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악당의 대명사>
지구상에서 천사와 악당으로 거명되는 과학자는 많지 않다.
일단 노벨상을 받았다면 인류에 가장 공헌한 사람으로 거론되므로 분야에 따라 천사로 불리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더불어 악당이라는 이름으로도 거명된다. 선악이 분명하다는 뜻인데 노벨상 수상자에는 이런 명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몇몇 있다.
그중에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인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해냈다는 독일의 프리츠 하버(Fritz Haber, 1834〜1934)이다.
지구상에 태어난 생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다. 대다수 식물들이 태양과 공기 등으로 살 수 있다고 하지만 이들 역시 태양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동물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식물처럼 태양에너지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생활에 필요한 영양분을 외부로부터 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인간의 경우 일주일 동안 아무런 음식을 먹지 못하면 치명상을 입기 마련이다. 인간이 살아가려면 의식주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중 음식은 차원이 다름은 물론이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수많은 아이디어가 태어나는데 그것의 대부분이 식량과 관련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 때문에 ‘먹기 위해서 사는지, 살기위해서 먹는지’ 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는 뜻을 잘 알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언제나 원하는 만큼 확보하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쌀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식량 안보’라는 말도 안정적인 식량 확보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렵시대를 넘어 농경시대로 들어가자 농부들은 개간한 땅의 첫 작물이 가장 품질이 좋다는 사실과 땅도 사람처럼 피로를 느끼면서 점점 생산량이 줄어든다는 점을 파악했다. 얼마 후 누군가가 베어낸 풀을 태운 곳에서 작물이 더 잘 자란다는 점을 알았다. 사람들은 ‘화전농법’ 즉 정글에서 나무를 태우고 밭을 만든 다음 몇 년 후 이동해 정글이 회복되도록 하는 방법을 도출했다. 문제는 정글이 회복되더라도 밭을 이동하는 것은 먼 거리를 걷거나 마을을 옮겨야 하므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정주 사회에 마을과 토지 소유권이 생기자 화전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다른 방법들을 찾았다.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땅을 개선하기 위해 해초,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 오래된 뼈, 조개껍질 등 식물을 개선시킬 것으로 생각되는 여러 첨가물을 땅에 뿌렸다. 유기 비료인 배설물은 특별히 소중하게 여겼다. 영국 청교도단이 처음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인디언들은 그들에게 옥수수 심는 법을 보여주면서 씨앗과 함께 ‘생선’을 뿌리라고 했다. 생선은 청어로 추정하는데 그 지역에서는 비료로 통했다. 청교도들은 얼마 후 뉴욕 등지에서 공급된 생선을 헥타르 당 15000〜2000마리 가량 뿌려 비료로 이용했다.
1840년 화학이 발전하자 학자들은 토양에 필요한 주요 영양분은 질소와 인, 칼륨 등인 것을 발견했다. 19세기 초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남아메리카 페루에서 바닷새인 구아나이와 피케로의 배설물인 구아노와 칠레에서 나오는 칠레초석으로 질 좋은 비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칠레초석이 세계의 각축장이 되어 혈투가 벌어진 요인이다. 그런데 칠레 초석과 구아노를 누구나 마음대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식량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료는 항상 부족했다. 19세기말 세계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과학자들이 ‘질소 위기’ 즉 식량위기가 닥친다고 주장했다.
<질소 고정의 어려움>
식량 증산이 어려운 이유는 식량을 구성하는 주된 화학 원소가 탄소, 수소, 산소이기 때문이다. 식물은 잎을 통해 받아들이는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로부터 탄소와 산소, 뿌리를 통해 흡수한 물에서 수소를 얻는다. 이렇게 얻어진 원소들은 광합성을 통해 최종적으로 탄수화물이 된다. 광합성은 엽록체라는 식물 세포의 특수한 기관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기관에서 단백질, 핵산 등을 만들려면 탄소, 수소, 산소 외에도 질소와 인이 필수적이다. 대개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이산화탄소와 물은 지구상에 풍부하지만 질소와 인은 부족하다. 그래서 식물에 질소와 인을 비료의 형태로 공급해 주면 단위 면적 당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
질소가 생명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질소가 유전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핵산들의 구성성분이면서 모든 식물과 돌물들의 세포 구조 성분을 만드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몸 안의 신호를 전달하고 받아들이며 생체촉매작용을 하는 단백질들에도 질소가 들어있다.
