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철종과 강화 처녀 양순이와의 러브스토리인데 이원범이 강화에서 왕위에 오르기 직전 마을의 ‘양순’이란 처녀와 혼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영화 감독들이 그대로 둘 리 만무하다. 1963년에 출시된 「강화도령」, 1967년에 등장한 「임금님의 첫사랑」이 바로 이들을 주인공으로 다루었다. 「강화도령」은 당대 최고의 배우인 최은희, 신영균을 주연으로 캐스팅하여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강화도에 사는 더벅머리 총각 원범(신영균)은 산속의 칡뿌리를 캐어 먹고 약수물을 떠 마시며 살아가는 평민같은 인물이지만 실은 왕가의 혈통이다. 헌종이 사망하자 동네에서 홀대 받던 이 청년은 하루아침에 철종으로 등극한다. 대왕대비와 제조상궁으로부터 궁중의 법도를 배워나가지만, 철종은 강화도에서의 삶과 그곳의 연인 복녀(최은희)를 잊지 못한다. 복녀를 궁으로 데려온 그는 억지로 혼인한 왕비를 뒷전으로 하고 복녀와 함께 궁 밖의 주막에서 흥겹게 시간을 보낸다. 이를 위기로 느낀 대왕대비는 복녀를 강화도로 추방하고, 이에 낙심한 철종은 아픈 몸에도 매일 같이 술을 마시며 몸을 혹사한다. 철종의 병이 깊어지자 왕비는 대왕대비에게 다시 복녀를 불러들일 것을 청한다.’
영화이므로 역사적인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는다하지만 실존했던 철종의 사랑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인들은 왕이 되기 이전에 ‘강화도령’인 철종이 복녀와의 근대적 연애의 실패에 슬퍼하는데 이런 장면은 조선시대를 1960년대라는 필터로 걸러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설명한다.
여하튼 영화에서 등장하는 복녀는 양순이란 이름으로 실존한 것은 사실이다.
야사에는 원범이 강화에서 왕위에 오르기 직전 마을의 ‘양순’이란 처녀와 혼약을 맺었다. 그러나 원범이 철종이 되어 궁궐로 들어갔지만 천민은 궁궐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도 철종이 그녀를 그리워하자 궁에서 대안을 세운다. 사람을 보내 양순을 죽인 것이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았지만 강화도령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화와는 달리 야사에서 양순을 독살했다는 이야기는 많이 나도는데 실제로 독살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양순이 일찍 죽었다는 건 공통적으로 인정된다. 왕이 되었음에도 시골처녀를 궁으로 불러들일 수 없었던 것을 보면 강화도령의 생활이 만만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 상설제로 만든 예릉>
예릉은 조선왕조의 상설제도를 따른 마지막 능이다. 철종 다음의 고종과 순종은 황제였으므로 왕릉의 법식이 아니라 황제 능의 법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예릉의 석물은 1542년 조성된 중종의 구릉지에서 노출된 석물을 가져다 썼기 때문에 예릉 조성시기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철인왕후릉 석상은 1878년 조성 당시 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두 석상은 재질과 문양 표현방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능은 쌍릉으로 자좌오향(정북에서 정남향)이며 곡장이 둘려진 봉분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둘렀다. 두 봉분 모두 난간석주에 동그란 원을 그려넣고 그 안에 문자를 새겨넣어 방위를 표시하고 있다. 이렇게 쌍릉으로 조성된 능의 경우 먼저 승하하여 단릉 형식으로 조성되며 훗날 봉분이 합하여 쌍릉형식으로 조성된다.
