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익릉 :
서오릉에 있는 능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익릉은 제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김씨(1661〜1680)의 능이다. 숙종과 인경왕후, 제1계비인 인현왕후, 제2계비인 인원왕후, 희빈 장씨의 묘소가 모두 서오릉에 있는데 그 시초를 열어준 인물이기도 하다.
인경왕후는 1670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사망했다. 인경은 ‘인덕을 베풀고 정의를 행하였으며 자나깨나 항상 조심하고 가다듬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경왕후는 남편인 숙종보다는 40년, 아버지인 김만기보다도 7년을 앞서 세상을 떠나 아쉬움을 남긴다. 왕비가 천연두에 걸렸기 때문에 병문안도 하지 못한 숙종은 천연두가 자신에게 전염될 것으로 염려하여 창경궁으로 집무실을 옮겼고 그 대신 영의정이 홍화문에 머물면서 양쪽 궁궐의 상황을 보고했다.
아버지 김만기는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金萬重)의 친형이며 사계 김장생의 증손이다. 이들 집안은 대제학을 7명씩이나 배출했고 김만기와 김만중 형제도 대제학을 지내고 현종과 숙종의 묘정(종묘)에 공신으로 들어간다. 인경왕후는 당대 최고 가문의 규수라고 볼 수 있다.
정자각으로 가는 참도가 특징적인데 대지의 경사가 심하므로 3단으로 참도 중간에 계단을 두었다. 정자각은 현종의 숭릉 정자각과 같이 당시 유행하던 정면, 측면이 1칸씩 늘어난 각 5칸의 익랑이 있으며 배전은 전면 1칸, 측면 2칸으로 다른 능보다 규모가 크며 서오릉에서 유일한 형태다. 맞배지붕에 방풍판이 있는 정전 좌우 양쪽으로 지붕을 떠받드는 기둥 세 개가 옆에서 약간의 사이를 두고 있다.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고 난간석만 봉분 주위에 둘렀는데 다른 왕릉과 달리 석주가 아닌 동자석 상단에 방위표시를 위해 십이간지를 글자로 새겨놓았다. 장명등과 망주석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완벽한 균형감과 정교한 표현이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된다. 망주석에는 상행, 하행하는 모습의 세호를 새겨 놓았는데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보여준다.
문인석은 숭릉(崇陵)의 것보다 작은 240〜250센티미터 정도다. 조관을 썼으며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있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어 표정이 살아 있는 모습으로 짧은 목에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턱을 홀 바로 위에 올려놓은 형상으로 미소를 띠고 있다. 무인석은 문인석보다 군인답게 근엄한 표정인데 투구에 있는 상모를 뒤로 넘겼다. 갑옷의 바탕은 솟을 고리문이며, 투구 끈은 턱 밑에 있다. 반월형의 요대(腰帶) 안에는 상서로운 구름무늬, 양손의 위아래에는 귀면이 각각 조각됐는데 무인석의 일반적인 형태다. 갑옷의 어깨 부분에도 작은 귀면을 넣었고, 소매는 활동하기 편리하게 터놓았다. 흉갑 부분은 구름으로 장식돼 있고, 칼을 잡은 손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됐다.
서오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데다 봉분이 웅장한 것은 물론 석물의 크기도 숙종의 명릉에 비해 오히려 큰 규모다. 이는 숙종이 왕릉의 제도를 간소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에 익릉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이건 정치가 안정되면 능의 규모가 줄어드는 법인데, 숙종 때부터 정조 때까지가 그런 예다.
천연두는 과거 수많은 인명을 빼앗아 간 가장 심하고 가장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바이러스 중 하나이다. 천연두가 가장 무서운 질병의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은 천연두로 사망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앓고 난 사람들의 모습이 매우 흉해졌기 때문이다. 천연두를 경미하게 앓은 사람은 피부에 얕은 흠이 생겼지만 심하게 이 병을 앓은 사람은 얼굴 전체에 흉터가 남아 일생 동안 많은 고통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얼굴에 천연두 흉터를 갖고 있었고 또 앓지 않은 사람도 언제 자신에게 병이 다가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가 종두법을 개발한 후 ‘내가 사용한 방법에 의해 천연두가 절멸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사망하였다. 그의 예언은 1977년 10월 소말리아에서 마지막 환자가 발생하고 1978년 실험실 사고로 두 명의 환자가 발생한 것을 끝으로 지구상에서 천연두라는 질병은 완전히 사라지자 1977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는 지구상에서 절멸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증명되었다.
이곳에서 종두법에 대해 설명하지 않지만 천연두는 한국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인경왕후가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것을 보아도 그렇다. 제너의 종두법은 급속도로 세계로 전파되어 1848년 네덜란드 사람에 의해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조선에는 1876년 7월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 일행을 수행한 박영선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다. 박영선은 동경에서 일본인 의사로부터 받은 종두법에 관한 책을 지석영(池錫永, 1855〜1935)에게 전해주었다. 지석영은 1879년 조선에 천연두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자 부산 제생의원에서 종두법을 습득한 후 이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석영보다 앞서 종두법을 습득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일반화되지 못했다. 그들은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로 상당수가 천주교 신자인데다 당파 싸움의 회오리 속에 몰렸기 때문이다. 예병일 박사는 해외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이들은 지석영보다 먼저 우두접종법을 받아들였으나 천주교도라는 것이 발목을 잡아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 해도 널리 펼 수 없었다고 적었다. 1790년 박제가가 처음 인두접종을 실시하고 보급했다는 기록도 전해지며 정약용은 『마과회통』에서 자신이 행한 종두법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들 선구자들의 행로가 아쉬운 것은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당파싸움 등의 여파로 빛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지만 여하튼 현재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천연두가 멸종되었다는 것은 다른 질병도 멸종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참고적으로 지석영은 조선 말기에 우리나라 의학과 발명에 큰 공헌을 한 사람 중의 한 명이지만 2003년 제정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자에서 빠졌다. 지석영이 과학기술계에 미친 영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헌정자 명단에서 제외된 것은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문을 낭독하는 등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이로 인해 2002년 ‘부산을 빛낸 인물’ 선정 작업 당시 시민단체의 문제제기로 인해 제외되기도 했다. 과학적인 업적만 본다면 ‘과학기술인명예의 전당’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민족 앞에 떳떳치 못한 행동을 보였기 때문에 헌정되지 못한 것이다. 과학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⑤ 홍릉
서오릉내의 장희빈 묘인 대빈묘를 지나 창릉 방향으로 걷다 우측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제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1692〜1757) 서씨의 홍릉이 나타난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3세에 1704년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결혼했고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자 왕비가 되었다. 영조는 왕비의 『행장기(行狀記)』에서 정성왕후가 43년 왕궁생활 동안 늘 미소 띤 얼굴로 맞아주고 윗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다고 적었다.
