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 해부>
이러한 내용을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다. 2003년 출시된 「대장금」으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존여비의 봉건적 체제하에서 집념과 의지로 궁중최고의 요리사가 되고, 우여곡절 끝에 조선 최고의 의녀가 되어 내의원의 수많은 남자들을 물리치고 조선의 유일한 임금 주치의가 되어 당상관 직에 해당하는 대장금의 칭호를 받았다. 왕과 왕비, 후궁과 권신 중심의 권력쟁탈과 암투를 기본으로 엮는, 기존 궁중사극에서 벗어나 미천한 신분의 주인공 장금을 중심으로 궁중 안의 하층민인 무수리, 나인, 상궁, 내시, 금군병사, 정원서리, 내의원 사령 및 의녀들의 애환과 갈등을 보여준다. 또한, 궁중요리를 중심으로 그 종류와 조리방법을 상세히 소개하고 아울러 보양식을 포함한 우리고유의 전통음식의 조리 과정을 극중에 많이 보여준다. 세계에서 유일한 제도였던 조선조 의녀제도의 특성과 운용, 의녀와 의원의 관계, 역할 등도 상세하게 소개된다.’
「대장금」이 워낙 한국인의 이목을 크게 끌었지만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의 시선은 예사롭지 않다. 한마디로 TV에 나오는 이야기가 사실이냐이다. 『중종실록』 중종 39년(1544) 10월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내의원 제조 즉 궁중 의원에서 둘째로 높은 관원이 문안하니 왕이 ’내 증세는 여의(女醫)가 안다‘고 말했다. 여의 장금은 ’지난 밤에 약을 달여 드렸더니 두 번 드시고 자정 무렵인 삼경에 잠이 드셨습니다. 소변은 잠깐 보셨지만 대변은 보시지 못해 오늘 아침 처음으로 관장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왕이 직접 여의를 거론하는데 이글의 내역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장금이 왕의 주치의와 다름없다. 이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으로 즉 「대장금」에 방영되는 드라마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부합하느냐이다.
『중종실록』의 내용 즉 ‘의녀’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중종이 장금을 믿고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는 뜻이다. 이는 장금이 보통의 '의녀'가 아니라 임금의 주치의라는 뜻과도 다름없다. 한마디로 천민 신분의 의녀로서 수많은 남자 의관(醫官)을 제치고 왕의 주치의가 되었다는 것인데 당시 남성 위주의 엄격한 관료주의 아래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장금은 의녀로서 매우 뛰어난 활동을 보여 어의녀(御醫女)까지 올라 대장금으로 불리어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서울대 규장각 김호 박사는 단호하다. 장금을 왕의 주치의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왕이 병들면 의녀들이 돌아가며 수발을 드는 것은 사실이므로 마침 장금이 중종의 수발을 들었다는 설명이다. 좀 헷갈리지만 왕이 자기 병세를 여의에게 물어보라 한 것은 장금이 주치의라는 뜻이 아니라 왕으로서 구질구질한 증세를 직접 말하기가 어려우므로 아랫사람에게 대답을 미룬 것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지적은 '여의'로 중종이 장금을 여의라고 말한 것은 사실인데 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실록에는 '의녀'의 글자 순서를 바꿔 '여의'로 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중종 10년(1515) 3월 21일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조정의 신하들은 대장금과 의관 하종해를 처벌할 것을 상신했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의녀인 장금(長今)의 죄는 하종해보다도 심합니다. 산후에 왕·왕후의 의복인 의대(衣襨)를 개어(改御)하실 때에 계청하여 중지하였으면 어찌 대고에 이르렀겠습니까? 형조가 조율(照律)할 때에 정률(正律)을 적용하지 않고 또 명하여 장형을 속바치게 하니 매우 미편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 17년(1522)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대비전의 증세가 호전되자, 임금이 제조 김전(金詮) 장순손(張順孫)과 승지 조순(趙舜)에게는 말안장 20부, 활 1정, 전죽 1부, 의원 하종해에게는 말 한 필과 쌀 콩 각 10석, 김순몽에게는 말 1필, 의녀 신비(信非)와 장금에게는 각각 쌀 콩 각 10석씩을 주었다. 내관ㆍ 반감ㆍ별감에게도 모두 하사가 있었다.’
중종19년(1524)에도 다음과 같은 글이 등장한다.
‘의관이 급료로 받는 급료의 전부를 주는 전체아(全遞兒)와 반을 주는 반체아(半遞兒)가 있는데 전체아에 빈 자리가 있어도 그것을 받을 자를 아뢰지 않으니, 아래에서 아뢰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내전에 출입하며 간병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고 말한다.
