야기>
비잔틴의 필론(Philo of Byzantium, 기원전280〜기원전 220)은 그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위대한 엔지니어 중 한 명으로 기계 공학과 자동 기계의 선구자로 알려진다. 공압의 아버지로 불리는 크테시비우스(Ctesibius)의 제자로 비잔티움시 출신이지만 로도스를 거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했다.
그는 이론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많은 기계들을 설계했는데 압축 공기, 레버, 도구 및 모래 시계를 사용하여 작동하는 공압 장치를 만들었다. 군사무기 개발에도 조예가 있으므로 발리스타(ballistas), 투석기와 석궁도 발명했는데 이들은 요새화된 도시 국가를 포위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그는 항구와 항구뿐만 아니라 도시의 성벽, 탑 및 요새를 건설했는데 등대의 사이렌은 증기로 작동했다.
그의 발명품 중 잘 알려진 것은 자동으로 움직이는 오토마타 즉 자동인형 등을 만들었는데 현대로 보면 인공지능의 선구자라고도 볼 수 있다. 학자들은 필론을 고대 증기기관 즉 자동 식수 판매기 등을 발명한 알렉산드리아 헤론의 선배로 설명한다.
다방면에 재주가 있는 필론은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그가 세계7대 불가사의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틀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덕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세계 7대 불가사의는 그리스와 알렉산더 대왕과 직간접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7대 불가사의 중 다섯 개는 모두 그리스 즉 마케도니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알렉산더 이전에 건설되었지만 알렉산더가 점령한 지역이며 파로스 등대는 알렉산더가 건설한 알렉산드르아에 설치되었다. 또한 공중정원이 있는 이라크의 바빌론도 알렉산더가 점령한 지역이다.
그런데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그리스로부터 매우 먼 거리인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포함된 것은 오로지 알렉산더의 힘이다. 이는 알렉산더가 당대 문명세계의 거의 전부 즉 인도까지 평정했기 때문이다. 고대에 장거리 여행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다. 지리 정보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인데 더욱 중요한 것은 외부인에게 배타적인 지역이 많으므로 함부로 외지로 들어갔다 곤욕을 치루는 것은 물론 살해당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알렉산더가 인도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인도까지의 여행정보가 확보되었다는 것이다. 다방면에 재주가 있는 필론은 당대에 유명한 건축물을 모두 현장 답사한 후 7개를 선정했다. 그런데 이는 알렉산더가 이들 지역을 평정하여 위험없이 방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알렉산더가 평정한 지역에 근거한다. 필론이 당대에 이미 건설되어 있는 영국 즉 브리튼의 스톤헨지를 방문했다면 분명 명단에 넣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당시 브리튼 지역은 문명지역이 아니었다.
여하튼 알렉산더가 사망한 후인 기원전 2백90년에 건설된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로도스의 거상이 불가사의에 포함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알렉산더 대왕을 기리기 위해 불가사의 목록이 조절되었다는 일부 속설도 그럴듯하다. 이 때문에 알렉산더의 부하로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워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1세 소테르가 파로스 등대를 건설한 것도 사실은 자신이 알렉산더 대왕과 관계되는 것만 불가사의에 들어가도록 조종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 말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가 그리스 문화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고대 시대 광고의 하나라고 말한 말과 일치한다. 일부 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1세 소테르를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저자로 추측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문헌은 후대로 갈수록 변질이 되어 처음의 저자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언어학과 자료에 사용된 단어와 배경, 유사 자료들을 검토하여 원래의 원문이 뜻하는 바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세계 7대 불가사의는 필론의 자료가 전부이므로 이러한 교정을 할 수가 없었다.
학자들은 필론이 선정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쓰여져 있는 말투와 편집 내용을 볼 때 10세기초에 가필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필론의 원고가 후대에 가필되었다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필론이 『세계 7대 불가사의』를 공식적으로 정리했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특히 원고에는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이 빠져 있지만 그가 할리카르나소스라는 말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원본에는 마우솔레움이 포함되어 있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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