인은 인산염을 많이 포함한 암석을 산으로 처리해서 비료로 만들 수 있고, 또 식물에 필요한 소량의 칼륨도 재를 뿌리면 보충할 수 있다. 그러나 질소 성분은 퇴비나 동물의 분뇨, 그리고 무기 질산염(칠레 초석, NaNO3)이나 구아노를 통해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공기 중에는 78퍼센트에 해당하는 질소가 있지만 공기 중의 질소는 두 개의 질소 원자가 삼중결합에 의해 단단히 묶여 있는 분자(N≡N)이므로 이들을 떼어내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질소의 특성 때문인데 질소 분자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225.1㎉/㏖의 에너지가 필요하고 보통의 기압 상태에서는 3,000도로 가열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여하튼 이들 원자를 떼어내 식물세포가 이용할 수 있는 암모늄 이온(NH4-)이나 질산이온(NO3-)으로 만드는 것을 질소 고정이라고 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두 가지 방법에 의해 공기 중의 질소가 고정된다. 첫째는 번개가 칠 때 그 에너지에 의해 질소 분자의 결합이 깨져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고정된다. 문제는 이 때 생성되는 질소의 양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는 콩이나 아카시아 같은 콩과식물의 뿌리에 기생하는 뿌리혹박테리아 등에 의해서도 질소고정이 일어난다. 뿌리혹박테리아는 식물과 미생물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세균이다. 이것은 ‘공생 유리 질소 고정균’이라고도 불리는데 보통 콩과식물의 뿌리혹 속에 살면서 유리 질소를 동화하여 콩과식물에 질소화합물을 공급해준다. 콩을 다른 작물과 번갈아 심거나 콩과식물이 자란 후에 갈아엎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지만 이런 경작 방법도 한계가 있다.
식물은 필사적으로 작은 양이지만 토양의 질소를 이용한다. 그러나 식물이 토양의 질소를 다 사용해 버리면 질소를 새로이 보충해 주어야 하지만 이것이 간단한 일은 아닌데 인간은 이럴 경우 묘수를 발휘한다. 러시아의 식물학자 티밀리야제프는 공기 중에 78%나 포함되어 있는 무한한 질소를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1908년에 노르웨이 화학자 빌케란과 에이디는 전기 불꽃을 이용하여 공업적 규모로 공중 질소 고정법이 개발되어 질소를 산업화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이들 일련의 질소 고정법은 보다 업그레이되어 흔히 ‘질소의 위기’라 부르는 19세기 말의 식량 위기는 극복되고 이후 인류는 오늘날과 같은 풍요와 고도 문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19세기 말 인구는 약 16억 명에 불과한데도 농업 생산량은 더 이상 증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지구의 인구는 70억 명을 초과했음에도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기아 사태는 거의 없다. 이것은 단기간에 농업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특히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과거보다 크게 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을 감안할 때 대단한 변화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게 한 과학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독일인>
질소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게 만든 사람은 독일의 프리츠 하버(Fritz Haber, 1834〜1934)이다. 하버는 1868년 독일의 슐레지엔 지방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에서 오래 전부터 뿌리 내린 유태인 가문의 부유한 아버지 지그프리트 하버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염료를 비롯해 여러 가지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상인으로 크게 성공했다. 그가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을 적절히 혼합하는 독특한 재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상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하버에게는 훌륭한 스승이 없으므로 거의 독학으로 과학을 공부했다. 1886년부터 베를린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옮겨 다니면서 화학, 물리학, 철학을 공부했지만 처음부터 화학에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당시 대학에서 가르치던 전통적인 화학 과목을 매우 불신하여 학창 시절 큰 관심을 기우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학은 젊은이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큼 매력적이지 못한 것은 고리타분한 과거의 정보에만 억매여 있다는 것이다. 간신히 대학을 졸업한 하버는 헝가리의 알코올증류소, 오스트리아의 솔베이 소다공장, 폴란드의 소금광산 등에서 화학 기술을 배웠다.
