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질소비료 발명 프리츠 하버

천사와 악당의 대명사 : 질소비료 발명, 프리츠 하버(2)

Que-sais Que sais 2020. 9. 20.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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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에 가장 부합되는 연구>

 

하버-보쉬의 공정이 각 국의 관심을 끈 질소비료의 대량 생산이 가능한 것은 물론 질산을 사용하는 화학 폭발물에 대한 수요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암모니아는 화약 제조에 필수적인 질산의 원료로도 중요하다. 하버-보쉬 공정으로 만들어진 암모니아를 산화시키면 쉽게 질산을 만들 수 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만드는데 사용한 나이트로글리세린도 글리세린에 질산을 처리해서 만든 것이다.

1910년 베를린에서 새로 설립될 예정이었던 카이저빌헬름 물리화학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하버는 곧바로 승낙했고 1933년까지 20여 년 간 뛰어난 학자들을 거느리며 연구생활을 했다.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전쟁은 독일인 중의 독일인인 하버에게 커다란 영광의 기회였다.

우선 19147월 전쟁이 발발되었을 때 이미 하버와 보쉬의 암모니아 합성이 성공한 후이므로 그들은 그야말로 독일의 구세주였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은 칠레 초석을 수입해서 질산을 얻었다.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군은 해상봉쇄를 통하여 칠레초석이 독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았다. 칠레초석은 질소비료의 원료일 뿐 아니라, 화약을 만드는 데에도 쓰였으므로 전쟁시 매우 귀중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합군 측에서는 화약의 원료가 바닥난 독일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곧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독일은 전투에서 충분한 화약을 쓰면서 4년 간이나 전쟁을 지속하였다. 1918년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독일의 주요 시설이 연합군에 접수된 후 그 비밀은 풀렸다. 카이저빌헬름연구소장으로 일하던 하버가 암모니아로부터 질산을 제조하여 화약의 원료로 제공했던 것이다. 연합군은 하버가 자체적으로 화약을 만들었기 때문에 독일이 예상보다 오랫동안 버텼으므로 많은 장병들이 희생되었다고 비난했다. 한마디로 하버의 화약 제조가 없었다면 독일이 일찍 항복했고 그랬다면 장병의 희생자가 적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하버의 발명은 과학적인 면으로만 국한한다면 물리화학적인 방법의 유용성을 극대화한 과학의 승리였다. 반응의 열역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반응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그러한 반응의 최적 조건을 찾았다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보쉬를 중심으로 한 기술자들의 노력과 하버의 연구가 결합돼 상업적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은 정유, 석유화학, 천연가스 등과 같은 미래의 거대 산업에 기본적인 모델이 되었다. 과학사에서는 이들의 암모니아 합성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그들에 의해서 비로소 20세기의 과학적인 연구의 틀이 갖추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의 산업혁명기초기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과학과 기술 간의 관계에서 상당한 차이점이 보인다.

 

기술개발의 주역이 장인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전문적인 연구자들로 바뀐다.

 

단순한 아이디어의 변형이 아니라 실질적인 과학 원리의 이해와 적용, 응용 등 고도의 분화된 전문지식이 필수적이 되었다.

 

개인차원은 연구가 그룹차원의 연구로 바뀌었다.

 

대학의 연구원과는 다른 기업의 연구원이라는 연구집단이 등장했다.

 

19세기 후반부터 BASF는 대학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자들을 채용하고 대학실험실과 밀접한 개발연계시스템을 갖추었다. 세계 최대 제약회사로 알려지는 바이엘(Bayer)1880년 자체연구소를 설립하고 BASF와 같은 체제를 운용했다. 이들의 성공을 계기로 현재 수많은 기업에서 연구소를 운용하면서 대학교나 연구원들과 긴밀한 연구를 하는 것은 기본이 되었다 볼 수 있다.

 

<독가스 제조에 헌신>

철저한 애국자인 하버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인 1912년부터 카이저빌헬름협회의 물리화학및전기화학센터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40이 넘은 나이임에도 자원하여 육군 중사로 군에 복무했다. 당시 독일 육군의 고위 간부들은 독가스 개발을 강력히 추진했는데 그 당시 전쟁은 주요 전투가 보병과 기병대로 이루어졌으며 참호를 이용했기 때문에 새로운 전쟁무기가 요청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에서는 탱크가 발명되었지만 독일에서는 독가스를 개발하려고 했다.

하버는 1914년 말부터 1920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하는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 18641941)의 뒤를 이어 독가스 연구에 집중했다. 독가스, 독가스하지만 전쟁터에서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독가스를 만드는 것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독가스는 공기보다 무거워 가라앉아야 하며 지상 2미터 이상을 올라가지 않아야 한다. 또한 무색으로 쉽게 알아내지 못해야 하며 원료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했다.