일반적으로 능은 3단으로 설계되었는데 예릉은 동구릉의 경릉과 마찬가지로 2단으로 줄여서 문인석, 무인석이 한 단에 있다. 그러나 예릉의 참도는 일반 왕의 예와는 달리 이도가 아니라 삼도다. 대한제국시절 고종황제가 시조인 태조를 비롯하여 장조, 정조, 순조, 문조를 황제로 추존했고 이어 순종 때 진종, 헌종, 철종을 추존했다. 이에 예릉의 철종 능은 1908년 황제 능의 예에 따라 삼도로 다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봉분 주변으로 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호, 석마 등의 석물이 배치되었다. 팔각지붕인 장명등이 두 석상 앞에 있기는 하지만 멀리 앞으로 나와 있어 특이하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머리가 지나치게 큰 가분수다. 몸집도 비대한 것에 비해 키는 작고 수염과 눈썹의 표현이 다소 과장되었지만 세밀한 조각이 눈에 띈다. 전반적으로 석물 제작이 수준 이하로 조선왕조 말기의 느슨한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철종의 예릉은 매우 씁쓸한 면도 보여준다. 막강한 조대비가 예릉을 조성하면서 310여 년 전 제11대 중종의 정릉(靖陵) 초장지에 매몰됐다가 땅 밖으로 나온 석물을 재사용한 것이다. 조상의 고석물을 재사용한 대표적 사례인데 한마디로 힘없고 자식도 없는 철종에 대한 홀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대의 석물을 재사용하는 것은 조선시대에만 볼 수 있었던 특이한 사례로, 현종의 숭릉과 순조의 인릉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래된 선대의 석물을 그대로 사용한 예는 이곳 예릉이 대표적이다. 물론 그 덕분에 철종의 예릉 석물은 거창하고 웅장한 조선 중기 석물 조각의 특징을 나타낸다. 인근 희릉(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능)의 석물과 같은 시기에 조영되었기 때문에 문무석인의 형태가 비슷하다.
능 앞에 3단을 2단으로 줄여 장명등, 문․무인석이 한 단에 마련되어 있다. 상계의 맨 앞 양 옆에 망주석이 설치되어 있다. 높이는 각각 2,915mm, 지름 1,001mm다. 망주석의 머리 부분은 연봉형이며 운두에는 여의두문을 새겼고 연판문도 함께 표현했으며 상부에 붙은 세호는 우상좌하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각 부재를 재활용하여 조성연대가 다른데 원수-주신에 이르는 부재는 철종릉 조성 당시인 1864년에 제작한 것인 반면 대석과 지대석은 중종릉 구릉지에 노출된 것을 사용했으므로 시각적으로도 상부와 하부의 석재색이 완연히 다르다.
장명등은 팔각형식에 지대석을 제외한 전체높이는 226cm정도다. 원수가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으나 장명등의 전체적인 형태나 문양이 융릉과 건릉의 장명등과 유사하여 연봉-연화형의 2단 원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무인석은 선명한 눈꺼풀, 눈동자, 입체적인 입술선이 섬세하게 표현되는 등 다른 능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색적인 얼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조각을 가늘게 해 평면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눈동자 등의 세부 표현은 섬세한 편으로 18세기 이후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문석인의 도상은 복두를 쓰고 공복을 입은 도상이다. 그런데 예릉 문무석인은 중종 정릉 시대의 것이므로 문석인의 규모는 좌우너비 1,190mm, 앞뒤 길이 1,189mm, 대석제외 높이 3,263mm(동쪽)로 매우 규모가 크다. 16세기는 조선 왕릉 석인 중 가장 거대하게 만든 시기다. 그러므로 예릉 문석인은 16세기를 대표하는 수준 높은 작품이지만 얼굴이 커서 약 3 : 1의 신체 비례로 자연스럽지 못하고 얼굴이 가슴쪽으로 많이 파묻혀 목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각선이 굵고 명확하며 돌출감이 높아 활기차다.
무석인의 도상은 갑주를 갖추고 검은 수직으로 세우고 있는 형상이다. 특히 여의두문의 검두와 검집의 방형덮개장식은 16세기 중에서도 구 희릉, 예릉, 효릉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무석인의 규모는 좌우너비 1,269mm, 앞뒤길이 1,185mm, 대석제외 높이 3,385mm(동측)로 문석인보다 규모가 크다. 약 3 : 1의 신체비례임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석인의 거대하고 위협적인 장중함을 제대로 구현했다. 눈은 크게 부릅뜨고 있어 더욱 위협적이며 수염은 ‘八’자형 덩어리 위에 짙게 선각하여 위엄이 서려있다. 예릉 무석인은 정릉의 옛 석물을 마정조탁(磨正彫琢)하였지만 작품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고 조각수준이 우수한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예릉 표석은 정방형 농대석에 비신을 세우고 한옥 지붕 모양을 보딴 가첨석을 얹은 전형적인 능표석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체크기는 327cm, 가첨석은 67cm, 비신은 184cm, 농대석은 75cm다. 지붕의 추녀마루가 수직으로 솟아있고 합각의 박공이 상징적으로 새겨져 있다.