하버에게 큰 영향을 준 곳은 대학이 아니라 프로이센 전통이 살아있는 군대로 그는 그곳에서 군대식 매너, 군대의 계급과 규율에 매료되었다. 제대한 후 예비역 장교가 되고자 했지만 당시 독일군의 예비역 장교는 기독교도에게만 주어지는 명예이므로 유대인 하버는 자격미달이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았는데 입사 6개월 만에 거액을 투자한 사업에서 실패하여 회사에 커다란 손실을 입혔다.
사업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 하버는 유대인이라는 제약 때문에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놀라운 선언을 한다. 1891년 베를린에 있는 샬로텐부르크 공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해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다. 그가 개종하는 데는 배경이 있다.
20세기 초는 독일 과학의 전성기였다. 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많은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받았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유대인 과학자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1901년부터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까지 독일에 가장 많은 노벨상이 돌아갔는데 그 중 3분의 1이 유태인 과학자에게 주어졌다.
유대인들의 과학적 업적은 유대인들이 항상 자신들이 유태인임을 자각하고 그에 상응하면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려준다. 처음 독일에 이주한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관습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세대가 거듭할수록 독일 문화에 동화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독일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그다지 크지 않은 면도 있으므로 그들은 자신이 독일인이라고 생각했고 긍지를 갖고 있었다.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출세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대인임에도 독일 군대에 입대하여 독일인과 함께 동거 동락하는데도 문제가 없으므로 많은 독일인들이 완전한 독일인이 되기 위해 별다른 고민 없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하버의 경우 그가 진실한 의미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개종했다는 것이 큰 이슈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개종했다. 하버가 남다른 것은 다른 유태인보다 더 강하게 독일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했고 독일에 봉사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버는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오스트발트 연구실에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세 차례 모두 거절되었다.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거절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하버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대인이 아니라 채용될 여건이 되지 않아 발탁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버에게 구원의 손을 뻗친 곳은 막 설립된 칼스루헤 공과대학이었다. 1894년 칼스루헤 공업대학에서 물리화학 분야의 조교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업적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는 거의 독학으로 물리화학 분야의 에너지 전달 개념을 이용해 탄화수소 분해에 관한 이론적 해석에 도전했는데 이 연구로 유럽 화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이 당시 어느 정도로 열정을 갖고 연구에 몰두했는지는 1967년 그의 전기작가인 모리스 고란(Morris H. Goran)이 하버로부터 직접 들은 일화를 적었다.
‘매우 더운 어느 여름, 나는 스위스의 산으로 등산을 갔다. 여덟 시간 동안 등산한 후에 먹을 물을 찾던 중, 나는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물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는데 마침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우물을 발견했다. 나는 즉시 머리 전체를 물 속에 넣었는데 나는 몰랐지만 한 마리의 황소도 나와 함께 머리를 물 속에 넣고 있다. 둘 다 상대방에게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내가 머리를 물 밖으로 들었을 때 머리가 바뀐 것을 알았다. 나는 이후 황소의 머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로 성공했다.’
당시 독일 대학의 교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일화인데 여하튼 1898년 뮌헨 대학의 교수로 임명된다. 1901년에 동료화학자인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 1870~1915)와 결혼했다. 하버처럼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집안 출신인 클라라는 브레슬라우대학에서 여성에게 수여한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였지만 결혼하자 학문의 꿈을 접는다. 하버는 매우 고지식한 사람으로 소위 융통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으로 알려진다.