의녀는 원래 전체 인원이 돌아가면서 근무하고 근무기간 동안 급료를 받는 체아직(遞兒職)이었다. 중종은 왕과 왕비, 대비전을 드나들며 간병하는 대장금에게 전체아, 즉 ‘상근하고, 급료의 전부를 지급받는 내의녀’의 직분을 하사한 것이다. 한마디로 장금의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호 박사는 여기에서 다소 헷갈리는 의문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장금에게 대궐을 출입할 권리를 주었다는 것인데 장금은 중종10년에 이미 중전의 산후조리를 도울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9년이나 지나서야 대궐을 출입할 수 있게 됐다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는 것이다.
이는 장금이 여러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인데 김호 박사는 당시에 장금은 흔했던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실록에 나온 장금이 모두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대장금의 대(大)자도 이름이 같은 경우 헷갈리지 않기 위해 덩치가 큰 사람에게 흔히 붙이던 말이라고 설명했다.
여하튼 실록에 보면 그로부터 중종 27년(1532) 중종은 몇 달에 걸쳐 심한 병을 앓았고 병석에서 일어나자 다음해 그간의 치료에 공을 세운 의관 하종해, 박세거 등과 의녀 대장금, 계금에게 쌀과 콩, 면포를 상으로 내린다.
중종이 사망하는 중종 39년(1544)에 장금이 중종의 치료에 직접 참여했음은 실록에 적혀있다.
‘의녀 장금이 나와 말했다. ‘어제 저녁에 상(중종)께서 삼경(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에 잠 드셨고, 오경에 또 잠깐 잠이 드셨습니다. 또 소변은 잠시 통했지만 대변이 불통한 지가 이미 3일이 됐습니다.라고 했다.’
또한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아침에 의녀 장금이 내전으로부터 나와 말하기를 ‘하기가 비로소 통하여 매우 기분이 좋다고 하셨습니다’고 했다. 임금이 약방에 전교했다. ‘지금 제조와, 의원, 의녀들이 모두 왕래하고 있는데 이제 의원과 제조는 해산하여 돌아가라.’
중종이 의녀 장금만을 남기고 제조와 남자의원들을 모두 내보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탁월한 활동에 중종은 의녀 대장금에게 쌀과 콩을 도합 5석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실록의 내용을 보면 장금이 숙종 때에 의녀로 활동했고 대장금으로 불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장금이라하여 드라마처럼 왕의 주치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내용이 당대의 의료진에게 고깝게 보일리 만무다. 특히 내의원 총책임자인 제조 홍언필 등이 불만을 터뜨렸다.
‘의녀의 진맥이 어찌 의원의 정밀한 진찰만 하겠습니까. 천박한 의녀의 식견보다는 의원들의 진맥을 받으소서.’
한마디로 당대에 장금이 주치의였다는 것은 천만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대장금은 중종의 어의녀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중종 39년(1544) 중종의 병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신들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여러 차례 의원을 들여보냈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
11월 15일, 드디어 내전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고 중종은 사망했다. 중종의 사망과 동시에 대장금에 관한 기록도 사라졌다. 왕이 죽었으니 왕을 치료하던 그녀 역시 법에 따라 죄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특별한 실수를 한 것은 아니므로 큰 처벌은 받지 않고 의녀 직분은 그대로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오랫동안 왕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것이 문제가 되어 더 이상 내의원에 머물러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풍을 일으킨 드라마 「대장금」에서 실록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이 많다고 지적하지만 「대장금」이 작가의 머릿속 산물만은 아니다. 한의학. 궁중 음식 등에 관해서는 전문가들로 자문단을 구성해 많은 의견을 들었고, 궁녀들의 생활을 다룬 『궁중풍속연구』, 궁중 음식을 다룬 『한국음식대관』 등 관련 서적도 참고했다고 한다.
특히 김영현 작가는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궁녀나 의녀에 관한 자료가 워낙 적다 보니 장금이란 인물을 탄생시키기 위해 상상력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금을 임금의 주치의로 해석하는 것이 틀렸다고는 보지 않는다. 드라마는 역사책이 아닌 만큼 그저 드라마로 봐주면 좋겠다.’
여하튼 「대장금」은 중국, 베트남을 비롯해 일본, 중동, 아프리카까지 거의 전 세계인에게 방영되면서 드라마로 '한류'를 이끈 최초 드라마가 됐다. 한국인으로 조선시대 인물 중 가장 유명세를 탄 여인이라 볼 수 있다.
끄새가 방문했던 중국의 오지에서도 「대장금」이라는 간판이 여러 곳에 있었는데 대장금이라고 이름 붙은 식당은 규모가 작은 곳이라도 많은 손님들로 붐볐다. 또 이 드라마를 통해 대장금 역을 맡은 배우 이영애가 한류스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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