영조는 생전에 왕후가 먼저 사망하자 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왕후의 장지를 정하면서 장차 자신도 함께 묻히고자 했다. 그는 왕비 능의 오른쪽 정혈(正穴)에 돌을 십자로 새겨 묻도록 하고 자신의 터를 비워둔 수릉(壽陵, 왕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왕의 무덤)을 조성했다. 그런데 영조가 자신의 수릉을 정성왕후 우측에 만들어 놨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동구릉 내에 있는 원릉에 계비인 정순왕후와 함께 잠들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할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영조가 수릉으로 만든 현재의 홍릉에 함께 모시지 않고 동구릉 내 효종의 영릉터에 그를 안장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다른 일화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이용, 영조와 함께 묻히길 원해 서오릉에 있는 영조의 유택을 선택하지 않고 비워놓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어찌됐든 홍릉에서는 조선왕릉 42기중 유일하게 왕의 유택이 지금까지도 비어 있는 현장을 보면 남다른 역사가 떠오를 것이다.
홍릉의 배치는 을좌신향(乙坐辛向, 남동쪽을 등지고 북서쪽을 향한 것)으로 일반적인 능역이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북방향을 등지고 정남향을 바라보는 것)인 것에 반해 동남에서 북서를 바라보는 흔치 않은 좌향을 택하고 있다.
능침의 상설제도는 기본적으로 선대왕인 숙종의 명릉 양식을 따르면서 영조 때(1744) 제정된 『속오례』에 따르고 있다. 홍릉의 능침은 쌍릉의 형식으로 상계, 중계, 하계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능침은 난간석으로 돼 있다. 이는 자신의 남편과 계비의 능인 원릉부터 중계와 하계를 구분하지 않는 제도를 써서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중계와 하계를 구분하는 능제로 볼 수 있다. 즉 문인공간과 무인공간을 구분하는 마지막 능침이다.
3면의 곡장 안에는 우측 왕의 자리가 비어있어 평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석물의 배치는 쌍릉의 형식이다. 망주석 1쌍, 문·무인석 각 1쌍, 혼유석은 왕비의 것 1좌만 왕비능침 앞에 있으며, 장명등이 가운데 1좌, 석마·석양· 석호가 각각 2쌍씩 배치돼 있다.
장명등은 사각 지붕이며, 명릉의 그것과 비슷하나 좀 더 변화를 주었고 망주석에는 꼬리가 완연한 세호가 있다. 좌측 세호는 하향, 우측은 상향이다. 난간석주에 방위 표시를 한 십이지가 문자로 새겨져 있다. 문⋅무인석은 명릉처럼 실물대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이마에 투구갓 선이 둥글게 올라가 있어 대조를 보인다. 무인석은 투구와 등에 장식이 많이 돼 있고 뒷면에는 문양이 촘촘히 넣어져 있으며 목 가리개를 위로 올리고 있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가슴 부분은 구름 형태의 판상(板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자각 왼쪽에 예감, 오른쪽 뒤편에 산신석이 있다. 비각에는 영조가 친히 내린 왕후의 시호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단목장화정성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端穆章和貞聖王后)’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렇게 존호가 길어진 것은 정성왕후가 43년의 긴 궁궐 생활을 하면서, 무수리 출신인 시어머니 숙빈 최씨로부터 폐비 희빈 장씨,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계비 인현왕후와 인원왕후 등 왕실 어른을 잘 모시고 풍파에 휩쓸리지 않으며 왕실 살림을 잘해냈다는 행장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홍살문과 금천교도 남아있으며 제례시 쓰던 어정(우물)의 흔적도 있다.
참고문헌 :
「풍수지리는 위선사」, 이종호, 내일신문, 2001.09.17.
「[王을 만나다·18]서오릉-홍릉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이창균, 경인일보, 2010.01.28
「[王을 만나다·19]서오릉-익릉 (숙종의 제1왕비 인경왕후)」, 염상균, 경인일보, 2010.02.04
「[王을 만나다·20]서오릉-창릉(8대 예종·계비 안순왕후)」, 김두규, 경인일보, 2010.02.11
「王權의 무게가 너무 컸을까 13개월 통치, 19세 요절」, 이창환, 주간동아, 2010.05.31.
「꽃다운 19살 왕비 ‘마마’의 습격에 스러지다.」, 이창환, 주간동아, 2010.11.01
『의학사의 숨은 이야기』, 예병일, 한울, 1999
『신토불이 우리문화유산』, 이종호, 컬쳐라인, 2001
『명예의 전당에 오른 한국의 과학자들』, 박택규⋅이종호, 책바치, 2004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 답사기(조선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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