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19번지에 있는 온릉(溫陵, 사적 210호)은 제11대 중종의 아홉 부인 가운데 첫 번째 부인 즉 원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1487〜1557) 신씨의 능이다. 미공개 왕릉인데다 다소 외딴 지역에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39번 국도와 인접하며 교외선 온릉역과 장흥역 사이에 있어 찾아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문화재청 조선왕릉서부지구관리소(서오릉에 위치)에서 사전 허가를 받고 방문해야 한다.
단경왕후는 단종비 정순왕후와 함께 조선의 왕비 중 가장 슬픈 여인으로 꼽히는데 성희안, 박원종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반정 주모자 박원종은 연산의 신임이 두터워 도부승지, 좌부승지, 경기관찰사 등을 거치며 국가의 재정을 주로 맡았다. 그러나 그는 왕 서열 1위였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부인(연산에게 큰어머니)인 자신의 누이를 연산군이 궁으로 불러들여 많은 배려를 하는 과정에서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들리자 연산군과 사이가 멀어지고 결국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단경왕후가 폐출되는 연유는 매우 복잡하다. 단경왕후는 12세 때 성종의 차남인 진성대군(중종)과 가례를 올렸다. 그런데 진성대군의 형인 연산군이 반정으로 폐위되자 19세 나이에 왕으로 옹립되었으므로 이때 자동적으로 왕비가 된다.
그러나 왕비의 부친 익창부원군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중종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참살된 것이 문제였다. 반정이 일어나기 전 우의정 강귀손은 반정 계획에 동조한 후 좌의정이었던 친정아버지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중에 누가 더 가까우냐’고 질문하자 신수근은 ‘매부 연산군을 폐하고 사위인 진성대군을 세우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 뒤에 박원종이 신수근과 장기를 두면서 궁을 바꾸어 폐립(廢立)의 뜻을 보이니 신수근이 장기판을 밀치며 ‘내 머리를 베라’고 반발했다. 박원종은 신수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장사로 알려진 신윤무를 보내어 수각교에서 살해했다. 결국 신수근은 누이와 딸 중 누이를 골랐는데 이것이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연산군이 폐위되는 당일로 이 당시 개성유수 신수겸, 형조판서 신수영도 피살된다.
중종이 왕으로 되는 날 일화가 있다. 연산군이 폐위되자 곧바로 진성대군의 집을 군사들이 둘러쌌다. 누군가가 진성대군을 해할지 모르기 때문에 호위차 보낸 것인데 진성대군은 그런 내용을 모르므로 자결하려고 하자 신씨가 말했다.
“군사의 말머리가 궁쪽으로 향해 있으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리까. 그러나 만일 말꼬리가 궁으로 향하고 머리를 밖으로 향해 섰다면 반드시 공자(公子)를 호위하려는 뜻이니 이를 알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아니하오리다.”
자결하려는 남편 진성대군의 소매를 붙잡고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고 오라 하니 과연 말머리가 밖을 향해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반정에 의해 중종이 연산군이 폐위된 다음날 왕위에 올라 자동적으로 왕비가 되었는데 곧바로 반정공신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죄인의 딸이 왕비로 부적절하다는 주장으로 중종에게 단경왕후의 폐위를 요청했다. 반정으로 졸지에 왕이 된 중종이지만 반정공신의 요청에 ‘조강지처인데 어찌하랴’라며 거절했다. 특히 중종은 단경왕후가 자살하려는 것을 기지로 말려 궁극적으로 왕이 되게 한 공로도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반정세력은 종사의 대계를 볼 때 반드시 단경왕후를 폐위해야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결국 중종은 종사가 극히 중하니 사사로운 정을 생각할 수 없다며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출시키라는 명을 내린다. 생각보다 조속하게 무혈로 집권한 반정세력이 단경왕후를 폐위해야 하는 근거는 그녀를 왕비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아버지 신수근 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들을 죽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단경왕후는 폐출되자마자 세조의 사위인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영의정 정인지의 아들)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본가로 돌아갔는데 왕비로 있었던 기간은 단 일주일로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왕비로 있었다. 이때 나이 20세로 단경왕후는 이런 상실의 아픔을 지니면서 71세로 죽을 때까지 자식 한 명 없이 중종의 사랑이 되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알려진다. 야사에는 중종이 즐겨 타던 말(御馬)을 보냈더니 단경왕후가 왕을 보듯이 쌀죽을 쑤어 먹였다는 전설도 있고 중종이 단경왕후의 집 쪽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니 신씨 집에서는 부인이 입던 분홍치마를 바위에 걸쳐놓아 임금에게 화답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바로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설과 다른 모양이다. 염상균 화성연구회 사무처장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했다.
‘계비인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6일 만에 죽자 신하들 사이에서는 단경왕후를 복위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그러나 중종은 이를 물리치며 오히려 건의한 사람들을 유배보냈다. 더불어 장경왕후 곁에 묻히고 싶은 마음을 토로하며 쌍릉 자리를 마련하라고까지 했다. 그래서 중종의 능은 처음엔 장경왕후의 희릉 곁에 조성됐지만, 제2계비인 문정왕후에 의해 강남구 삼성동으로 천릉돼 선·정릉의 정릉(靖陵)이 된다.’