하버는 염소를 원재료로 선정했다. 염소는 소금을 분해하여 만들 수 있으므로 독성이 강력하고 공기보다 무거우며 용기에 넣어 보관하거나 수송이 편리했다. 또 공기보다 2.5배나 무거워 개인호, 참호, 방공호에 투입하면 병사들에게 치명상을 줄 수 있다.

하버는 19151월 독가스를 시험적으로 성공했고 19152월 벨기에 전선에서 세계 최초로 독가스를 살포했다. 이때 제조된 염소기체는 공기 중에 50ppm만 있어도 30분에서 1시간 이내에 동물의 생명을 위협하며, 1000ppm에 이르면 짧은 시간 내에 생명을 앗아간다. 1915422일 첫 번째 독가스가 벨기에의 예페르(Ypres) 전선에서 180여톤이 살포되었는데 이날 하루 동안 15천 명의 프랑스 병사가 중독되어 5천여 명이 사망하고 6000명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보복에 나선 연합군도 포스겐으로 가스를 살포했고 독일군은 보다 치명적인 독을 갖고 있는 머스터드 가스를 전선에 투입했다. 전쟁 동안 뿌려진 125000톤의 독가스로 양측에서 97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독가스의 여파로 발생한 사상자는 거의 130여만 명에 달하는데 이는 전체 사상자의 4.6퍼센트에 달한다.

유능한 화학자였던 하버의 아내는 하버가 가스 공격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돌아오자 52일 남편에게 마지막 작별을 글을 남긴 후 하버의 권총으로 자살했다. 클라라는 남편을 독가스 개발로부터 돌아서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하버가 독가스 개발에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버의 독가스 개발이 큰 원인이었다고 설명되지만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융화될 수 없는 성격이었다는 것을 근본 요인으로 보는 견해도 많이 있다.

여하튼 독가스 개발에 성공한 하버는 1916년 중사에서 대령으로 승진하여 화학전쟁국 국장을 맡았다. 그것은 독일 육군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송성수 박사는 적었다.

독가스 개발이 그의 생애를 극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하버는 모든 새로운 무기는 처음에는 항상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므로 독가스도 폭탄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가스는 신체적 상해가 아니라 정신적 파탄을 주는 것이므로 오히려 폭탄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치명적인 화학 무기를 개발해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는 것이 인류의 고통을 줄이는 길이라고 믿었다. 사실 그는 독가스에 대한 비판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멋있고 좋은 살인 방법이 있는가? 독가스가 폭탄 파편보다 나쁜 점이 무엇인가?’

 

하버가 독가스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독가스는 독일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연합국 과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독가스도 독일군에게 살포되어 수많은 장병들이 살상된 것은 사실이므로 하버만 비난할 것이 못된다는 지적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마디로 연합군의 과학자도 하버에 못지않은 비난 받을 일을 했음은 틀림없다. 한 가지 하버와 다른 것은 하버는 과학 사상 가장 유명한 비료 공정을 개발했고 더불어 노벨상도 수상한 유명인사라는 점이다.

하버는 클라라 임머바르가 자살한 지 2년 뒤인 19171021살 연하의 살로테 나탄과 열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식을 올렸다. 살로테는 클라라와 반대의 성격을 가졌는데 둘의 결혼 생활도 원만하지는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10년 후 이혼했다.

191811월 마침내 독일이 항복하자 프리츠 하버는 전범자 명단에 올라 숨어살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1918년도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범으로 지명된 하버에게 노벨상 수여 소식이 알려지자 연합군 측에서는 노벨상위원회에 그의 선정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다. 그가 하버-보쉬 공정을 발명하여 영국과 미국 등 연합군이 칠레에서 생산되는 칠레 초석의 수입을 봉쇄하였는데도 자체적으로 화약 제조에 필수적인 질산을 자급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졌다는 것이 항의의 이유였다.

그러나 노벨상위원회는 정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결과만을 평가하여 수상 대상으로 선정한다면서 그들의 항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수상에 항의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노벨은 유언장에서 전년도에 물리학, 화학, 의학 또는 생리학 분야에서 인류에게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도록 명시했는데 하버에게 수여된 노벨 화학상은 노벨상의 정신에 가장 잘 부합된 수상 중의 하나로 설명된다.

 

<조국에서 추방>

하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위해 독가스도 만들고 독가스를 막기 위한 방독면도 만드는 등 독일을 위해 충성했다. 그는 유태인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자신이 헌신적인 독일인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했고 또 자타가 인정하는 애국적인 독일 화학자였다.

