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범을 조선왕실의 적격자로 둔갑시키기 위한 안동 김씨들의 노력은 집요했다. 강화도령인 철종을 봉영하는 행렬은 문무백관과 왕실, 군사를 포함해 500여 명에 달했다. 철종은 강화도 갑곶나루에서 출발해 경기 김포, 서울 양천을 거쳐 도성에 도착했고 헌종이 세상을 뜬 지 4일 후인 6월 9일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철종이 강화도에서 도성까지 120리(47㎞)를 행차할 때 길목마다 백성이 몰려 장관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19세기에 제작된 「강화도 행렬도」는 나루터에서부터 강화읍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봉영 행렬을 묘사하고 있다.
지형에 따라 구불구불 길게 늘어선 행렬과 강화도의 전경을 12곡 병풍에 담았다. 위엄있고 요란스러운 행렬을 화면 중심에 배치하면서 강화산성과 여러 건물, 구경하는 주민들의 모습 , 바닷가의 풍경 등을 섬세하게 그려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이 매우 작게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농민들, 어부들, 장사꾼들과 관료들, 양반사대부들, 승려들 그리고 노인과 아낙네들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 인물들이 모습이 비교적 생동력 있게 나타나 있다. 현재 평양 소재 조선미술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북한 국보 제73호다.
철종이 무사히 왕으로 등극하자 순원왕후는 철종 집안과 관련한 기록을 모조리 파기하라고 명한다. 철종 집안이 역모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으로 철종이 왕이 되기 전 행적과 그의 집안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순원왕후도 실록을 좌지우지할 수 없으므로 은언군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실제로 강화도령은 즉위 전 대부분 서울에서 지냈으며 강화에 거주한 것은 1844년부터 5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시골뜨기`, 공부를 하지 못한 일자무식쟁이란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됐다. 실제로 철종이 강화에서 농민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때 먹었던 막걸리(모주)를 너무 그리워해,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친정에 부탁해 구해 올렸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다.
사실 19살에 왕이 되기 전까지 강화에서 산 것은 단 5년밖에 되지 않으므로 '강화도령'이라 하기엔 억지스러운 면도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원범은 4세에 천자문을 이미 배웠으며 즉위 이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근년에 『통감』 2권과 『소학』을 읽었다’고 철종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 바 있다. 즉위 시점에 적어도 문맹자는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천자문』, 『통감』, 『소학』 등은 초급 교육에 사용되는 교재들임을 볼 때 19살 기준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아버지의 사망, 강화도로 유배되는 등의 사정으로 더 이상 공부하지 못하였고 그나마 어렸을 때 배웠던 것도 많이 잊어버려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고 한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로서는 확실히 학업이 떨어지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철종 어필이 전하는데 이 작품을 보면 실제로는 빼어난 예술적 면모를 갖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두툼한 필획으로 느리게 썼는데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선 왕실의 품격을 전해주는 동시에 조선 후기 글씨의 경향을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야말로 시골뜨기로 군주로서 자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바탕으로 백성의 궁핍한 삶을 걱정하며 삼정(三政)의 문란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3년 동안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마친 철종은 안동 김씨를 견제하고 왕권 확보를 보였다.
철종은 우선적으로 노론에 의해 희생된 증조부 사도세자의 존호를 왕으로 격상하자고 제안했다. 철종 13년(1862)에는 철종이 직접 제안해 삼정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기구인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했다.
삼정의 폐단이란 19세기 조선 왕조에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면서 매관매직으로 수령직에 오른 탐관오리들이 조세 제도의 두 가지인 전정, 군정과 환곡을 악용하면서 일어난 폐단을 가리킨다. 환곡(還穀)은 조세 제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국가가 운영하는 제도였던 데다가 환곡의 부정부패도 전정, 군정의 부정부패와 양상이 비슷했기 때문에 그 당대부터 '삼정'의 문란이라고 묶어서 부른다.
여하튼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삼정이 백성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자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난 요인이다. 그런데 삼정이정청도 사실은 고양이가 눈감고 야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철종이 삼정이정청을 직접 제안했다고 하는데 가장 큰 해결책은 환곡의 폐단이 가장 심하므로 우선 환곡을 폐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정부의 재정에 직격탄이 된다. 국가에 들어오는 세입이 줄어든다는 뜻인데 이를 전정으로 보충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환곡을 전정으로 대체하자는 것인데 실효성은 둘째로 치고 삼정이정청을 운용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세도정치를 이끄는 당사자들이므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모양새였다.
3대에 걸쳐 견고해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철종 단독으로 극복할 수 없었다. 사도세자 존호 격상은 노론의 대표적인 세력인 안동 김씨의 반대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며 삼정이정청 역시 안동 김씨 등 집권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3개월 만에 폐지됐고 삼정문란이 더욱 심해지자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이어서 삼남지방 여러 곳에서 민란이서 일어났다.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안동김씨 세력에 의해 족족 무산되자 그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절감한 철종은 재위 후반기 국정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실록에는 그가 임금과 신하가 학문, 국정을 논하는 경연을 자주 철폐했다고 적혀 있다.