예릉의 정자각은 정전 3칸에 구체적인 간잡이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배위청은 2칸인 5칸 정자각이다. 정자각 상부의 가구 구조는 5량가, 배위청은 3량가다. 지붕은 정전과 배위청 모두 맞배에 겹처마로 박공면에는 풍판을 설치했다. 포작은 정전이 출목 2익공, 배위청이 출목이 없는 2익공이다. 지붕 용마루는 적새를 쌓고 전후면에 회를 발라 마감하는 양상도회했으며 좌우에 취두를 설치했다. 잡상은 정전 내림마루에만 각 3개씩을 설치했다.
정전 내외부 바닥과 배위청 및 월대의 바닥에는 모두 방전(方甎)을 깔아 포장했다. 월대의 경우 처마 바깥쪽 부분은 비가 흘러내리기 쉽게 바깥쪽으로 약간의 경사를 두었다. 월대의 좌우에는 향로계, 어로계, 석계의 3개소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좌측 계단 중 앞쪽에 있는 향로계의 소맷돌은 지대석을 형상화한 부분에 아무것도 조각하지 않고 면석 아랫부분에 안상을 두었다. 구름문양은 나비형상처럼 퍼지는 모습으로 조각하고 고석은 삼태극을 조각하여 장식했다.
정전 내외부와 배위청에는 모두 단청을 하고 정전의 좌우면과 뒤쪽의 벽은 중방까지 벽돌을 쌓아 화방벽으로 마감하고 벽면은 육색칠이다. 정자각의 후면 어칸에 설치된 신문과 정면 3칸에 설치된 세살청판사분합문에는 양록칠이 되어 있다. 정전 및 배위청의 기둥하부의 주근도배 흔적에 따라 분칠 바탕에 청색띠칠한 흔적이 남아있다.
예감은 덮개를 고정하기 위해 북측면석에 2개, 남측면석에 1개의 구멍을 내는데 예릉의 예감에는 남측면석의 구멍만 확인된다. 산릉을 지키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상석인 산신석은 예감과 대칭되는 위치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예릉의 산신석은 예감 바로 뒤에 자리하고 있다. 산신석은 장방형으로 크기는 1,212 x 879mm로 모서리는 사선으로 갈아 마무리했다.
예릉의 홍살문은 능침 및 정자각의 축에 맞추어 건립되었다. 현재 홍살문의 위치는 정자각 월대로부터 약 440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홍살문의 구조는 두 개의 기둥을 4,821mm간격으로 배치하고 그 위에 높이 5,548mm 정도 되는 기둥을 세웠다. 방형주좌에 8각 초석을 사용했는데 주좌부분은 땅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초석에 구멍을 내 기둥을 세웠으며 비가 오면 초석과 기둥 틈사이로 스며든 물을 배수하기 위하여 초석의 하단부에 구멍을 대었다. 기둥 상부에는 두 개의 횡목을 관통하여 걸고 도리 사이에는 12개의 살을 등간격으로 세우고 중앙에 삼태극 문양을 두었다. 홍살문 옆에 놓인 판위는 바깥쪽으로만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사방틀을 만들고 안쪽에 박석을 깔았다.
판위의 크기는 길이 2,154mm, 폭 2,134mm로 거의 정방형이다.
예릉의 향어로는 다른 능과 달리 3중로로 되어 있는데 1908년 철종을 장황제로 추존한 후 개수했기 때문이다. 예릉 외에 3중로도 구성된 향어로는 고종의 홍릉, 순종의 유릉이 있다. 향어로의 3중로는 대한제국 선포이후 조선의 왕이 황제, 세자가 황태자로 격상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향어로의 시설은 가장자리에 장대석을 놓고 그 안쪽으로 박석을 깔아 마감했는데 향어로의 높이는 어로와 서로보다 약간 높게 조성되었다.
예릉 좌측에는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의 묘소인 효창원과 영조의 아들 장조(사도세자)의 첫째아들 의소세손의 묘소인 의령원이 있다. 효창원은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 안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44년 이곳으로 이장되었으며 의령원은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었으나 1949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비문의 글씨는 영조의 어필이다.
참고문헌 :
「[王을 만나다·13]서삼릉-예릉(25대 철종·철인왕후)」, 염상균, 경인일보, 2009.12.10.
「그저 놀 수밖에 없었던 ‘강화도령’ 백성만 삼정 문란에 신음」, 이창환, 주간동아, 2011.02.28
「강화도령 철종, 어진 임금을 꿈꿨다」, 배한철, 매일경제, 2016.05.13.
「강화도령 철종 이원범의 이런저런 이야기」, 무님, 무님의 역사이야기, 2020.10.27.
「철인왕후」, 나무위키
http://www.dapsa.kr/blog/?p=5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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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 조선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IX』,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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