하버는 독일이 패전하자 심지어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패배했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므로 독일이 330억 달러라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알고 바닷물을 화학약품으로 처리하여 금을 추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으나 바닷물에 녹아 있는 금의 함량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하여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바닷물 속에는 너무나 작은 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과학의 순교자 즉 독일로부터 추방되는 비운의 과학자로 만든다. 1933년 히틀러가 영도하는 나치당이 집권하자 철저한 독일인인 하버에 대한 상황은 완전히 바뀐다. 하버가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유태인 추방 정책으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보른 등을 직간접적으로 추방했다. 문제는 하버였다. 하버가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그는 독일을 위해 전방위적으로 공헌한 과학자 중 과학자였고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참전용사였다. 당시 법에 따르면 참전 용사는 해고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연구소장직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었지만 자신의 연구소에 있는 유대인 학자들을 해고토록 강요했다. 하버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정부에 항의하자 당시 카이저 빌헬름 협회의 총재였으며 191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플랑크가 히틀러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히틀러를 만나서 학술 진흥에 꼭 필요한 유태인을 추방하면 외국에만 이익을 줄 뿐, 독일의 장래가 암담하다고 했다. 그때 프랑크(James Franck)와 히틀러가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히틀러 : 나는 유태인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유감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이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플랑크 :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니까 구별하면 되지 않습니까?

히틀러 : 유태인 스스로가 그러한 구별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내가 유태인들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유태인 없이도 독일의 과학 기술은 잘되어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결국 플랑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나왔다. 하버가 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을 위해서 이룬 헌신적인 공헌은 물론 그가 기독교로 개정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고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추방을 계속했다. 하버도 이런 처사에 가만히 있지 않고 1933년에 교육부 장관 앞으로 공개서한을 보내 나치당의 인종 차별 정책을 비판하고 과학강연을 빌미로 독일을 떠나 스위스로 망명했다. 그의 그 많은 재산도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물러난 뒤 2년 동안 독일 대학의 과학자 다섯 명 중 한 명이 일자리를 잃었는데 그중 80퍼센트가 유대인이었다. 그때 하버는 독일의 화학자, 독일의 군인, 독일의 애국자도 아닌 유태인 하버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도 도움이 안 되었다. 하버는 당시의 자신 처지를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에 지금처럼 유태인이었던 적은 없다.”

 

하버는 1934년 스위스 바젤의 한 호텔에서 66세의 나이로 가족, 재산, 지위와 연구소, 건강까지 잃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하버의 경력처럼 다양하면서도 극적인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부유한 유태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화학을 전공하였고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질소비료를 만드는데 성공하여 노벨화학상을 받은 것은 물론 당대의 거부 중 한 명이 되었다. 철저한 독일인으로 자부하면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독가스를 개발하여 연합군에 치명상을 주는데 주저하지 않는 등 한마디로 독일에 의한, 독일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철저한 독일인으로 자부한 하버에게 유대인이란 명목으로 추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재산 등도 압수된 것은 물론 그가 사망하자 그가 개발한 질소비료제조법마저 그가 개발한 것이 아니라고 선전되는 수모까지 당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질소비료제조법이 노벨상 수상사상 가장 노벨상 구호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현대과학이 갈수록 예리한 쌍칼날처럼 변하면서 선과 악의 구분이 불분명해 지고 있으므로 그처럼 상반된 생활을 어떻게 평해야할지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버가 독일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어 충성심이 극도로 강한 독일 유대인의 한 극단을 대표했다면 독일인이면서도 자신의 나라에 항상 의문을 품었던 아인슈타인은 유태인의 다른 극단을 대표했다. 여하튼 당대 세계 최고의 과학자 위상도 출신과 정치 앞에서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지만 과학자의 미래를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볼 때 그와 같은 과학의 순교자는 어느 곳에서도 출현될 수 있는 일이다.

1919년에 영국은 승전국으로 암모니아를 생산하고 있던 BASF사의 문서를 조사해 하버-보쉬 공정의 비밀을 알아냈고 이후 이것은 영국과 미국에 퍼져 나갔다. 한국에서는 1930년대 말 함흥에 세운 질소비료공장은 일본인들이 하버의 기술을 도입하여 세운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미국의 원조 제1호가 충주 비료 공장이었다. 당시 전쟁이 끝난 후 낙후된 한국에서 식량 생산이 가장 급선무였으므로 비료 공장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하버와는 달리 보슈는 줄곧 바스프사에서 봉직했다. 1919년 이사가 되었고 1925년부터 회장도 지냈으며 1931년 노벨화학상도 수상했다. 그는 산업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냈지만 학문적인 연구에도 게을리하지 않아 1937년 플랑크의 뒤를 이어 카이저빌헬름협회 회장직에 오르기도 했다. 하버와는 달리 말년까지 명성을 누리다가 66살인 19404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보쉬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참고문헌 :

비난으로 얼룩진 노벨상 수상, 유지영, 과학동아, 19982

남성 진화속도, 여성보다 빠른듯, 대중과학, 20103

찬양과 비난을 동시에 받은 화학자-프리츠 하버, 대중과학, 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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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으로 몰린 화학자 하버, www.scienceall.com

문명의 불을 밝힌 과학의 선구자들, 이세용, 겸지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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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과학자 이야기, 송성수, 신원문화사, 2002

과학 우리 시대의 교양, 이필렬 외, 세종서적, 2005

한권으로 보는 인물 과학사, 송성수, 북스힐, 2012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전성원, 인물과사상사, 2012

과학의 순교자, 이종호, 사과나무,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