그는 1863년 33세 나이에 이질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철인왕후 김씨 등 부인 8명을 뒀으며 5남1녀의 자식을 가졌지만 모두 어린 시절 죽어 후사가 없었다.
철종 12년(1861) 도화서에서 그린 보물 1492호 `철종 어진`은 군복을 입은 유일한 조선 왕의 초상화다. 6·25전쟁 당시 화재로 인해 3분의 1가량이 불에 타 소실됐다.
‘이마가 각지고 콧마루가 우뚝하며 두 광대뼈에는 귀밑털이 덮여 있다. 귀의 가장자리는 넓고 둥글었으며 입술은 두꺼웠고 손은 컸다.’
정원용의 『경산일록』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어진인데도 눈을 사팔뜨기로 그린 것이 이채롭다. 그가 세도정치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왕으로 결국 고종, 순종으로 이어져 조선이 멸망하는 빌미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자질 자체를 무작정 폄하시킬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강화도령 이야기>
강화도령은 강화도에서 외가인 염보길의 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서울에서 정원용이 가마와 많은 호위 군사를 거느리고 강화도에 나타나자 강화도령은 자기를 잡으러 온 줄 알고 외가 집 다락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강화도령은 강화도에 살 때도 늘 감시 대상이었는데 감시자인 권시집의 아들과 숨바꼭질을 하다가 강화도령이 돌팔매로 권시집의 아들 이마를 깬 일이 있어 권시집으로부터 무척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임금이 되기 위해 강화도를 떠나면서도 권시집이 가마 뒤에 따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수십 번 말했다고 한다.
왕이 된 철종은 자신이 어릴 때 살았던 현 종로구 익선동에 아버지 전계군의 사당을 크게 짓고 누동궁이라 이름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형인 영평군을 살도록 하였다. 강화도령을 모시러 왔을 때 강화도령은 다락에 숨고 형인 영평군은 놀라 도망가다가 마루에서 떨어져 뒹구는 바람에 팔이 부러졌는데, 팔이 굽었다는 뜻의 ‘곰배대감’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철종이 왕이 된 후 강화도에 있던 그의 집은 왕의 잠저로 '용흥궁(龍興宮,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본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철종이 즉위한 후 강화 유수 정기세가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기와집으로 바꾸었다. 집을 지어 확장했고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낭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이 구한말 서울지역 양반가 저택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솟을 대문과 양쪽으로 외전이라고 불리는 문간채가 있는데 내전이라 불리는 안채는 ‘ㄱ’자형 건물로 각 앞면 3칸씩으로 가운데 2칸짜리 넓은 대청마루가 있다. 낙선재와는 달리 경북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폐쇄적인 ‘ㅁ’자형 구조대신 개방적인 ‘ㄱ’자형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서울도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주택의 구조다.
남쪽 편에는 앞면 5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는데 사랑채에는 작은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 양반가 저택에 비해서는 소박한 규모의 사랑채다. 일반 민간주택에 비해서 광이 많은 편인데 사랑채 왼편에는 안채에서 외부로 출입하는 출입문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인데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알려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의 건물에 철종이 거주한 적이 없으므로 전시용 모델하우스가 맞다. 이 집이 살림집이 아니라는 것은 집의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안채가 먼저 나오고 뒤에 사랑채가 보인다. 그런데 조선의 기본적인 집 구조는 사랑채를 거쳐 안채로 들어가는 것이 정상이다. 한옥의 경우 외부인들이 먼저 안채로 들어가도록 하지 않는다.
강화도 시절 때의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프랑스의 토마스 신부 즉 최양업 신부가 프랑스 신부인 르그레주아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철종이 친척 집에서 종 노릇도 했고 주인에게 채찍으로 맞기도 했다고 적었다.
‘현재 조선의 임금님은 사냥꾼으로 불렸고, 자기 친척 집의 종 노릇을 하였습니다. 장날이 되면 가장 값싼 일꾼 노릇을 하였고, 인정머리가 털끝만큼도 없는 주인의 채찍을 거의 매일 맞았습니다.
전 임금님이 승하함(헌종)에 따라 군인들 한 패거리가 강화도에 몰려가서 그를 현재 임금님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즉 조선 왕조의 창업 이래 5백 년 역사상 왕가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족의 공개된 수치와 치욕을 정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황제의 권위로 그러한 불명예를 척결하고 조선 왕에게 영예를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는 사신을 중국 황제에게 보낸 것입니다.‘
물론 최양업 신부의 글을 그대로 신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당시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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