<인조 비료 생산 성공>
하버는 1904년부터 기체 반응의 물리화학적 자료를 근거로 기체 상태의 질소와 수소를 직접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만드는 연구에 착수했다. 질소와 수소를 갖고 암모니아를 합성할 때 반응에 참여하는 물질은 모두 기체다. 그리고 생성물질인 암모니아도 기체로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N2(g) + 3H2(g) ⇄ 2NH3(g) + 92.22kJ
공기 중의 78%나 되는 질소를 이용하여 암모니아를 만든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나무랄바 없지만 암모니아 합성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화학 반응을 화학식으로 나타낼 때 화학반응식의 좌변에서 우변으로 진행하는 반응(⇀)을 ‘정반응’이라 하고 우변에서 좌변으로 진행하는 반응(↼)을 ‘역반응’이라 한다. 위 식을 볼 때 겉보기에는 반응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반응과 역반응이 같은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상태를 ‘화학평형 상태’라고 하는데 이 경우 합성에 관계되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제공해 주어야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한마디로 위 반응이 진행된 후 어느 단계에 이르면 평형상태에 도달하기 때문에 그 후에는 더 이상 암모니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보면 암모니아는 질소 분자와 수소 분자의 화학 결합이 깨져야 만들어진다. 그러나 질소는 삼중결합을 이루고 있는 안정한 분자이므로 이 반응은 보통의 온도에서는 아주 느리게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온도를 높여주면 반응하는 분자들이 높은 운동에너지를 가지므로 단위 시간당 충돌 횟수가 증가하고 충돌에 의해 화학 결합이 깨지면서 재결합 생성물을 만들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반응 속도가 증가한다.
그러나 질소와 수소의 반응은 낮은 발열반응으로 열을 가해주면 오히려 암모니아를 얻는데 불리해진다. 그렇다고 온도를 낮추면 반응 속도가 너무 느려서 실제로 암모니아가 거의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버는 여기에서 반응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촉매를 사용했다. 화학분야에서 촉매를 일반적으로 ‘타임머신’이라고도 말한다.
모든 화학 반응에는 반응물과 생성물 사이에 높은 에너지 장벽이 있는데 촉매는 에너지 장벽을 낮추어서 화학 반응이 빨리 진행하도록 도와준다. 속도를 늦게 하려면 에너지 장벽을 높이는 촉매를 쓰면 된다. 하버는 평형 조건에 대한 수많은 실험으로 높은 압력을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고 5백도, 2백 기압 조건에서 오스뮴과 우라늄을 촉매로 사용하여 약 6~10퍼센트 수율의 암모니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하버가 암모니아를 만드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의 공정은 실험실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대량 생산에는 미치지 못했다. 특히 오스뮴도 구하기가 어려워 암모니아의 대량 생산에는 적당하지 않았으므로 하버는 염료를 생산하는 화학회사 BASF에 암모니아 합성을 공정화하는 일을 의뢰했다. 이때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이 바로 보쉬(Carl Bosch, 1874~1940)이다.
1874년 독일 쾰른에서 태어난 보쉬는 대학에서 금속학과 기계공학을 공부했지만 1896년부터 라이프치히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여 1899년 유기화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BASF사에 입사했다. 그는 처음에 천연염료인 인디고를 대체할 합성염료를 연구하다 점차 질소 고정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에 착수했지만 합성 조건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보쉬보다 다소 늦은 1904년 빈의 사업가 마르굴리 형제의 지원을 받아 암모니아를 만드는 질소고정 실험에 착수한 하버도 역시 경제성 있는 생산에 실패하자 하버가 보쉬에게 실용화를 의뢰한 것이다.