중종에게 단경왕후는 조강지처였지만 옛 여인중의 하나로 잊혀진 여인이었던 것이다. 특히 중종의 임종 직전에는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실록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종 10년(1515) 장경왕후윤씨(章敬王后尹氏)가 사망하자 복위운동이 잠시 일기는 했으나 반대파들도 적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98년 숙종은 연경궁 내에 사당을 세워 춘추로 제사지내게 하고 한식에는 묘제를 지내게 했다. 1739년 영조는 다시 그녀를 왕후로 복위시키자 사묘(私墓)에서 능으로 봉해지면서 익호를 단경, 능호를 온릉으로 추봉했다. 그러므로 봉릉 이전의 신씨 묘는 작은 봉분으로 석물은 석인 1쌍, 망주석 1쌍, 상석 1좌, 장명등 1좌뿐이었다.
봉릉이 결정되자 무덤을 이장하지 않고 석물은 모두 주변에 묻고 그 자리에 능으로 만들었다. 온릉은 1739년에 조성되었으므로 다른 중종비의 능과는 달리 조선 후기 형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추봉된 왕비릉인 정릉, 사릉의 상설을 따랐다.
정려문에서 참도, 배위를 통해 전면으로 정자각, 우측으로 비각이 보이는데 정자각은 익공식(翼工式)의 맞배지붕이다. 봉분의 좌우 뒷면 즉 북⋅동⋅서 3면에 곡장이 둘러져 있으며 주변으로 소나무와 전나무를 심었다. 봉분은 보통 방위를 나타내는 12방의 난간석으로 둘려져 있으나 온릉에는 없다. 이는 단경황후의 능이 처음에 사가의 무덤으로 있다가 영조 때 추봉되면서 단종의 예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온릉에는 12지신을 표시하는 글자의 표현도 없다.
봉분 주변으로 석양, 석호,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일반적오로 석양과 석호는 서로 엇바꾸어 2쌍식 8마리가 배치되나 온릉은 단종 장릉의 추봉 예에 따라 각 1쌍씩 4마리만 설치했다. 봉분 앞에 혼유석 1좌,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고 망주석의 세호는 우주상행, 좌주하행의 원칙에 충실하다.
한단 아래 무인석은 생략했고 문인석만 한 쌍 있는데 장명등을 중심으로 배치돼 있다. 문인석은 공복을 입고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했던 복두(頭)를 쓴 모습으로, 홀을 쥐고 문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상체가 크고 하체가 짧은 4등신의 형태인데 이는 숙종, 영조대의 조각 형태다. 장명등은 낮은 하대에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화사석은 4각으로 소박한 인상을 준다. 석양은 배 부분이 특별히 불룩하게 나왔으며 석호는 마치 복슬강아지 모양을 닮았는데 호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귀여운 모습으로 꼬리는 S자 곡선을 그리며 등줄기 가까이 올라갔다.
일반적으로 능원은 능침 하계의 좌측 하단에 산신석을 놓아 3년간 제사의 예를 갖추고, 사가 묘역에서는 좌측 묘지 상단에 산신석을 배치한다. 왕릉에서는 산신도 왕의 통치하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온릉의 산신석은 능침 우측이 아니라 좌측에 있는데 이것을 보면 일반 묘의 형식으로 됐다가 추봉된 능역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온릉의 정자각은 정자각 3칸, 배위청 2칸으로 이루어진 5칸 정자각이다. 가구는 정전이 5량가이며 배위청이 3량가다. 지붕은 정전과 배위청 모두 맞배에 겹처마로 박경면에 풍판을 설치했다. 포작은 정전, 배위청 모두 초익공이다. 용마루에는 적새를 쌓고 앞뒷면에 회를 바르는 양상도회를 했으며 정전과 배위청 모두 잡상을 설치하지 않았다. 온릉 정자각의 분합문은 하단부 청판을 이중으로 둔 것이 특징이다. 배위청 앞과 좌우에 월대를 설치했는데 정면폭은 정전의 기단에 맞추고 배위청 전면너비는 4.506mm로 비교적 넓은 편이다. 정전 내외부 바닥과 배위청 및 월대의 바닥에 모두 방전(方甎)을 깔아 포장했다.
정자각 우측에 팔작지붕의 비각이 있으며 안에는 비좌와 비신, 옥개석을 갖춘 능표 1기가 있다. 전면에 ‘조선국단경왕후온릉’이란 비면이 있고 후면에 ‘공소순열단경왕후신씨’의 탄생과 책봉, 퇴위 및 약력을 음각했다. 이 능표는 한국전쟁의 흔적 또는 정자각 근처에까지 자리를 잡았던 군부대가 사격 연습을 이곳 주변에서 했는지 총탄 자국이 많이 보인다. 능 아래에 재실이 있었으나 1970년 도로확장 때 없어졌다.
단경왕후는 폐위된 후 추복위(追復位)하여 신주(神主)를 종묘에 봉안하였으므로 『단경왕후복위부묘도감의궤(端敬王后復位祔廟都監儀軌)』가 남아있다. ‘복위부묘도감의궤’는 폐위된 왕 또는 왕비를 추복위하여 신주를 종묘에 봉안한 의식, 절차 등을 영조가 추복할 때 기록한 책이다. 영조 15년(1739) 사우(祠宇)에 있던 신주를 새로 만들어 혼전(魂殿)인 자정전(資政殿)에 이봉했다가 다시 종묘에 부묘시켰는데 권말에 채색의 반차도가 있다. 복위부묘도감의궤는 현재 2책이 남아 있는데 또 하나는 『단종·정순왕후복위도감의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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