보쉬는 산화알루미늄이 소량 들어 있는 산화철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고온, 고압에 견뎌내는 고압 합성 장치를 개발하였다. 고압에 견디려면 강철로 만든 용기가 필요했는데, 수소가 강철의 탄소와 결합하면 강철은 금방 부식되기 때문이다. 보쉬는 수소에 강한 크롬바나듐 강으로 용기를 만들어 그 바깥쪽에 고압에 강한 강철 용기를 테두리로 두른 이중 용기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메타놀을 합성하고 공기 중의 질소를 수소와 화합시켜 암모니아를 만드는 획기적인 방법인 ‘하버-보쉬 공정’이다. 오늘날에는 알루미늄, 칼슘, 칼륨, 규소, 마그네슘, 미량의 티탄, 바나듐, 지르코늄의 산화물이 들어 있는 촉매가 사용되고 있다.
대기 중에 있는 질소를 이용하여 가스반응에 의해 암모니아를 합성했다는 것은 당시 질소 화합물의 세계적인 부족을 극복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약 1억 7천5백만 톤의 질소가 농작물 생산을 위해 뿌려지며 약 40퍼센트가 하버-보쉬 공정을 통해 합성한 인조 비료로 공급되고 있다. 사람은 단백질의 약 75퍼센트를 농작물에서 직․간접적으로 얻는다. 결국 세계 인구가 섭위하는 단백질의 약 1/3이 질소 비료에서 나오는 셈이다.
이들이 생산한 질소비료가 얼마나 폭발적이었는지는 1800년대와 질소비료를 사용한 후의 미국의 옥수수 생산량은 무려 6배나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하버-보슈’ 공정을 ‘공기에서 빵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불렀다. 하버-보슈 공장의 탄생은 두 가지 의미에서 전 지구적인 규모의 새로운 산업을 창출했는데 하나는 화학 산업이고 다른 하나는 산업화된 농업의 출현이다. 한마디로 이 둘이 결합하면서 세계의 식량공급을 대폭 늘릴 수 있었다.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전염병, 대규모의 인구이동, 그밖의 여러 가지 요인이 인구 증가를 가로막았음에도 지구인들이 현재 70억 명으로 늘어났고 과거보다 더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은 하버-보슈의 공정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적으로 하버가 질소비료를 만드는 법을 성공적으로 도출하자 독일의 빌헬름 황제는 하버에게 ‘추밀원 고문관’이란 높은 작위를 수여했고 자필 서명이 담긴 초상화를 보냈다. 또한 종신재직이 가능한 국가공무원 자격으로 연봉 15,000마르크(오늘날 1억 원 정도)를 지급했고 연구소에 딸린 저택을 주었다. 하버는 1913년 BASF와 특허권 계약을 체결하여 암모니아 1kg당 1.5페니(1마르크의 100분의 1)를 받기로 했다. 이 계약은 그야말로 엄청난 부를 그에게 안겨주었는데 오파우(Oppau)에 세워진 BASF의 첫 번째 암모니아 합성공장에서 1년에 생산되는 암모니아의 양은 36,000톤으로 54,000마르크인데 9년 뒤 루드비히샤펜에 세워진 공장에서는 연간 87만5000톤을 생산하여 1,312,500마르크가 그의 특허료로 지급되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하버가 황금쟁반에 식사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을 정도다.
참고문헌 :
「인류를 먹여 살린 화학비료」, 김희준, 과학동아, 1998년 2월
「프리츠 하버」, 전성원, 인물과사상, 2011년 6월호
『과학, 그 위대한 호기심』, 서울대학교 자연대 교수 외, 궁리, 2002
『생각 1g만으로도 유쾌한 화학 이야기』, 레프 G. 블라소프외, 도솔, 2002
『과학 우리 시대의 교양』, 이필렬 외, 세종서적, 2005
『100 디스커버리』, 피터 매시니스, 생각의 날개, 2011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전성원, 인물과사상사, 2012
'화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 > 질소비료 발명 프리츠 하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사와 악당의 대명사 : 질소비료 발명, 프리츠 하버(2) (0) | 2020.09.2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